다섯 살 때 홍천 범파정 탐방을 시작으로 함흥의 풍월강산 주유천하까지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는 철마다 새롭다. 피고 지는 꽃의 표정에서 신록에서 성록으로 짙푸르다. 무엇보다 나무에 매단 수목 표찰의 쓰임새가 놀랍다. 초중고 학생이 등교한 후인 9시 이후는 갑자기 세상이 고요하다. 어린이집 등원하는 아이와 엄마의 정다운 대화 정도의 속삭임에 이끌린다. 아이가 엊그제 환했던 꽃을 기억한다. 꽃 지고 무성한 잎만 매달린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춘다. 그 아이 몸통과 비슷한 굵기의 나무줄기와 마주하였다. 저만치 언덕 위 앞서던 엄마가 뒤돌아 아
탁사정 기억이 누정 원림의 이미지를 재생산한다.제천 후배 영태에게 물었다. 탁사정(濯斯亭)을 가고 싶은데 근래 가 본 적이 있냐고 했더니, "탁사정은 유지 보수가 안돼 관리 상태가 안 좋을 것"이란다. "그래도 정자까지 올라가 보겠다."라고 말한 내게 "그러면 탁사정 주차장에서 만나자"라고 합을 맞춘다. 만나기로 정한 시간에 맞춰 출발 시각을 조정한다. 옛 생각이 절로 난다. 흰 모래톱이 길게 늘어서 해안가를 연상시키는 인상적인 과거의 풍경이 새삼 떠오른다. 친구들이 하도 멋진 곳이라고 가 보자 하여 따라나섰다. 한 떼의 청소년들이
농월정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영화 ‘청풍명월’영화 ‘청풍명월(김의석 감독, 2003)’은 엘리트 무관 양성소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만난 최고의 검객 두 남자의 우정과 운명을 그렸다. ‘청풍명월’은 태평성대를 바라는 백성의 바람과 가치를 위하여 건립한 공공 기관이다. 중립 외교의 광해군과 존주대의(尊周大義)¹의 명분을 지닌 사대부의 갈등이 고점을 찍은 폭풍 전야의 상황이다. 명분은 권력욕을 낳고, 이상과 현실은 늘 길항한다. 노회한 정치가는 시대의 젊으신네를 아프게 한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가 시작된 광해군과 인조반정 전후이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의 ‘산수무늬전돌’에 있는 누각오래된 옛 도읍 고도(古都)는 엄청난 문화적 자긍심이다. 고도의 역사문화환경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육성하여 활력있는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하려는 특별법이 있다.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약칭 : 고도육성법)이다. 고도육성법에서는 고도를 구체적으로 경주, 부여, 공주, 익산으로 지칭한다. 우리나라 누정 기록은 『삼국유사』에 488년 정월, 신라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들린 기록에서 시작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 22년(500)이 ‘임류각(臨流閣)’을 짓
나는 거기 안 낄래, 큰 소리 내어 시나 읊으며 호기롭게 살래광주(光州)의 호가정(浩歌亭)을 찾았다. 누정 원림을 꽤 알고 있다 생각하였으나, 호가정이라는 누정은 이름부터 생소하다. 호가정은 처음 명종 13년(1558년)에 세상과 해후한다. 이때가 유사(柳泗, 1503~1571)의 나이 56세이다. 명종 때의 윤원형, 심통원과 함께 삼흉 중 한 사람, 왕족인 이량(李樑, 1519~1582)이 있다. 이량이 유사에게 넌지시 회유하였다. 함께 너른 세상을 휘젓고 놀자고. 그때 ‘나는 거기 끼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다. 벼슬을 내
조선의 젊은 학자들이 주희의 무이구곡 경영에 주목한 사실 국내에 순수하게 조경문화답사를 이끌어온 단체가 있다. 1999년 여름 원주 판부면의 치악산 자연휴양림에서 창립총회를 열었으니 24년의 농익은 답사 동인이다. 동인의 숫자는 들락날락하여 연인원 스무 명에 육박하였고, 지금은 8명의 동인이 이끈다. 답사보고서 작성이 동인의 조건이며 몇 권의 답사 동인지를 꾸렸다.1) 조경문화답사 동인 『다랑쉬』의 이야기다. 이제 친목은 가족이 되었고 답사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로 삼육구십이월 연 4회이다. 답사 주제를 정하고 장소, 식당,
운조루 사랑 마당의 자랑거리 – 수양버들 닮았으나 잎은 향나무 느낌인 위성류곧추서서 위로 곧게 자라던 운조루 사랑 마당 화오의 위성류 원줄기는 온데간데없다. 새로 나온 줄기가 암갈색으로 거칠게 갈라져 고풍의 아취로 마당을 향해 뻗는다. 뒷줄기도 질세라 서향으로 줄기를 고쳐 자란다. 화오(花塢)는 작은 흙담에 꽃나무를 심어 즐기는 화단으로 한국정원문화의 백미이다. 화오는 전통조경에서 시설물 중 화계와 함께 식재 시설에 속한다(김충식, 전통조경 복원정비 기준마련, 문화재청, 2022, p.37.). 화계(花階)가 축대처럼 섬돌(階)을
