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시경(詩境)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고 온전한 감흥이다.

시경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다. 시흥(詩興)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치나 시정(詩情)이 넘쳐흐르는 흥취 있는 풍광을 말한다. ‘절로 시 짓고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미적 정취’인 시정화의(詩情畵意)이고 의경(意境)이다. 시흥이 고취되어 풍광을 읊는 시 창작의 경계에 도달하는 온전한 감흥이다.

지난 연재에서 "일찍이 원림 공간에 걸린 대련이나 제영과 시는 ‘형상 너머의 형상’인 상외지상(象外之象)으로 의경의 공간을 표현한다. 그래서 시경(詩境)은 원림의 가치를 문화 예술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유산이다."라고 마무리한 글이 의경의 총론이라면 이번 글은 각론에 해당한다. 각론이라고 하여 두루 열거할 수 없어 대표적인 몇 개의 공간을 대상으로 시경과 원림문화의 향유 방법을 모색한다.

박정욱은 “조선에는 별도로 원야(園冶)나 작정기(作庭記)와 같은 정원기법서가 없었지만 이런 종류의 시문을 보면 정원 축조의 기법과 묘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시문을 위해 경관을 조성하고, 시문을 통해 감상되며, 시문을 통해 그 기법이 전수되는 독창적인 조경 양식을 곧 시경(詩景)이라 칭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조원에 있어 일종의 규범이 되는 공통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한국의 조경, 詩景’<우리 시대의 조경 속으로>, 서울포럼, 1999, p.235.).”고 하였다.

여기서는 “시경은 조경보다 더 높이 바라보고자 한 것이며 따라서 자연 뿐만 아니라 화(畵), 문(文), 악(樂), 무(舞) 등이 모두 조화되는 경계”를 추구한다. “자연 속에 시적 형식을 집어넣고 시적 맥락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라며 한국의 현대 조경이 전통의 맥락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지점으로 한국정원문화에 품어져 있는 이런 시적 맥락을 찾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한국적 조경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노력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안대회는 “풍경과 이미지로 떠오르는 그 정경이 바로 시경(詩境)이다(<궁극의 시학>, 문학동네, 2013, p.20.)”라고 하였다. 시경이란 유사성에 의지한 경계로 사물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하는 풍경의 미학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풍경으로 내밀하게 채굴되는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생생한 개념만으로 시경이 만들어지지 않고, 대상에 가장 가까운 것을 보여주는 실제의 구체적 형상으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창조를 일컫는다.

온형근은 “시의 절제와 여백으로 채워 내는 풍광이 ‘시경詩境’이다.”라고 하였다. 시경이 원림조영의 기법과 만나 공간 구성의 여백과 여운을 조성한다. 시경은 한국정원문화의 조영 원리와 양식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명실상부한 전통조경의 문화경관으로 자리하였다. 한국정원문화는 시의 풍경인 시경(詩景)과 시의 경지인 시경(詩境)을 품고 풍광으로 산출되어 조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산 윤선도의 원림조영에 나타난 심미의식>, 국립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박사논문, 2021, p.84.).

 

시경(詩境)으로 살펴 본 한국정원문화 – 담양 소쇄원 원림

한국정원문화를 대표하는 3대 원림을 소쇄원 원림, 서석지 원림, 부용동 원림으로 언제부터인가 회자되고 있다. 최근에는 남도 원림이라는 표현으로 경북 영양의 서석지 원림을 빼고 강진의 백운동 원림을 포함하여 남도 3대 원림이라 칭하기도 한다. 최고니 3대니 하면서 묶는 것은 아마 많은 것의 본말을 정하는 일이다. 본류와 지류로 구분하여 대상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명료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속(俗)하다고 탓할 시비에 들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세속에 머물러야 문화의 흐름이 확연히 드러난다.

소쇄원 원림은 한국정원문화를 대표한다. 지금까지의 방문객을 연인원으로 따진다면 우리나라의 원림 중 가장 윗줄에 놓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방문하여 향유한 소쇄원 원림은 사실 내원에 해당한다. 최근들어 소쇄원 외원의 복원 목소리가 잦다. 내원과 외원이 완전하게 복윈된다면 소쇄원 원림은 문화유산조경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것이다.

소쇄원 원림이 광풍각과 제월당, 대봉대, 애양단, 매대, 폭포와 계류로 이루어진 정원(庭苑)인 것은 이곳의 풍광을 시경으로 묘사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시정화의(詩情畵意)처럼 나중에는 목판화로 그려진 ‘소쇄원도’까지 등장한다. 정원의 원형은 시경으로 고스란히 표상되었다. 소쇄원의 원형은 소쇄원48영으로 인해 사가원림에서 공공원림처럼 모두의 정원으로 객관화된 지식과 정보로 공유된다. 정유재란에 불탄 소쇄원의 복원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 주효하였다. ‘소쇄원 48영’은 복원 계획의 개념이고 설계 도면이었으며 시공을 위한 시방서였다.

