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시경(詩境)과 화경(畫境)의 만남

서석지 원림의 시경을 살피기 전에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인 '쌍계입암'을 먼저 관람한다. 영양의 입암면에 있는 입암(선바위) 주변을 그린 것이다. 바위의 골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입암 앞의 파문이 이는 격류는 기운생동하는 봄 풍광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물 건너편 둔치에서 선바위와 암벽을 올려다보는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화중 인물이 올려다본 선바위와 암벽을 그렸으니 앙관(仰觀)의 시선 풍광이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화중 인물을 내려다본 둔치 뒤편 높은 곳의 부감(俯瞰)의 조망 행동이다. ‘쌍계입암’에는 이렇듯 앙관경과 부감경이 함께 존재하는 화경을 갖췄다.

 

겸재 정선의 '쌍계입암' ⓒ국립중앙박물관  / 경북 영양군 입암면 '입암'(2022.11.7)
겸재 정선의 '쌍계입암' ⓒ국립중앙박물관 / 경북 영양군 입암면 '입암'(2022.11.7)

 

 

‘쌍계입암’은 정선이 경상도 청하(현 포항시) 현감으로 근무하던 1734년(59세)에 그린 것이다. 정선은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하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명승을 주유하였다. 그가 남긴 그림은 오늘날 한국정원문화의 원형을 유추하고 비정하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한다. 성주 관아의 객사에 있던 정자를 그린 ‘쌍도정’과 ‘도산서원’ 등의 경상도 지역의 명승을 그린 여러 작품들은 하양(대구 근처) 현감 재직 시절(46~51세)에 그렸다. 윤선도(1587~1671)를 비롯한 풍광을 포착한 여러 시인의 시경만큼이나 화경은 직접적이고 적나라하다. 시정화의(詩情畵意)가 있으니 화정시의(畵情詩意)도 성립한다.

여기서 입암은 석문(石門) 정영방(1577~1650)의 스케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서석지 원림의 입구에 해당한다. 동시에 서석지 원림 외원의 중심지이며 유람 행태의 근거지이다. 당시에도 그만한 풍광이 드물었고 지금도 그 근처는 영양군의 ‘선바위관광지’로 자리잡았다. <석문선생문집>에는 ‘입석’으로 시경을 표상하였다.

 

입석 – 합강에 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여섯 마리 자라 뼈가 아직도 썩지 않고

층층의 오색구름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네

저 기부같은 어리석음만 없으면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정영방, 「임천잡제16절」, 신두환역, <국역 석문선생문집>

 

여섯 마리 자라 뼈인 육오골(六鰲骨)은 대여, 원교, 영주, 봉래, 방장의 다섯 개의 신선이 사는 산인 선산(仙山)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 마리의 큰 자라를 말한다. ‘기부’는 제나라 ‘기량’의 처로 시신을 맞아 성 아래에서 10일 동안 통곡하니 성이 무너졌다는 고사를 가져온 것이다. 입암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을 기우(杞憂)의 고사와 연결하였다. 해학적인 반어법으로 입암의 우뚝선 기개를 호연지기(浩然之氣)로 삼을 것을 표상하였다.

 

서석지 원림의 「경정잡영32절」과 「임천잡제16절」의 시경(詩境)

서석지 원림은 내원에 해당하는 「경정잡영32절」의 시와 외원을 읊은 「임천잡제16절」의 시가 <석문선생문집>에 남아있다. 정유재란에 불탄 소쇄원의 복원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 기여했다는데 서석지 원림도 48수의 시로 형상화되었다. 정영방의 호인 석문(石門)은 서석지 원림의 부용동 석벽과 자금병 병풍 바위 사이를 두고 명명한 것이다. 이 석문을 서석지 원림의 입구로 설정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서석지 원림의 입구로 설정한 '석문'의 형상화
서석지 원림의 입구로 설정한 '석문'의 형상화

 

 

석문의 스승은 우복 정경세(1563~1633)이다. 이조판서로 재직할 때 인조가 인재 추천을 당부해 정영방에게 의중을 보이니 붉은 게 한 마리를 편지와 함께 선물로 보냈다 한다. 뒷걸음 치는 용퇴의 뜻을 풍자한 것이다. 스승의 스승이 남명 조식(1501~1572)이고 퇴계 이황(1501~1570)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이 간행(1543년)된 후 조선의 유학은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최고 절정에 이른다. 자연미의 새로운 발견이 그것이다. 가장 앞선 학자인 퇴계의 학문 실천 방법과 강령, 사상으로 정립한 것이 경(敬)이다. 석문 정영방은 이 경을 서석지 원림의 기본계획의 최상위 목표 개념으로 채택하였다.