프롤로그-전시서, 거연정에 앉아 푸르고 깊은 물결을 바라본다순순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나는 스스로 그러함의 일상에서 머문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흐르는 물살처럼 투덜거리며 바위에 부딪친다. 물의 속살도 멍든 물감 풀어낸 듯 깊다. 그러니 교란의 심사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 지난 겨울 내린 눈은 잠시라도 강가를 하얗게 덮어 바위는 잘 다스린 종부의 장독대 정원처럼 소담소담 풍요로웠다.겨울 강가의 찬 물기로 느끼는 싸한 가격감에 휘청한다. 먼길을 한마음으로 달려왔다.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들이 강가로 주거니받거니 풍경의 고단함을 말갛게
둑방을 걸으며 의림지의 시경(詩境)을 읽는다.나는 둑방 걷기를 좋아한다. 그 푹신한 느낌이 좋아 ‘둑방길’이라 표상하며 즐겨 찾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감촉 밀고 들어오는 그 관능, 그때마다 제방을 쌓은 공력과 발효된 세월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감지한다. 특별한 경험은 오래 남는다고 했다. 걸어서 의림지로 소풍 가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의림지 둑방을 걷기만 했을까. 뛰고 춤추고 놀던 원체험을 지녔다. 아버지의 젊은 모습이 사진으로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제천(堤川)은 냇둑이라는 말이다. 제천의 옛 지명인 내토(奈吐)로 부터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한국정원문화의 원형다시 살만한 곳에 대하여 생각한다. 「택리지」에서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네 가지를 살만한 곳인 가거지(可居之)라 한다. 지리와 산수는 지형, 생리는 경제, 인심은 사회적 조건이다. 지리는 풍수와 긴밀하여 배산임수, 단단한 지반, 질 좋은 물, 햇볕 양명한 탁 트인 지세와 만난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은 아늑하고 집 앞으로 물을 두면 두루 생명 유지에 더할 나위 없다. 뒷산을 주산으로 좌우 산줄기가 둘러싸고 계류가 좌우로 흘러 앞의 하천과 합류한다. 하천 너머 다시 안산이 있어 전후좌우의
해거불여강거(海居不如江居), 강거불여계거(江居不如溪居)살만한 곳의 선호도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거뜬하게 서술한다.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계곡에서 사는 것만 못하다.”라고. ‘거창 수승대(搜勝臺)’가 위치한 위천(渭川)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길이다. 위천은 약 80리(32.89㎞)의 청량한 계곡 물길로 북상면의 ‘용암정(龍巖亭)’ 일대의 숲과 바위 사이를 흘러 위천면의 수
장소와 공간의 차이, 인류학적 장소와 비장소많은 이들이 한 번 다녀간 역사문화공간을 다시 찾는 일을 꺼린다. “어! 갔던 곳인데...”라는 말로 경로 탐색 기준은 바뀌고 새로워진다. 안 다녀온 곳을 다니기에도 바쁜데 간 곳을 또 간다는 것은 무위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곧바로 또 다른 감흥의 즐거움을 찾는다. 반면에 나는 그곳이 몇 번의 반복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따로 매겨놓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두서없는 간격으로 찾아간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를 방관으로 즐기며 다시 방문하는 편이다. 심지어 갔던 곳을 다시 예방
높은 산 흐르는 물, 풍경은 그대로이고 초목은 다정하다시인 조지훈은 「한국사상의 근거」(, 1959)라는 글에서 “최제우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최대의 인물이라 할 것이니, 그 사상은 이 민족정신문화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주체를 발양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김용옥, 동경대전1, p65.에서 재인용). 수운 최제우(1824-1864)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최진립(1568-1636)의 후손이다. 경주 최부자로 일컬어지는 가계가 최진립의 3남으로 이어지고, 최제우는 최진립의 4남으로
