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숲길이 있어 미음완보(微吟緩步)의 소요유(逍遙遊) 가능

열린원림문화의 향유는 숲길로 성립한다. 숲길이 있기에 미음완보의 거닐기를 통한 소요유가 가능하다. 소요유는 원림이어서 행세한다. 그래서 윤선도(1587-1671)의 산중신곡에 나오는 임천한흥(林泉閑興)은 우주적 직관이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원림을 거닐면서 여유롭고 한가한 흥취에 접어드는 임천한흥의 묘사는 찾기 힘들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생명의 약동인 엘랑비탈(élan vital)의 생기발랄한 행위와 임천한흥은 교접한다.

 

숲길 / 온형근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느라 자리에 더 누워

잴 수 없는 많은 꿈으로 놀라 깬다.

 

​찾지 못한 너를 만나러 퍼뜩 길 나섰으나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 산목재(山沐岾)의 쪼그려 앉은 신기루

 

​불안한 자가당착의 삿된 허위

 

​외롭다고 괴로운 건지

아무도 탓하지 말라 설계된

지독하리만큼 저린 협착의 나날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강 건너가는 나룻배 잠깐 쳐다보듯

문득 서녘으로 빠알간 석양을 걷다 듣는

딱따구리 신갈나무 쪼는 둔탁한 독경처럼

 

어쩌지 못하는 것

번연히 알면서도

때 되면 구겨 넣듯

아쉬우면 숲길을 투덜 거닌다.

 

눈 뜬 게

자욱한 숲길이었건만

빗자루 자국 선명하다.

 

불 나간

형광등 갈지 못해 어두운 나는

주섬주섬

숲길로 나서면서 동트는 광경에 새어 드간다.

(2022.10.13. 미발표 초고)

 

숲길은 원림의 핵심 가치이다. 숲길을 통하여 풍경을 읽고 마음을 그린다. 천천히 걸으면서 계절과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오지 않을 풍경과 찾지 못할 마음도 숲길에서 드러난다. 숲길은 숨는 곳이 아니라 숨어 있는 속마음을 끄집어내 드러내는 곳이다. 그래서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부끄러운 자가당착의 모순도 반성한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세월에 무심해지는 법을 익히는 곳도 숲길이다. 처음에는 안개 자욱한 숲길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빗자루 자국 선명하도록 환하다. 원림 향유는 숲길을 따라 임연부를 향하여 풍요롭다.

 

아침 햇살로 숲길이 환해진다.(2022.10.10.) /  소나무 사이로 난 샛길인 ‘송간세로’(2022.10.10.)
아침 햇살로 숲길이 환해진다.(2022.10.10.) / 소나무 사이로 난 샛길인 ‘송간세로’(2022.10.10.)

 

원림은 사람의 마음과 몸이 일정 부분 개입된 인문(人紋)의 흔적이다. 일반적인 수림(樹林)과 달리 나무와 꽃, 길, 언덕, 바위, 계곡, 정자 등에 의미를 부여하여 풍경을 숙성한다. 자연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고 주고받는 소통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자연이면서 곳곳에 인위가 번뜩이며 빛을 발한다. 공간과 장소에서 발견되는 의미소에 반한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이고 신인묘합(神人妙合)의 미적인 유토피아이다. 원림은 자연철학의 산실이고 원림을 향유하는 사람에게 세밀하고 정성스러운 ‘알아차림’의 빌미를 제공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가 원림이다. 그 속에서 서로의 흔적을 남기고 찾는다. 부류가 생기고 숲길을 이동하며 외연을 바꾼다. 외연은 둘러싸여 늘리고 줄이는 개념의 변화로 일상에서 나타난다. 어느새 내게 맞는 부류에 겹겹 포갠 사람의 정원을 만든다. 정원과 정원이 만나고 중첩되어 원림을 이룬다. 사람의 원림이 조직이고 사회이다. 응축된 우주인 사물과 통합하느냐(물아일체), 우주의 기와 통합하느냐(천인합일), 우주를 인격화한 신과 사람이 묘하게 통합되는 접화(신인묘합)인가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정원이 만나 이루는 아름다운 소통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사람과 사람의 정원이 모여서 아름다운 소통을 이룬다. 한국조경신문에 ‘열린원림문화 향유’를 20회 연재하였다. 연재를 읽고 좋다는 사람의 정원이 있다. 2022년 여름 전통건축답사팀과 해남 답사로 녹우당 보수 현장을 들릴 때, 반갑게 달려와 인사를 나눈 분이 있다. 연재 사진만으로 현장에서 만난 나를 정확하게 인지하였다고 한다. 2021년 제20회 고산문학상을 수상하였던 조용미 시인이 그분이다. 평소 좋은 시를 접해보았던 터라 오래 만났던 지인처럼 스스럼 없이 해남 금쇄동 원림과 수정동 원림에 대하여 가고 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용미 시인은 한국조경신문에서 연재하는 내 글을 촘촘하게 숙지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정원 두 번째는 진주의 조경 호족이라 할 수 있는 강호철 교수이다. 자연과학 전공 학문의 영역에서 인문학적인 접근을 모나지 않게 잘 풀어주는 연재에 매우 흡족하고 있노라는 전갈이다. 나와는 서로 소통의 끈이 없었지만 <살기 좋은 녹색 도시>, <강호철 교수와 함께하는 세계의 명품 정원>을 통하여 나를 고무시켜준 적이 있었기에 이미 오래된 지인이나 마찬가지라 스스럼없이 반가웠다. 언제가 되든 한국정원문화 답사 길에 기회를 만들어 함께 소요유 하자는 말미를 잡았다. 흔쾌히 그런 기회를 나눌 수 있다는 장담을 서로가 서로에게 다졌다. 사실 기회라는 것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로 조만간 연말이 되면 뭔가 끄적여 만날 자리를 포장하여야겠다.

