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농월정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영화 ‘청풍명월’

영화 ‘청풍명월(김의석 감독, 2003)’은 엘리트 무관 양성소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만난 최고의 검객 두 남자의 우정과 운명을 그렸다. ‘청풍명월’은 태평성대를 바라는 백성의 바람과 가치를 위하여 건립한 공공 기관이다. 중립 외교의 광해군과 존주대의(尊周大義)¹의 명분을 지닌 사대부의 갈등이 고점을 찍은 폭풍 전야의 상황이다. 명분은 권력욕을 낳고, 이상과 현실은 늘 길항한다. 노회한 정치가는 시대의 젊으신네를 아프게 한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후기가 시작된 광해군과 인조반정 전후이다. 2003년 늦은 계절 수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서 늦은 밤 김의석 감독 일행과 우연히 만났다. 방화수류정을 안방처럼 들락거릴 때였다. 나는 마침 써클 선배들과 방화수류정에서 풍류를 나누고 있었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던 우린 마루에 둥글게 둘러놓은 신발을 조금씩 이동하며 영역을 나눈다. 주고받은 인사와 개봉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 이야기를 하였다.

영화 ‘청풍명월’을 보면, 농월정(弄月亭)에서의 주연(酒宴) 장면이 나온다. 화재로 소실되기 전 영화를 촬영하였다. 농월정을 중심으로 주연상을 앞에 놓고 정부 고위 관료들이 둘러앉았다. 배경 음악이 남다르다. 수원 태장고등학교 취타대의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이 농월정 앞 비단같이 흐르는 냇물인 금천(錦川)에 잔잔하게 피어난다. 차분하여 평화로운 풍광이다. 박명부(1571~1639)는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은거하다 인조반정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선다. 그 후 67세인 1637년에 농월정을 짓고 2년여 농월정 원림을 경영한다. 너럭바위 월연암과 계류를 앞에 두고 뒤로는 황석산이 입지한다. 3칸, 2칸의 평면이며 중앙 뒤편에 단칸 크기의 중재실(中齋室)을 두었다. 마루와 중재실의 경계에 머름을 꾸미고 창호를 달았다.

 

함양의 농월정(영화 ‘청풍명월’)  /  수원 방화수류정(영화 ‘청풍명월’)
함양의 농월정(영화 ‘청풍명월’) / 수원 방화수류정(영화 ‘청풍명월’)

 

 

농월정은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자연을 포옹하면서 위치를 잡았기에 정자를 두른 주변 환경과 조화롭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 밑에 괴는 주초가 ‘덤벙 주초’이다. 덤벙 주초는 생긴 그대로의 절벽, 바위 둔덕 위의 울멍진 높고 낮은 자연 암석을 적당히 의지하여 주초로 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둥의 길이는 이에 따라 길고 짧게 마름질한다. 이러한 덤벙 주초는 삼척 죽서루와 함양 거연정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출현한다.

1) 중화사상의 형식을 춘추시대의 주나라를 존중하는 ‘존주(尊周)’로 나타내고 그 내용으로 ‘인의예지’를 본질로 삼는다. 춘추대의를 말하며, 인문주의적인 중화(中華)의 실현이다. 중화의 중심은 이동하나 변화하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게 대의이다. 큰 것이 반드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도 가치론적으로 위대할 수 있다는 게 공자의 대의이다. 조선은 명청 교체기에 ‘내가 곧 중화’라는 인식에 든다.

 

농월정(A지점) 주변은 육십령로를 따라 남강이 흐르고 농월정을 등지고 황석산, 앞에 무이산이 동남으로 뻗어 있다. 서남쪽으로 도숭산, 대봉산, 내중산이 있고, 우락산이 북서쪽에 위치한다.(자료 : 구글 참조)
농월정(A지점) 주변은 육십령로를 따라 남강이 흐르고 농월정을 등지고 황석산, 앞에 무이산이 동남으로 뻗어 있다. 서남쪽으로 도숭산, 대봉산, 내중산이 있고, 우락산이 북서쪽에 위치한다.(자료 : 구글 참조)

 

 

김영택의 펜화로 그린 누, 정, 벌서정원

이제는 고인이 된 김영택(1945~2021) 화백은 ‘기록펜화의 대가’로 불린다. 건축물 기록화가이다. 훼손된 문화유산을 복원해 그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신념처럼 말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 복원도, 숭례문의 1910년대 전경, 창덕궁 주합루, 양산 통도사, 해인사 일주문, 광화문, 밀양 영남루 등을 작품으로 남겼다. 나는 농월정이 화재로 소실된 동안은 김영택의 농월정 펜화 스케치를 보면서 농월정을 즐겼다. 김영택은 농월정을 정교한 펜화로 그리고 덧붙여 글을 남겼다. 특히 농월정에서는 독특한 생각을 전개하여 글을 남겼는데, 오래된 건축물에는 영(靈)이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오래된 건물에는 영(靈)이 있다는 말처럼 농월정에 영이 있어 앞일을 예견하고 모든 사진을 찍도록 시킨 것 같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만한 자료라면 완벽한 복원이 가능할 것 같아 함양군청에 ‘모든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연락을 해 놓았더니 슬픈 답이 왔습니다. 설계를 마치고 2억 원의 예산도 마련해 놓았는데 공사가 무산됐다는 것입니다. (......) 복원된 멋진 모습을 빨리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택 화백, 『펜화로 그린 전통 건축-누, 정, 별서정원』, 「농월정」

