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장소와 공간의 차이, 인류학적 장소와 비장소

많은 이들이 한 번 다녀간 역사문화공간을 다시 찾는 일을 꺼린다. “어! 갔던 곳인데...”라는 말로 경로 탐색 기준은 바뀌고 새로워진다. 안 다녀온 곳을 다니기에도 바쁜데 간 곳을 또 간다는 것은 무위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곧바로 또 다른 감흥의 즐거움을 찾는다. 반면에 나는 그곳이 몇 번의 반복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따로 매겨놓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두서없는 간격으로 찾아간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를 방관으로 즐기며 다시 방문하는 편이다. 심지어 갔던 곳을 다시 예방하는 일은 더 없이 유위하다. 갈 때마다 새롭고 계절마다 내면의 사유가 성장한다. 나에게 각인된 장소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인문의 금광으로 존립한다. 더군다나 한국정원문화를 촉각적으로 감각하고 아름다움의 행성으로 인지하는 일은 목적과 과제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여기서 함께하는’ 자체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실존 실존이다.

‘장소(place)’와 ‘공간(space)’은 차이나는 개념이다. 특정한 위치적 의미를 지니고 개인이 주체가 되는 관계와 경험에 달라붙는 대상이 ‘장소’이다. 장소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다. 인간의 경험 혹은 생활세계(the lived world)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정한 물리적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지리적 위치(location)에서 인간의 실천(practice)이라는 요건을 포괄한다.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된 것이자, 우리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 깊은 중심”을 장소로 보아야 한다는 ‘랠프(Relph)’와 장소를 추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생활세계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이-투 투안(Tuan)’의 관점도 살펴볼 수 있다. ‘공간’은 ‘장소’와 상대적이다. 추상적이고 물리적이어서 유동적인 대상이다. 공간에 주체적 행위의 시간이 깃들며 내력이 생기면 장소로 작동한다. 공간을 더욱 제대로 느끼고 가치를 부여하면 장소가 된다고 ‘투안’은 말한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장소’의 변화와 소멸을 강조한 새로운 개념과 이론이 제시된다. 인류학자 오제(Auge)는 장소와 공간의 이항 대립 대신 ‘인류학적 장소(anthropological place)’와 ‘비장소(non-place)’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인류학적 장소’는 공간의 역사성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고 사람과의 관계와 유대를 통하여 장소의 고유한 정체성에 준거를 제공하는 장소이다. ‘비장소’는 오로지 ‘이동’과 ‘소비의 의사소통을 위한 익명성’으로 행위를 소외시키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통과가 목적인 장소이다. ‘전통적인(인간적인)’ 장소로 여겨지지 않는 지점을 다루고 있으며 비장소의 예로 고속도로, 공항, 대형할인마트 등 단지 스쳐지나가는 개념의 공간을 열거한다. 비장소는 자유로운 ‘익명성’을 경험한다. 티켓, 카드, 코드 등의 매개물을 통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며 비장소의 익명성을 통해 오히려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비장소는 ‘장소가 없는 곳’이 아닌 ‘전통적인 장소가 아닌 곳’이라는 말과 같다.

 

강릉 선교장의 세한삼우(歲寒三友) 혹은 삼청(三淸)

대학 동기 모임으로 강릉에 다녀왔다. 출발할 때 이미 선교장(船橋莊)과 경포대(鏡浦臺)를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취재 답사’를 떠올렸다. 숙소가 오죽헌 옆의 ‘강릉오죽한옥마을’이라 첫날 저녁 식사 전에 가능하겠다는 일정 계획에 근거하였다. 친구 한 명이 함께 나섰다. 자주 들렸지만 또 다른 변화와 느낌으로 선교장을 찾았다. 내게 선교장은 ‘인류학적 장소’이다. ‘비장소’인 스쳐지나갈 뿐인 환승 구역이 아니다. 반드시 온몸의 신체로 밀도 있게 수축과 확장을 지각하는 장소이다. 인터체인지가 아니라 다양한 인문의 흔적과 만남이 보장된 교차로이다. 천천히 걸으며 흥얼거리는 산책의 장소이다. 걷고 느끼고 읊으며 순간의 선문답처럼 떠오르는 화두에 금방 매혹적으로 반응한다. 공부라는 게 관념만으로 성취에 이르지 않는다. 길을 헤쳐 나가며 팝업처럼 튀어 오르는 명제 하나만으로도 현지의 정서에 충분히 감동한다.

 

선교장 백호길 청매(2023.01.05.) / 선교장 청룡길 금강송림(2023.01.05.)
선교장 백호길 청매(2023.01.05.) / 선교장 청룡길 금강송림(2023.01.05.)

 

 

선교장 청매 /온형근

대관령 가로막은 거대한 준령이

선교장 백호길 매화를 틔워

한참을 머물며 홍복이라고 웅성대는

분기탱천한 꽃망울

터져 벙그러진 흰 꽃의 단정함에서

겨울 들판으로 내뿜는 맑은 청향

 

묵은 인심 털고 둘러싸인 우백호와 좌청룡

솔향 그윽하여 거둘 향은 없을 둔덕으로

고담준론까지야 아니라도 경청 위해 말미는 나눠야지

어제와 같은 산만으로 자르고 잘라 밤새 눈 내린다.

두고 온 옛이야기 깊은 내면에 묻고

 

청매의 그윽한 향기로 산모퉁이 바로 돈다.