경은 삼가고 공경하며 존경하는 시경이다. 경은 임진왜란, 광해군 대의 피의 숙청, 인조반정,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난세를 겪으면서 은자나 시인, 묵객이 자연을 벗삼아 작품을 창작하던 경향인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자연으로 시선을 옮기며 시경을 읊게 한 내면이다. 서석지 원림의 중심 건물의 편액은 경정(敬亭)이다. 마음에 경을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외물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이다. ‘경정’의 시경은 ‘언제나 깨어서’ 일을 살피는 ‘성성(惺惺)’을 내세웠다. ‘주일재’’의 시경은 ‘학문을 하는 요체는 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서석지 원림의 조영 목표는 ‘경의 실천’에 이르도록 구상하였다. 경의 실천은 정성스러운 ‘알아차림’으로 살피는 ‘리추얼라이프’를 통해서 펼쳐진다. 그래서 원림의 시경은 성(誠)과 경(敬)으로 하여 짓는다.

 

서석지 원림의 2단 2대 1제

서석지 원림 내원에 해당하는 정원의 부대 시설로 2단, 2대 1제가 있어 서석지의 4면을 두룬다. 2단은 ‘사우단’과 ‘압각수단’이고, 2대는 ‘옥성대’와 ‘회원대’이며 1제는 ‘영귀제’이다. 사우단은 주일재 앞에 돌출된 단으로 매송국죽이 식재되어 도산서원의 정우당 연못 위의 절우사의 ‘사우’의 개념과 닮았다. 압각수단은 400년 된 은행나무 식재된 행단을 말한다. 옥성대는 경정 앞의 축대이고 회원대(懷遠臺)는 담장 높이가 낮아 주변 경관을 여유롭게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영귀제는 주일재 맞은편에 있으며 시를 읊고 산책하는 곳이다. 서석지 내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발을 디디는 곳이다. ‘영귀제(詠歸堤)’의 시경을 살펴본다.

 

영귀제

달빛 아래 옥계를 산보하며

운곡의 시를 읊조리네

푸른 산마루는 더욱 우거지고

푸른 물은 더더욱 천천히 흐르네

-정영방, 「경정잡영32절」, 신두환역, <국역 석문선생문집>

 

‘운곡’은 주희(1130~1200)의 호이다. <논어>의 「선진」편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며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 구절이 있다.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영이귀(詠而歸)’에서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둑’인 ‘영귀제’를 명명하였다. 연을 심은 연못인 연당을 거닐면서 자연과 인간과 문화와 본성을 튕겨주는 시를 읊는 둑이 영귀제이다. 때로는 경정의 계자난간에 기대앉아 연못의 상서로운 돌인 옥대와 옥소암을 시작으로 선유암까지 이르는 유가와 도가의 꿈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경정잡영32절」의 시를 창작하였다. 이는 원림 향유의 현대적 계승 방법과 궤를 같이한다.

원림 향유의 현대적 계승 방법은 '미음완보'의 거닐기를 통한 정성스러운 '알아차림'이다. 이는 '리추얼 라이프'를 통하여 가능하다. 이를 '일일래 일왕래'의 루틴으로 실행한다. 그런 다음 원림에서 여유롭고 한가한 흥취에 흠뻑 젖는 '임천한흥'에 도달한다. 이러한 과정을 행위로 산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시심(詩心)을 위무하고 옛 생각을 떠올리며 사귀는 ‘상우(尙友)’의 실천에 든다. 그러할 때 생명의 약동인 '엘랑비탈'로 생기발랄한 원림 향유로 입도한다. 이번 글을 위하여 취재 답사차 다녀온 서석지 원림의 시경을 소개하면서 다음 연재의 원림을 무엇을 대상으로 할지를 구상한다.

 

석문의 쌍계입석 / 온형근

경정을 뒤로한 대박산 줄기 이어

주일재 뒤로 자양산으로 달릴 때

반변천도 곁을 따라 흐른다.

조산과 종산으로 이어 달리는 기운

자양산에서 뭉쳤다 떨어지는 자금병

점점을 찍으며 남이정이 단아하다.

 

청기천과 반변천의 두 강이 부용봉 산맥에

응집되는 입석은 집승정을 별당으로 삼아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당기고 내민다.

 

내원인 서석지 원림의 야트막한 담장은

주일재에서 곧바로 복개한 하천을 내려와

담쟁이덩굴에 걸친 달을 보는 나월엄 향해

느티나무 아래 오래 머물며 헤엄칠 듯

거북이 모양의 구포가 움츠려 뛸 듯하다.

 

마음은 선바위 근처에 서성이고

남이정에 올라 한량없이 맑은 바람에 놓인

서석지 기평석의 바둑돌 놓는 소리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굳은 난가암에서

먼 세월 두루 오간 노곤한 육신 눕는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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