원림문화의 현대적 향유한국의 원림문화는 약동하는 문화일까, 망실되는 문화일까? 아니면 한국전통조경학회나 문화재청, 학교나 연구기관에서 다루는 향상되는 고급 연구 주제일까? 아니면, 고루하고 한물간 구태의연한 소외의 지대를 보존하는 영역일까? 나는 항상 궁금했다. 이를 대표하는 학회는 ‘한국전통조경학회’이다. 그러니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전통조경’이란 용어로 통용하고 있다. 이러할 때, 그 ‘전통’이라는 용어와 ‘조경’이라는 용어가 합쳐진 애매함이
‘백운동 원림’인가 ‘백운동 정원’인가?문화재청에서는 ‘강진 백운동 원림’이라 부르며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경관으로 분류하였다. 관리자인 강진군은 이곳을 ‘백운동 정원’이라 한다. ‘백운동 원림’을 네비게이션으로 좌표 삼을 때는 ‘백운동 정원’으로 입력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명명되어 이정표로 통용된다. 그랬을 때 십중팔구 ‘설록다원 강진’이 펼쳐지는 제법 운치 있는 고개 정상쯤의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보길도 부용동 원림의 시경을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어부사시사」 40수에서 발견한다. 65세(1651년)에 창작되었음이 고산 윤선도의 연보에 기록되었다. 인생의 가장 원숙기에 접어든 54세(1640년)에 를 짓고 56세(1642년)에 「산중신곡」 18수를 창작하였으니 「어부사시사」는 이후 11년이 지난 후이다. 중국은 병자호란 이후 순치제,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이다. 프랑스는 루이14세 시대이며 베르사유 궁원이 조성되었다. 인도는 샤 자한 재위 기간으로
시경(詩境)과 화경(畫境)의 만남서석지 원림의 시경을 살피기 전에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인 '쌍계입암'을 먼저 관람한다. 영양의 입암면에 있는 입암(선바위) 주변을 그린 것이다. 바위의 골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입암 앞의 파문이 이는 격류는 기운생동하는 봄 풍광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물 건너편 둔치에서 선바위와 암벽을 올려다보는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화중 인물이 올려다본 선바위와 암벽을 그렸으니 앙관(仰觀)의 시선 풍광이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화중 인물을 내려다본 둔치 뒤
시경(詩境)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고 온전한 감흥이다.시경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다. 시흥(詩興)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치나 시정(詩情)이 넘쳐흐르는 흥취 있는 풍광을 말한다. ‘절로 시 짓고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미적 정취’인 시정화의(詩情畵意)이고 의경(意境)이다. 시흥이 고취되어 풍광을 읊는 시 창작의 경계에 도달하는 온전한 감흥이다.지난 연재에서 "일찍이 원림 공간에 걸린 대련이나 제영과 시는 ‘형상 너머의 형상’인 상외지상(象外之象)으로 의경의 공간을 표현한다. 그래
숲길이 있어 미음완보(微吟緩步)의 소요유(逍遙遊) 가능열린원림문화의 향유는 숲길로 성립한다. 숲길이 있기에 미음완보의 거닐기를 통한 소요유가 가능하다. 소요유는 원림이어서 행세한다. 그래서 윤선도(1587-1671)의 산중신곡에 나오는 임천한흥(林泉閑興)은 우주적 직관이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원림을 거닐면서 여유롭고 한가한 흥취에 접어드는 임천한흥의 묘사는 찾기 힘들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생명의 약동인 엘랑비탈(élan vital)의 생기발랄한 행위와 임천한흥은 교접한다. 숲길 / 온형근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
가을비가 주는 안개의 풍광은 신선이 놀다 간 흔적가을비 심하게 흔들린다. 우산대를 똑바로 세우는 게 어렵다. 산발로 흔들린다. 추분 지나면 초목에 찬 이슬이 맺힌다는 한로인데, 이 지점의 가을비는 방향을 특정할 수 없다. 수시로 흔들리는 게 바람의 항로일지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일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른다. 평일 아닌 휴일의 원림 향유는 의지와 상관없다. 들쑥날쑥 산만하다. 월요일이라는 기점에서 마땅히 진진한 의미의 변화를 꿈꾼다. 새로움은 곧 변화이고 이윽고 구태이다. 그러니 원림은 늘 변하지 않으면서 자세히 보면 지극정성의 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