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의 ‘산수무늬전돌’에 있는 누각

오래된 옛 도읍 고도(古都)는 엄청난 문화적 자긍심이다. 고도의 역사문화환경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육성하여 활력있는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게 하려는 특별법이 있다.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약칭 : 고도육성법)이다. 고도육성법에서는 고도를 구체적으로 경주, 부여, 공주, 익산으로 지칭한다. 우리나라 누정 기록은 『삼국유사』에 488년 정월, 신라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들린 기록에서 시작한다. 『삼국사기』에 백제 동성왕 22년(500)이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연회를 즐긴 기록이 있으며 무왕 37년(636)에 지은 망해루(望海樓)가 있다. 고도인 경주, 공주, 부여의 기록이다. 심지어 백제의 고도인 부여 규암의 절터에 발견된 벽돌의 산수문(山水紋)에도 중앙 하단에 팔작지붕을 한 누각이 그려졌다. 고도 부여의 누정 중 임란과 호란을 가로지른 시대를 살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원림의 가치를 더하고 있는 수북정 원림과 대재각을 주목하여 취재 답사를 다녀왔다.

 

1937년 부여 규암 외리에서 발견된 ‘산수무늬전돌’, 맨 아래 물이 흐르고, 중앙에 산과 나무, 위에 구름이 흘러 다니는 하늘을 그린 산수 인물화의 정교한 원형을 보여준다. B의 ‘인물’이 A의 ‘팔작기와누각’을 향하여 걷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1937년 부여 규암 외리에서 발견된 ‘산수무늬전돌’, 맨 아래 물이 흐르고, 중앙에 산과 나무, 위에 구름이 흘러 다니는 하늘을 그린 산수 인물화의 정교한 원형을 보여준다. B의 ‘인물’이 A의 ‘팔작기와누각’을 향하여 걷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백제 고도인 부여의 누정은 주로 부소산성에 있는 망해정(望海亭), 사자루(泗泚樓), 영일루(迎日樓), 백화정(百花亭), 반월루(半月樓)가 알려졌다. 나는 부소산성을 새벽 산책으로 거르지 않고 다녔다. 가끔 궁남지의 포룡정(抱龍亭)도 들렸다. 그러나 규암면의 백제교 건너 왼쪽 수북정(水北亭)은 공연히 아꼈다. 5년 가까이 부여를 들락대면서도 수북정을 들리지 않은 사정이다. 그러다 이번에 제대로 수북정을 거닐고 느낄 수 있었다. 귀한 것을 남겨 둔다는 것은 복스럽다. 기분이 토실토실해진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북정 일대의 암반의 독특함이다. 넓게 자리 잡은 암반 위에 수북정이 자리한다. 끔찍이 늦게 왔다. 좀 더 오래 머물며 거닌다. 주변 가득 채워진 대숲과 오래된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가 무성하다. 그야말로 듬직한 텃세를 온전히 구사하는 ‘수북정 원림’이다. 역사문화환경을 느낄 수 있는 시문이 있고 풍광이 아름다워 계절에 상관없이 깊이 있는 운치를 더한다. 역시 시경(詩境)이 절로 일어난다.

 

수북정 원림 2023, 봄 / 온형근

 

낙화암 굽이치는 물결 덧없이 흘러 슬펐을까

자온대로 이끌려 다독이며 흐르는 세월은

고개 들어 멀리 엿본다는 바위섬 위에 수북정 들였으니

어디선들 행장 꾸리는 번잡을 핑계로 머뭇대랴

새벽부터 나서는 내내 백마강 나룻배의 안위를 묻는다.

 

​자온대 복사꽃 휘날려 붉은 꽃잎으로 들뜬 친구

떠돌며 맴도는 드센 강바람 막아 선 움푹 안온한 나루터로 힐끗댄다.

배에서 내리니 정자 우물마루에 둘러앉은 맑은 웃음 가득해

 

​머언 옛 도읍 사비성 낙화암의 아침노을

고란사의 저녁 종소리까지 왼종일 그대여

나룻배 저어 바위글씨 찾아 춘추대의 찾았으니

 

사대와 모화慕華 아닌 우월한 자신감

척화와 배척 아닌 문명을 씨앗 삼아

패도(霸道)에 굽신대지 말고 호혜와 공영을 주체 삼으라 읊는다.

