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고산 윤선도의 ‘상우(尙友)’에서 배우는 원림 행위

옛 것을 가져온다. 옛사람을 배운다. 과거를 복기하고 즐기는 취향을 레트로(retro)라 한다. 회상, 추억 등을 뜻하는 레트로스펙트(Retrospect)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인류의 어떤 순간마다 복고는 물결처럼 파고를 탄다. 이내 잠잠하였다가 어느 계제에 일렁인다. 그래서 복고주의는 항상 명맥을 유지한다. 파도처럼 높낮이가 있고 물결처럼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다. 옛 것에 새로운 현대적 재해석이 더해지는 것을 ‘뉴트로(Newtro)’라는 신조어로 부른다. 복고적 감성에 현대적 기술을 접목하여 참신성을 추구하는 트렌드이다.

한국정원문화를 콘텐츠로 탐구하는 일의 지위는 어떠한가를 몇 개의 질문으로 진단한다. 우선 전통조경의 현주소가 옛 것을 가져오는 레트로의 향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전통조경을 문화로 접근하고 콘텐츠로 이해하려고 하는가? 진열도 복제도 잠깐의 유행도 아니라면 전통조경의 진정한 위상은 어느 지점에 다다른 것인가? 옛 것이라는 외형인가, 문화와 콘텐츠인가, 진정한 위상의 설정인가를 나누어 사유하고자 함이다. 한국정윈문화를 원림 공간으로 끌어 올린 최고의 임천한흥(林泉閑興)적 혜안의 조경가인 고산 윤선도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하는 조경가의 생각을 빌려 한국정원문화 콘텐츠가 지니는 당대의 존재 의의를 두루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를 낭송하고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행동을 고찰하고

그의 뜻을 관찰하여, 그의 지나간 자취를 본받아서 나의 인덕(仁德)을

보완하는 것이니, 상우(尙友)1)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대개 벗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벗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함을 벗하는 것이요,

그의 마음을 벗하는 것이지 그의 겉모양을 벗하는 것은 아니다.

 

誦其詩兮讀其書。考其行兮觀其志。效往跡而輔仁。謂尙友者是耳。

송기시혜독기서。 고기행혜관기지。효왕적이보인。위상우자시이。

蓋凡友也者。非友其人也。友其善也。友其心也。非友其面也

개범우야자。비우기인야。 우기선야。우기심야。비우기면야

-윤선도(尹善道, 1587 ~ 1671), <고산유고(孤山遺稿)> ’尙友賦’, 한국고전종합DB

 

‘상우(尙友)’는 옛 사람을 사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물자체를 흉내 내라는 게 아니다. 본질이랄 수 있는 정신을 말한다. 그의 마음이 당세의 사람됨과 정신과 삶을 벗하는 것이다. 옛 것을 흉내내는 외형의 소유가 아니다. 당세의 문화와 콘텐츠를 벗하라는 말이다. 고산은 원림에서 낮게 읊조리며 거닐면서 흥취에 드는 ‘미음완보(微吟緩步)’의 행위로 시경(詩境)을 이루었다. 고산의 원림 행위는 느린 속도에 펼쳐있다. 이런 마음과 정신을 ‘알아차림’의 주의 깊은 정성으로 일상에 담는 행위가 한국정원문화의 진정한 위상이다. 대상을 선한 마음으로 본질로 삼아 벗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수양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지혜를 만나고 자연에서 만나는 생명의 약동을 벗하는 원림 행위를 전제한다.

 

열린원림문화를 이끄는 근원적 힘을 ‘엘랑 비탈’로 호명하다

사람 드문 원림에 들면 솔향 가득 흡기하느라 마스크를 잠시 내린다. 더 깊숙하게 숲의 안부를 나누려 함이다. 이도 새벽 미명이기에 가능하다. 누린다. 평일 아닌 주말 낮 시간이면 많아진 등산객으로 곤란하다. 숲의 진면목을 호흡하면서 숲을 통해 ‘생명의 약동’이라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을 소환한다. 원림이 지닌 근본적 생명의 약동은 치유의 모든 것을 뚜렷하게 발현하는 정원치유를 내포한다.

숲에서의 미명은 환해지기 직전 잠깐의 어둑함에 나를 맡기는 일이다. 이제 환해져 내원재(內苑岾)를 오르는 데 송간세로(松間細路)가 환한 황토빛으로 눈매를 씻는다. 진종일 혹사한 더께 입은 눈매를 숲의 피톤치드가 말갛게 갈고닦는다. 은혜롭다. 새벽 숲 말고 어디서 이런 은덕을 총총 만날 수 있을까. 비록 이른 숲 완락재(玩樂岾) 내려가는 동안 아직 반팔인 팔뚝에 감기는 거미줄이 성가신 정도지만 가볍게 툭툭 털어 낸다.

