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사대부의 출처관에 기록된 원림 문화

사대부는 글을 읽는 선비인 ‘사(士)’와 벼슬하여 관료가 되는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사’는 은거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의 생활을 한다. 이를 ‘처(處)’라고 한다. 반면에 ‘대부’로서 조정에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는 ‘치인(治人)’을 ‘출(出)’이라 한다. 처는 수기에 들고 출은 치인에 나선다. 여기서 처는 곧 ‘은(隱)’과 상통한다. 은의 실천은 원림과 만난다. 한가로운 삶을 의미하는 ‘한거(閑居)’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거는 원림을 찾아 나서는 데에서 시작된다. 늘 가까운 곳, 그 자리에 있는 금수강산의 산수자연은 언제나 아름답고 훌륭한 경치로 나를 기다린다. 원림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나는 ‘알아차림’의 정성으로 원림과 만난다. 바위와 나무와 산줄기의 생김새를 통하여 풍광을 맞이한다. 계절과 절기마다 벅차오르는 감흥을 수시로 즐긴다. 새를 비롯한 원림의 뭇생명이 한가지로 연결된다. 그 관계는 깊고 단단한 뿌리로 이어졌다.

 

왕래풍류(往來風流) - 임천한흥.187 / 온형근

 

꽃 벌어진 자리에 영혼 활짝

새소리 한 모금 거두어 삼키면

아스라한 우주

 

지난해 꾸렸던 솔갈비 융단

넘치는 발길에 솔기를 잃었고

송홧가루 날리는 송간세로

가루 털린 송홧대만 꿈틀꿈틀

 

산 가장자리로 종처럼 매달린 때죽나무 흰꽃

호수의 윤슬만큼 잔잔하게 흔들린다.

 

협곡으로 찢어질 듯 뻗은 아까시나무 꽃송이

민물가마우지 목대만큼 굵다.

 

세 시간을 웃도는 원림 소요로

휘청대는 하루를 곧게 펴는

​하루 일해 하루 소용되고

아침 걷고 종일 몸뚱이 챙긴다.

 

거닐기 풍류로 날마다 아름다우니

시 한 편 쓰는 마음이 풍만 풍만

 

원림을 향유하는 문화는 늘 같은 공간임에도 매일 느낌이 다르다. 꽃 열린 모습을 보다가 새소리를 듣는다. 우주의 율려를 거듭 느끼면서 생명의 생동감을 함께 공유한다. 걷는 바닥으로는 지난해 떨어진 색깔 바랜 솔잎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바랜 솔갈비 융단 위로 새로운 송홧가루가 깔린다. 또 하나의 세월이 덮여진다. 어느듯 계절은 때죽나무 꽃 날리더니 아까시나무 꽃이 소담하다. 때마침 새롭게 연못을 휘젓고 다니며 군림하는 민물가마우지의 동적인 풍광을 만난다. 그러니 어제처럼 오늘도 오고가는 원림 향유에 든다. 내일도 마찬가지이다.

 

오고가는 왕래풍류

‘오고가는 풍류’인 왕래풍류는 이황(1501-1570)의 ‘도산십이곡’에서 발견한다. 천운대와 완락재를 왕래하는 즐거운 생활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천운대는 도산서당 앞 양편 산기슭 절벽에 자리한다. 도산의 ‘왕래풍류’의 공간이기도 하다. 완락재는 도산서당을 말하는데, 한 칸은 마루로 암서헌(巖栖軒)이고, 가운데 칸이 온돌방인데, 바로 이곳이 완락재이다. 이 완락재 앞 양편 산기슭 절벽에 천운대가 자리한다. 천운대는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장소를 총칭하는 말이다. 완락재(암서헌)를 중심으로 왼쪽(동)이 천연대(天淵臺)이고, 오른쪽(서)이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이다(그림 참조). 이 둘을 합쳐서 천운대라 부른다. 도산의 ‘왕래풍류’의 공간은 완락재에서 공부하다가 천연대까지 가서 명상하고, (천광)운영대까지 거닐며 사유하는 반복 행위를 말함이다.