 

수북정에서 낙화암(落花巖)을 쳐다본다. 유달리 낙화암으로 휘몰아치는 물결에 서슬이 시퍼렇다. 삼국시대 사비수(泗沘水)로 불린 백마강은 그날의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 몇 번 굽이치고 나서야 수북정 아래 ‘저절로 따뜻해지는 바위’의 뜻인 자온대(自溫臺) 암반으로 다독이며 흐른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행차할 때 망배(望拜) 하면 저절로 따뜻해져 돌석(堗石)¹이라 불렀다는 『삼국유사』의 그 바위와는 의미만 같고 위치는 다르다. 자온대 암반 위로 복사나무 한 그루가 선홍빛 꽃잎을 마구 날리니 반가운 친구라도 올까 자꾸 ‘규암 나루’를 기웃댄다. 종일 기다린다. 춘추대의를 찾던 송시열(1607~1689)이 논산 돈암서원에서 부여를 자주 다녔다. 모래 속에 묻힌 자온대를 찾다가 엿바위(窺岩)에다 글씨를 크게 새긴다. 이들 율곡을 이은 서인들은 노론으로 거듭 결집한다. 사대와 모화가 아닌 조선만의 문명으로 우월하였다. 임란과 호란을 겪으면서도 힘센 나라에 굽신대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와 정신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과 자신감으로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한다.

1. 돌석은 구들장을 말하며 오늘날 구드래의 지명 유래가 된다.

 

수북정 원림(2023.04.04.)  /  수북정 원림에서 바라본 부산과 낙화암(2023.04.04.)
수북정 원림(2023.04.04.) / 수북정 원림에서 바라본 부산과 낙화암(2023.04.04.)

 

 

수북정 원림을 꾸려간 김흥국의 시대

수북정은 김흥국(1557~1623)의 호이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어지러운 정치를 떠나 백마강 규암 나루로 돌아온 김흥국은 인조반정에 조카와 친구가 동참하자 하여도 거절한다. 공신을 뜻하는 ‘기린각’에 이름 올리느니 물고기 잡아 들판에서 먹는 것이 더 좋다고 시를 지었다. 어울리는 동료는 주로 율곡을 잇는 문도이어서 황신(1560~1617), 신흠(1566~1628), 서성(1558~1631)이 있었고 선배로는 김장생(1548~1631)과도 함께 하였다.

신흠의 「수북정팔경」은 칠언절구 9수이다. 그중 자온대의 노래와 피리 소리를 말하는 ‘온대가관(溫臺歌管)’을 보면 다음과 같다.

 

荒臺遺跡自傷神。황폐한 대의 옛자취에 저절로 마음이 아프네

野草離離幾度春。들풀이 우거졌으니 몇 해나 봄을 보냈던가

滄海桑田亦閑事。상천이 벽해되는 것도 한가한 일이고

東風歌管屬閒民。동풍에 노랫소리도 한가한 백성 일일세

-신흠, 「수북정팔경」『수북정집-수북정집부록』, 한국고전종합DB.

 

규암의 자온대를 꽤 오래 찾지 않았다. 그만큼 바쁘다고 돌아친 세월을 야속하여 되돌아본다. 친구들과 함께 의분을 삭히던 이곳 수북정에서 백마강 경치에 흠뻑 빠진다. 아침노을, 저녁 종소리, 석양, 맑게 갠 달, 갈대와 기러기, 눈 쌓인 소나무, 안개비까지 절창이다. 이 모든 것을 좌우로 살필 수 있는 것은 자온대 암벽 꼭대기에 수북정을 올렸기 때문이다. 일망무제의 백마강을 파노라마로 읽는다. 벼슬을 내려놓으니 한가한 일(閑事) 뿐이고 그러니 한가한 백성(閒民)이 된 김흥국과 그의 친구들의 하루는 짧다.

이들보다 한 세대 늦은 황일호(1588~1641)는 김흥국의 절친인 황신의 아들이다. 수북정 아래에 황일호의 ‘백마강가(白馬江歌)’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백마강 갈매기와의 호젓함을 노래한 4장, 중국 고사보다 더 좋다는 5장, 백제의 역사에 젖은 비통함의 6장이 수북정과 규암 나루터 사이에 세워졌다.