 

소쇄원 원림의 난 식재-심우경 교수(2019.7.22.)출처 : 네이버 블로그 광풍제월처럼(통우 양재혁 씨 블로그)
소쇄원 원림의 난 식재-심우경 교수(2019.7.22.)출처 : 네이버 블로그 광풍제월처럼(통우 양재혁 씨 블로그)

 

소쇄원 원림의 파초 식재-심우경 교수(2019.7.22.)출처 : 네이버 블로그 광풍제월처럼(통우 양재혁씨 블로그)
소쇄원 원림의 파초 식재-심우경 교수(2019.7.22.)출처 : 네이버 블로그 광풍제월처럼(통우 양재혁씨 블로그)

 

 

기억 하나 떠올린다. 벌써 4년이 흘렀다. 고려대학교 오봉 심우경 교수님이 2019년 7월 22일에 집에서 기르던 난과 파초를 챙겨 소쇄원을 방문하여 식재하였다. 목판화에 그려진 식재 위치에 원형이 되는 식물이 없음을 안타까워 실행한다. 그때의 정황은 현재 소쇄원 경영자인 양재혁님의 블로그에 소상히 기사화되었다. 동영상으로는 심교수님이 난과 파초를 심는 이유를 설명하는 클립이 적재되었다. 시청을 권한다.

 

‘소쇄원 48영’의 ‘격간부거’와 ‘적우파초’의 시경과 ‘소쇄원도’의 난과 파초

이야기 나온 김에 소쇄원 원림에서 난과 파초의 의미와 위치를 살펴본다. 난은 ‘소쇄원 48영’에서 난은 ‘제40영 격간부거(隔澗芙渠)’에 나오고, 파초는 ‘제43영 적우파초(滴雨芭蕉)’로 시경으로 나타난다. 난은 군자의 깨끗하고 맑은 벗의 교제를 의미한다. 격간부거의 시경은 난을 직접적으로 시제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연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비유의 상징으로 표상하였다.

 

제40영 골짜기 건너편 연꽃(隔澗芙蕖)

조촐하게 섰는 게 훌륭한 화훼花卉로다(淨植非凡卉)

한가로운 모습 멀리서 볼 만하고(閒姿可遠觀)

향긋한 기운 골짝을 건너와 풍기네(香風橫度壑)

방안에 들이니 지란보다 더 좋구나(入室勝芝蘭)

-김인후, 소쇄원 40영에서

 

‘40영 격간부거’에서는 실내에 핀 난초의 향을 연꽃과 비교하는 시경으로 사용하였지만, ‘소쇄원도’에는 매대, 도오, 고암정사의 앞뜰의 3군데에서 난의 위치가 표현되었다.

제48영의 ‘적우파초’의 시경은 다음과 같다.

 

제43영 빗방울 떨어지는 파초잎(滴雨芭蕉)

어지러이 떨어지니 은 화살 던지는 듯(錯落投銀箭)

푸른 비단 파초잎 높낮이로 춤을 추네(低昻舞翠綃)

같지는 않으나 사향의 소리인가(不比思鄕廳)

되레 사랑스러워라. 적막함 깨뜨려 주니(還憐破寂寥)

-김인후, 소쇄원 48영에서

 

‘43영 적우파초’는 시어로는 적요의 시제를 지니고 의미로는 선비의 거처를 상징한다. ‘소쇄원 48영’에서 파초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소쇄원도’에는 제월당 남쪽에 식재되었다. 적우는 빗방울이다.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쓴 시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마지막 연의 파적료이다. 고요하고 쓸쓸함을 퍼뜩 깨트리는 순간의 시경이다. 그러니 파초의 식재 위치는 어디어야 하겠는가? 선비가 주로 수양하며 기거하는 방의 앞이다. 소쇄원에서는 제월당 앞뜰이 되겠다. 파초의 크고 푸른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은銀 화살 같고 그에 맞춰 푸른 비단을 두른 무희가 춤추는 듯하다. 이 소리는 파초가 빗방울과 뒤섞여 먼 나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소리인가. 나의 적요를 깨는 깨달음의 순간을 퍼뜩 알려주는 죽비인가를 떠올린다.

조지훈의 ‘파초우’도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에 “들어도 싫지 않은” 파초우를 듣는 창가의 풍광을 읊었다. 다음에는 시경으로 살펴보는 원림문화 향유의 두 번째 연재로 영암 서석지를 소요유하고자 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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