 

작품 하나를 그리려면 50만~80만 번의 선을 그어야 나온다. 보통의 집념이 아니면 완성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 자를 사용하지 않은 독특한 미감으로 문화재를 복원해 그렸다. 김영택은 한국 최고의 정자 답사 코스로 담양 일대와 함양의 화림동 계곡을 손꼽는다. 담양의 대표 정자는 소쇄원이고 화림동에서는 농월정이 으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오래된 건물에 ‘영’이 있다고 한 사연은 이렇다. 화재로 없어진 농월정을 그리려고 답사 때 찍은 슬라이드를 찾다가 깜짝 놀란다. 농월정의 전체 모습, 현판, 황룡과 청룡이 조각된 충량, 5종의 화반에 중건기와 시를 새긴 목판까지 모두 슬라이드에 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자료 사진을 남긴 것은 난생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농월정 기록펜화는 사라진 ‘농월정’을 대신하여 감상할만한 명품 펜화였다.

 

김영택 화백의 기록펜화 농월정 (불교저널, 2015.07.06.) / 화재 이후 복원된 농월정(2022.11.14.)
김영택 화백의 기록펜화 농월정 (불교저널, 2015.07.06.) / 화재 이후 복원된 농월정(2022.11.14.)

 

 

인조 임금이 애도한 자부심 강한 공직자인 박명부

농월정의 창건자인 박명부가 죽었을 때, 인조 임금이 직접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그의 일생이 압축된 제문이다. 제문을 보면 뛰어난 문장력을 높이 세운다. 일찍 출사하여 왜란, 광해 연간의 혼란한 정국을 겪는다. 인조반정 후 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감내한다. 영창대군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 가는 정온(1569~1641)을 두둔하고 구명하려다 내쳐진 10년도 ‘강개하여 바른말을 하다가’로 은유한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연달아 여러 벼슬에 종사하였음을 나열한다. 더 귀하게 쓰려 했는데, ‘어찌 운명할 줄 알았으리’로 제문은 끝난다. 박명부는 이처럼 평생을 올곧은 공직자 자세를 견지한 자부심 강한 관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농월정을 짓고 쓴 시 한 수를 읽는다.

 

路傍誰識別區幽 길 가 그윽한 별천지를 뉘라서 알리오

山若盤回水若留 산은 구불구불 물은 빙 돌아 흐르네

暎砌池塘澄更滿 섬돌 그림자 잠긴 못은 맑고 가득하네

撲窓嵐翠捲還浮 창을 덮은 푸른 이내 걷혔다가 펴지네

兒飢不慍饘糊口 아이는 배고파도 굶주림을 성내지 않고

客至寧嫌屋打頭 객이 온들 어찌 천정이 낮다 싫어하리

莫道散人無事業 한가한 사람 일 없다고 말하지 말게나

晩專邱壑亦風流 만년에 골짜기 차지하니, 또한 풍류라네

-박명부, 『지족당집』 권1, 「제농월정」.

 

풍광이 더없이 그윽한 장소를 찾았다. 산굽이를 따라 굽이굽이 도는 금천이다. 가끔 너럭바위 암반에 물이 고여 연못처럼 관상한다. 그래서 월연암(月淵巖)이라 부른다. 그 지당의 물이 맑고 가득하다. 급하게 푸른 이내 꼈다가 걷히는 장면은 기막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살겠다. 그렇다고 나를 일 없이 뜻 없이 산다고 말라. 평생을 벼슬살이에 전념하였다.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골짜기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남은 인생을 되돌아보겠다. 인생을 정리할 세월에 들지 않았겠는가. 유유자적하면서 산수 자연과 친하게 지내는 풍류 생활로 접어든다.