 

예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선교장의 백호길과 청룡길이 새롭다. 백호길로 접어든다. 잘 만들어진 산줄기 오솔길은 반원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휘면서 이끈다. 오솔길은 길의 중앙이 있어 넓혀졌다가 되살아난다. 가장자리 들풀의 군락이 그렇게 이끈다. 우람하게 다가온 구갑 터진 금강송림은 대관령으로의 시선을 가린다. 대관령이 영서의 혹한을 차단하고 선교장의 우백호 송림 산줄기가 나머지 찬바람을 에워싼다. 백호길 언덕바지에 세한삼우의 맑은 청매가 벌써 꽃을 피웠다. 꽃망울 탱탱하게 터져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의리로 주변이 맑고 환하다. 선교장의 상서로움은 좌청룡 우백호의 금강송림 산줄기가 바다의 온갖 보화와 뭇 생명으로 펼쳐지는 데 있다. 백호길과 청룡길의 구갑 터진 송림의 무성한 언덕 산줄기는 우람하고 육중한 내원(內苑)의 준령으로 괘를 바꾼다. 소나무와 대나무, 맑은 매화의 삼청(三淸)으로 무한한 청향을 드리운다.

 

활래정, 독서의 깨달음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물

선교장의 활래정(活來亭)은 들어서는 오른편에 네모난 석조기둥을 연못 안에 둔 누마루를 가진 정자로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차실이 온돌방과 마루방 사이에 있고 외부는 창호로 된 여름의 장소이다. 주희(朱熹, 1130~1200)는 독서를 한 후 얻은 깨달음인 관서유감(觀書有感)의 기쁨을 시로 남겼다. 솟아오르는 물인 활수(活水)가 샘에서 나오는(來) ‘활수래(活水來)’처럼 맑다고 하였다. 시의 마지막 구절인 ‘위유원두활수래(為有源頭活水來)’에서 ‘활래(活來)’의 명칭을 따온 것이다. 원두(源頭)는 물이 나오는 근원인 맑은 샘을 말한다. 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활래정은 실제로도 서쪽 태장봉에서 맑은 물이 연못으로 입수되어 그 물이 다시 경포호수로 출수되는 구조이다.

 

골짜기 가득 찬 소나무 물결 바람소리 잔잔하고 滿壑松濤風韻細
개인 창가 오동나무 달빛에 이슬 꽃이 서늘하네 晴窓梧月露華凉
정자 앞에 솟아흐르는 물도 근원이 있기에 亭前活水來源在
나의 집 대대의 가업 길이 이어 얻으리 繼得吾家世業長

-이돈의, ‘만학송도’

 

김구(1876~1949)가 1948년 4월 당시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이돈의(李燉儀, 1897~1961)에게 글씨를 보냈다. 독립운동가를 남몰래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을 ‘머뭇거림이나 두려워함 없는 기색’을 뜻하는 천군태연(天君泰然)이라는 휘호로 예를 표하였다. ‘만학송도’는 활래정 마루방에 걸린 ‘이돈의’의 칠언시이다. 골짜기 가득 솔잎 바람에 흔들리는 운치를 잔잔한 파도 소리에 비유한 ‘만학송도풍운세’로 표상하였다. 실제로 좌청룡 우백호의 우거진 금강송림에서 시원하고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다. 창호문으로 비 개인 오동나무가 달빛에 서늘하게 비춘다. 솟아오르는 물이 나오는 샘의 근원을 떠올리며 오래도록 가업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당부의 시이기도 하다. 당시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 오천 정희용(烏川 鄭熙鎔)의 칠언시도 걸려 있다. 대나무와 배롱나무가 경관의 주요소이고 활래정 누마루 난간에 걸터앉은 퉁소 부는 객이 경관의 초점요소로 차향(茶香)을 깊게 호흡한다. 활래정은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다정(茶亭)의 기능을 갖췄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선정을 위해 내한한 IOC위원의 차회가 이곳 활래정에서 열렸다.

겨울의 활래정은 연꽃의 화려한 순간에 멈춰 온몸으로 꽂꽂하다.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은 한자문화권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애송하는 시문으로 원림을 경영하며 연을 심은 못을 조영하는 실천에 이르게 한다. 애련설은 매력적인 원림 조영의 동기를 유발하는 작정서이고 주돈이는 동아시아 정원문화를 주도한 닮고 싶은 롤 모델(role model)의 전형이다.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 ‘애련지’, 경복궁의 ‘향원정’이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따온 말이다. 활래정의 겨울 연꽃은 무심한 시간을 조용히 감내한다. 평온의 미학으로 주변을 감싼다. 죽은 듯이 살아있음이 다가오는 ‘활수래’의 장소이다. 옛 사람은 유난히 연잎에 띨어지는 빗소리를 즐기며 오감을 열었다.

 

소나무를 심어도 구름을 범하는 빼어난 모습 기다리기 어렵고 栽松難待干雲秀
국화를 옮겨 심으니 손 가득 향기 나는 것이 마냥 사랑스럽도다 移菊空憐滿手香
한밤중 멀리 계신 님을 그리워하는 꿈에 놀라 깨니 半夜忽驚思遠夢
연못의 푸른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길게 들리네 綠荷池上雨聲長

-오건, ‘외집 행장’ 「덕계집」 제7권,

 

덕계 오건(1521~1574)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학문의 길이 있음을 강조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임신년(1572, 선조5)에 병으로 사직하고 경남 산청 덕계리로 낙향하여 원림을 경영하였다. 거점 공간인 ‘작은 집’을 짓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에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연못가에 소나무를 심고 국화를 심었다. 그리하여 지리산의 봉우리와 경호강의 맑은 물굽이를 조석으로 관조하면서 ‘푸른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유난히 즐겼다. ‘파초우(芭蕉雨)’를 만끽하듯이 ‘녹하우(綠荷雨)’ 또한 소리의 입자로 종일 명상에 잠기게 한다. 활래정에 앉아 겨울 연꽃의 적조한 평온의 미학을 마주한다. 차 한 잔의 사색과 독서의 깨달음이 맑은 샘처럼 솟아오른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