 

암서헌의 온돌방이 완락재이고, 완락재에서 왼쪽(동)이 천연대, 오른쪽(서)이 천광운영대임. 왕래풍류는 놀이와 공부를 균형있게 한 흔적이기도 하다.(‘강세황 필 도산서원도’(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암서헌의 온돌방이 완락재이고, 완락재에서 왼쪽(동)이 천연대, 오른쪽(서)이 천광운영대임. 왕래풍류는 놀이와 공부를 균형있게 한 흔적이기도 하다.(‘강세황 필 도산서원도’(부분 확대), ⓒ국립중앙박물관

 

원림은 ‘숲정원’이다. 규모가 있어 나라동산 ‘원苑’을 사용하여 ‘원림(苑林)’이다. 바위와 산줄기와 계곡과 샘이 뭇생명을 육화시키면서 저절로 만물을 육화한다. 원림을 즐기는데 시 창작은 대단히 유효하다. 산수자연에서 노닐며 시를 짓는 것이 일상의 놀이였다. 이때 원림은 정신의 놀이터로 기능한다. 시적 언어가 이미지 속에서 통합되는 의경(意境)이 된다. 그러니 원림은 곧 시경(詩境)의 무대가 되어 서로 밀접하게 관여하여 원림이 시경을 낳고, 시경이 원림을 조성한다.

오고가는 원림 행위는 숲의 기운으로 원림 문화의 유전자를 확인하고 이끌리게 한다는 키워드가 존재한다. 발바닥이 숲의 오르내리막 울퉁불퉁 지형을 두들기며 뇌와 교신한다. 야생의 타전이다. 비로소 뇌파가 원시의 순수를 건드려 아득한 생명의 뿌리에 닿는다. 피고지는 꽃과 열매와 신록에서 성록과 단풍으로 화변하는 이치를 통하여 계절과 절기가 성립한다.

하루에 한 번씩 매일같이 왕복하는 왕래 풍류가 원림 향유의 본질이다. 자연과 벗삼아 살던 시절의 사대부가 앞다퉈 원림 조영과 향유의 행적을 남겼듯이 걷는 일이 줄어든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원림 향유의 절실함은 왕래풍류로 더욱 돈독해진다. 이 모든 일의 중심이 원림을 거닐며 읊조리는 행위에 집중된다.

 

원림은 공공재이다.

한거는 원림의 누정과 연못과 꽃과 수목을 일상의 기반으로 삼아 공공재로서 공유의 개념에 입각하여 시작한다. 가령 담양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담양은 누정으로 한국정원문화의 금쪽같은 유산을 지녔다. 원림 문화를 흥겹게 즐길 수 있는 공공재로서의 장소성을 온전히 갖추었다. 담양은 어느듯 공공재이다. 소쇄원처럼 후손이 뚜렷하고 거주하면서 실명으로 알려지는 장소까지도 사유 재산보다는 공유 재산의 가치가 우선된다. 그렇게 여겨진다. 공공재는 소쇄원에서 비롯되어 식영정, 환벽당을 포함한 명옥헌, 면앙정, 송강정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권 모두가 함축된다.

담양은 어느듯 가사문학권에서 한국정원문화의 최고 문화유산으로 전통조경 공간의 큰 획을 차지하는 위상으로 변모한다. 한국최고의 명품 숲인 관방제림은 또한 어떠한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의 스토리텔링은 담양의 깨어있는 시민운동의 한 조각일 뿐이다. 또 하나 더 있다. 죽녹원의 조성이다. 이를 착안하여 만들고 운영의 묘리까지 설계하고 정착시킨 지방행정의 모범 본보기는 감동을 넘어선다. 죽녹원 이야기는 문화유산이 즐비한 전남 지역을 살아있는 문화유산의 조화로운 실천으로 안내할 사례이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이런 공공재의 신영역을 개발하여 조성하고 그 가치를 시민이 향유할 수 있도록 높인 실제의 사례이다. 담양이고 광주의 뒤뜰이라는 일반화된 개념의 경계를 허문다. 광주호 자체가 이미 경계를 허물어 걸쳐있다. 문화유산은 경계를 긋고 선명하게 책임소재를 나눌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문화유산 하나만 보고 협력하여야 한다. 문화는 허튼 가락과 몸짓으로 정서를 위무하고 다스리고 비우면서 다시 새로움을 채우는 일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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