왜란, 옥사, 반정, 호란의 시기를 강직한 공직자로 봉직하던 관료인 박명부의 농월정은 그 후 오랫동안 쇠락한 상태로 이어지다가 19세기 이후 지역의 명소로 거듭난다. 장복추(1815~1900)의 『농월정중건기』에 의하면 허물어진 것을 1895년에 중건하였다고 밝힌다. 『농월정중건량송』에서 김인섭(1827~1903)은, 옛 정자는 이미 허물어졌다고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상우도의 사대부는 농월정을 재평가한다. 박명부와 정온의 사상적 절개와 의리를 결부시켜 박명부를 당대 최고의 기개와 지조를 지닌 선비로 추켜세운다. 따라서 농월정은 절개와 의리를 상징하는 장소로 인식한다. 존주대의 정신이 깃든 의기의 장소로 개념 짓는다. 풍경에 의념이 입혀진다. 농월정은 이러한 의경(意境)을 높이 치는 사람들이 찾는 누정 원림으로 변모한다. 『함양누정지』에 나타난 농월정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소요하기, 거문고 연주하기, 달 감상하기, 시 짓기, 옛사람의 지팡이와 신발이 머문 장소라는 뜻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의 역할 등이다. 이곳을 찾고 선현의 존중할 이념과 사상을 소환하고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농월정 가는 길 / 온형근

 

불에 타 사라진 덤벙 주초 빈자리를 맨발로 걸었다.

한 번은 군데군데 물속에 박힌 돌을 밟고

한 번은 어찌 그 자리까지 갔을까 생각조차 나지 않네

신발을 적셨는지 바지를 걷었는지

황석산 너른 품 등진 단정한 모습에 홀려

 

​남강으로 흐르다 눈부신 반석에 발 걸려 굽이치는 계류

거센 물줄기 하얀 포말 일며 흐를 때마다 움찔댄다.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묵직한 바위 연못의 색소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용으로 소용돌이치고

건너뛰려던 몸 되돌려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발가벗겼으나 황석산의 바람과 금천의 물보라로

언제 불타 새로 지었을까 싶은 세월을 입는다.

다가서는 길이 바뀌어 마땅히 기웃대다가도

너럭바위 연못 삼아 옛사람의 그리움을 담는다.

넘실대며 흐르니 가야금 현처럼 달빛에 튕긴다.

-2023.04.15.

 

농월정은 참 많이 다녔다. 화재로 소실 된 후에도 조경문화답사동인 『다랑쉬』와 답사를 다녀왔었다. 새로 지은 농월정을 찾았다. 갔던 곳을 또 가도 역사문화경관 답사는 늘 처음처럼 새로운 느낌이다. 머릿속으로는 친밀한 곳이고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농월정으로 다가서는 길은 낯설다. 물을 건너서 다가선 적도 있고, 어찌 다가섰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 때도 있다. 물살이 꽤 힘이 세다. 다가섰다가 되돌아 새로 놓인 다리인 농월교를 이용한다. 이 다리로 다가서는 것은 처음이다. 다리 위에서 그 아래 저수 중력댐으로 막은 물길을 바라보니 강물처럼 수량이 많고 경관이 기막히다(그림 C). 산 아래 적당한 높이의 벼랑이 있어서 풍광이 깊고 풍요롭다. 물고기도 많아 보인다. 농월정 가는 길의 새로운 경관 포인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강하 하천정비는 피했어야 한다. 다리를 건너니 농월정 가는 오솔길을 따라 오래된 소나무가 풍성한 기운을 준다. 원림에서 소요할 때 가장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송간세로(松間細路)의 풍경이다. 농월정은 2015년에 복원하였는데, 벌써 중후하다. 빠르게 옛 모습을 되찾는다. 주변 황석산의 바람과 금천의 물보라의 덕택이다. 자주 출몰하는 이내 끼고 걷히는 술법에 힘입어서일 것이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이력을 빠르게 회복하는 본디부터 가진 기운이 있다. 농월정이 빠르게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 품격이 놀랍다.

 

농월정 근경 (A : 농월정, B : 황석산 줄기, C : 보, D : 농월교, E : 농월정 가는 송간세로, F : 월연암, G : 육십령로) 1. 농월교 시작점에서 농월정까지 거리는 300m 정도2. 농월교에서 바라보는 보는 경관이 뛰어남. 저수 댐의 길이는 220m 정도3. 월연암 일대의 너럭바위를 크게 한 바퀴 돌 때의 거리는 230m 정도 (참조 : 구글어스)
농월정 근경 (A : 농월정, B : 황석산 줄기, C : 보, D : 농월교, E : 농월정 가는 송간세로, F : 월연암, G : 육십령로) 1. 농월교 시작점에서 농월정까지 거리는 300m 정도2. 농월교에서 바라보는 보는 경관이 뛰어남. 저수 댐의 길이는 220m 정도3. 월연암 일대의 너럭바위를 크게 한 바퀴 돌 때의 거리는 230m 정도 (참조 : 구글어스)

 

 

살다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묵직한 먹먹함이 소용돌이칠 때가 있다. 어디론가 의지하고 싶다가 되돌아서고 흔들릴 때 농월정을 찾는다. 이곳에 와서 강직한 내 안의 본모습을 객관적으로 대면한다. 한참을 서성이고 중얼댄다. 내 생각과 말은 거센 물줄기 소리에 달빛처럼 순해지고 흰 너럭바위처럼 너그럽고 명료해진다. 지금 너럭바위 위를 서성이며 막걸리처럼 너그러워지는 사람 하나 그곳을 거닐고 있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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