 

내원재 송간세로(2020.6.14, 좌측) / 완락재(2022.5.16)
내원재 송간세로(2020.6.14, 좌측) / 완락재(2022.5.16)

 

 

이렇듯 원림에서 체득하는 ‘엘랑 비탈’은 세밀하고 피부에 닿듯 예민한 실제이다. ‘인간을 도약시키는 근원적 힘’인 엘랑 비탈이야말로 옛 사람을 벗하는 ‘상우’와 만나는 일이다. 숲에서 시작한 인류의 기원과도 연결되어 통한다. 무성한 수림(樹林)에서 인류가 이룬 열정과 절대고독을 통하여 이루어낸 지혜가 엘랑 비탈로 이르는 첩경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면서 겪는 실패와 미리 정해지지 않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만들어내는 창조가 원림문화이다. ‘열린원림문화’의 향유는 이러한 엘랑 비탈의 에너지를 서로 통하게 하며 막힘없이 퍼트리는 일이다. 생태 감수성을 도모하는 대안적 정원문화생활로 정신적, 물리적, 신체적 행복과 만족으로 인도한다.

완락재를 다 내려오면 곧바로 기감로(氣感路)의 짧은 편평한 길이 이어진다. 왼쪽에 몇 개의 얕은 산줄기가 도사리듯 만나 이룬 깊은 골이 기감로를 따라 연호한다.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느낌으로 기감로에 올라탄다. 잠시 발이 지상에서 벗어난다. 지금은 미증유의 사라짐으로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계명성(鷄鳴聲)길이 기감로를 잇는다. 닭울음소리 대신 홀쭉홀쭉 소리내는 청딱따구리가 오늘따라 기력이 쇠한듯 권태롭다.

 

원림을 거니는 일은 매일 괄목상대하는 일이다

새로 난 계명성길은 ‘움크려 돌아보는 정자’인 이고정(跠顧亭)을 지나 지목이 논인 배부른 능선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큰 주말농장 비탈길이다.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경작으로 근면 성실하고 풍요롭다. 대지예술가인 저들의 한 세대가 저물면 다음 세대도 일구고 가꾸는 대지예술의 경지에 도달할까? 역사와 인문의 반복은 차이는 있을 뿐 순환과 반복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처음에는 나와 상관없다고 믿었던 일이 스스로 엘랑 비탈의 에너지로 관계가 이루어져 영향을 받으면 끝내 자기 자신의 일로 나타난다.

 

산중 개안 – 임천한흥.132 / 온형근

 

이제는 숲 너머 엇갈려 걷던 우리의 눈길이 만난다.

산등성이에서 비얄길로 키 낮은 관목에 가려

감쪽같았던 낮은 포복이 무방비로 나 보란 듯

완락재에는 바싹 말라가는 낙엽 밟는 소리

부스럭대다 사각거리며 또 즐겁다.

 

오솔길 말고는 몽땅 숲이더니

굵고 가는 줄기 가늠되고 임지로 두텁게 덮인 낙엽의 켜켜

계명성길을 지나면서 저 아래 거두어 간 빈 닭장이 덩그렇다.

숲이 눈을 떴으니 추야대는 먼 들판이 보일까

개안의 생경함을 확인하려 발길을 이끈다.

-(2021.11.4.)

 

어둡던 원림이 살짝 밝아지는 찰나를 ‘우리의 눈길이 만난다’고 나 아닌 타자의 시선으로 정확하게 표상한다. 낙엽 가득 떨어진, 입동 지나 소설 근처 깊은 겨울 초입이다. 원림을 거닐면서 깨닫는 일은 곧 살아있는 생명의 도약을 느끼게 한다. 그것도 매번 같은 감응이 아니다. 늘 새로운 셈법으로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검법을 문화유전자처럼 시전한다는 사실이다. “선비는 사흘만에 만났을 때 눈을 비비고 예의범절을 다시 챙겨야 할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는 그 괄목상대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볼 만큼 상대방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부쩍 향상되었을 때 쓰는 말이다. 원림을 거닐다 보면 수시로 개안의 순간을 맞는다. 개안의 순간마다 생명의 도약으로 이끄는 근원적 힘이 축적한다. 그래서 원림을 거니는 일은 매일 괄목상대하는 대상을 만나는 일이다. 일상에서 원림 향유를 아끼지 말고 행위하라는 비책을 남긴다.

 

1)역사를 살았던 위로 올라가서 옛사람과 벗을 하는 것을 말한다. 벗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옛사람을 ‘상우’라 한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현세에 당세의 사람됨과 정신과 삶을 논하는 게 상우이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