사람의 정원 세 번째는 20회 마감 원고를 보내고 ‘대한민국 한옥박람회’ 세미나 발표 원고를 PPT로 다듬고 있는 중에 온 전화였다. 정우진 박사이다. 함께 고대에서 심우경 교수의 제자로 ‘오봉학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까운 지인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일인데, 정색을 하고 일부러 따로 전화를 하여 연재의 좋은 점을 나열한다. 학부에서 동양조경사를 강의하는데, 답사 과제로 전통공간의 주련이나 시 등을 살펴보고 주인의 원림 감상법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면서 한국조경신문에 연재된 ‘열린원림문화’ 향유를 읽고 그러한 방식으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직접 본인의 시흥을 풀어 시를 창작하는 시경詩境의 경지를 체험하라고 권유한다.

학생들의 전공 입문 과정에서 수동적인 학습태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참여 형식의 수업으로 ‘글쓰기 표현’만큼 생각의 깊이를 아울러주는 게 없다. 학부 조경수목학 수업에서 실제로 그렇게 직접 글쓰기를 통한 조경수목 콘텐츠의 접근을 시도한 나의 경험을 전해주었다. 정우진 박사의 첫 말이 “시경(詩境) 등의 한국전통정원의 접근 방법이야말로 경관이 깊어지는 레이어”라고 흥분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같은 생각의 이야기를 잠시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만나서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시경(詩景)과 시경(詩境)의 차이를 직관한다.

시경에 대한 용어 사용의 빈도가 많아지면서 시경의 용어에 대한 구분을 직관적으로 다룬다. 시경(詩景)은 오감 중 일부이다. 시경은 다분히 객관적이다. 보고 듣는 시청각 위주이다. 학교 교육에서 교사는 교수학습지도안을 구안할 때 시청각 자료의 구성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만큼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된다. 시청각에 의존한 시적인 경치가 시경이다. 좋은 풍경과 거기서 들리는 아름답고 독특한 소리를 인지한다. 행위의 측면에서 시경(詩景)은 보고 듣는 순간에 탄복하는 통과의 속성을 지녔다. 학습의 영역이다. 보고 듣는 풍경을 통하여 미적 쾌감을 얻는다. 시를 창작하거나 어떤 정신세계의 한 영역을 긋는 깨달음까지는 아니어도 기분은 상쾌하다. 느낌이면서 알 수 없는 즐거움이고 기분 좋은 쾌활과 만난다.

시경(詩境)은 어떻게 다르냐. 시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다. 절로 시 짓고 그림 그리고 싶어하는 마음인 ‘시정화의(詩情畵意)’가 표상하는 원림의 의경(意境)이다. 억지로가 아닌 하고 싶어서 저절로 하는 지극한 경지를 말함이다. 공간과 경관에 마음과 풍경이 만나는 정경교융(情景交融)이 어우러져서 의경(意境)이 창안된다. 시경(詩境)은 실천의 영역이다. 오감과 육감이 혼재하면서 새로운 물결을 이루고 나간다. 큰 줄기를 생성한다. 그야말로 시의 경지에 들어가는 접신의 경지이다. 물아일체, 천인합일, 신인묘합의 체험이다. 실천이면서 깨달음이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온전한 경험이다

마음(정신세계)인 ‘정(情)’과 풍경(자연)인 ‘경(景)’이 서로 어울려 의경(意境)을 형성하는 것을 명(明)의 사진(謝榛, 1495~1575)은 “경물은 시가 나오게 촉매하고 정감은 시가 될 싹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들이 어우러져 한 수의 시가 된다.”고 하였다. 어떤 날의 아름다움을, 황량하고 쓸쓸함을, 시름과 고통 등을 자연의 풍광인 경물을 빌려와 표현한 시정화의가 시경(詩境)이 된다. 원림은 정경이 교융하여 의경이 창출되는 매개요소를 모두 지녔다. 일찍이 원림 공간에 걸린 대련이나 제영과 시는 ‘형상 너머의 형상’인 상외지상(象外之象)으로 의경의 공간을 표현한다. 그래서 시경(詩境)은 원림의 가치를 문화 예술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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