 

부여의 수북정과 대재각 위치도A : 수북정, B : 자온대, C : 부여동매, D : 부산서원, E : 대재각   ⓒ구글어스
부여의 수북정과 대재각 위치도A : 수북정, B : 자온대, C : 부여동매, D : 부산서원, E : 대재각   ⓒ구글어스

 

 

부산서원과 대재각을 경영한 이이명의 시대

황일호의 사위인 이조참판을 역임한 이민적(1625~1673)은 부여 부산(浮山)에 세거하는 명문가 집안이다. 이민적의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쟁한 이경여(1585~1657)이고, 효종의 북벌책 추진의 영의정이었다. 아들이 신임사화 때 화를 당한 이이명(1658~1722)이다. 이들의 세거지인 부여의 부산에는 부산서원이 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노론이었던 부여 사족들이 추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효종이 이경여의 상소에 내린 여덟 글자인 “지동재심 일모도원” 각서석을 보존하기 위하여 손자인 이이명이 ‘대재각(大哉閣)’을 건립한다. ‘대재’는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지만(至痛在心),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日暮途遠).”라는 효종의 비답(批答)에 『상서(尙書)』의 “크도다! 임금의 말씀이여(大哉王言)”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수북정이 김흥국과 그의 동학들의 한가로운 날과 한가해진 백성으로서의 원림 문화였다면 대재각은 다음 세대인 이경여에서 출발한다. ‘부산서원’과 이경여가 명나라에서 가져온 ‘부여동매’까지는 찾기 쉽다. 그러나 대재각은 내비게이션을 두 번이나 돌려도 차량 접근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 결국, 마을 회관에 들러 여쭈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렇게 대재각을 친견할 수 있었다. 묻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는 기막힌 경관을 만난다. 구드래 서쪽이고, 부산의 동쪽인 이곳의 풍광이 앞에서 선보인 부여 ‘산수무늬전돌’의 풍경과 너무 닮았다. 이런 생각을 내내 떨칠 수 없었던 것은 나의 지나친 상상력이었을까. 구드래 황포 돛단배 운행 코스의 수정이 필요하다. 대재각 주변을 순회하는 뱃길 코스를 더욱 강조한다. 배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재각 주변 풍광을 살필 날은 언제일까.

 

대재각에서 낙화암 방향(2023.04.04.) / 백마강에서 대재각 방향(2023.04.04.) / 대재각에 있는 송시열의 ‘지통재심 일모도원’ 글씨 각서석 (2023.04.04.)
대재각에서 낙화암 방향(2023.04.04.) / 백마강에서 대재각 방향(2023.04.04.) / 대재각에 있는 송시열의 ‘지통재심 일모도원’ 글씨 각서석 (2023.04.04.)

 

 

대재각에는 현판이 두 개 걸려 있다. ‘대재각중수기’와 권상하(1641~1721)의 ‘운한대기(雲漢臺記)’이다. 권상하는 송시열의 많은 제자 중 ‘정통의 혈통에서 정통으로 이어받는’다는 ‘적전(嫡傳)’으로 불린다. 송시열 이후 노론의 대표이다. 이이-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진다.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던 갑술환국, 신임사화의 권상하가 대재각이 지어진 사연을 ‘운한대기’에 남겼다. ‘운한대기’의 내용은 이렇다. “효종의 승하, 북벌론 상황의 급변, 송시열의 위리안치 상황이다. 송시열은 죽음을 예견한다. 효종과 이경여가 주고받은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을 크게 써서 이경여의 막내아들인 이민서에게 준다(1677). 그 후 이민서의 아들 이이명이 이경여의 옛집 청은당 기슭 석벽을 반듯하게 갈아서 여기에 깊이 새긴다(1700, 磨崖深鐫). 이름 새긴 각석 아래 석대(石臺)를 운한(雲漢)이라 이름하였다(名其下石臺曰:‘雲漢’). 김수증(1624~1701)이 팔분체로 대의 이름 세 글자를 새겼다.”

대재각이 서 있는 공간을 ‘운한대’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두꺼운 땅에 의지하여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며, 모래와 물로 연못을 삼고 소나무와 대나무로 울타리를 삼으니, 물고기와 새가 뛰어오르며 날고 구름과 노을이 끼고 걷히는 것이 모두 궤석의 아래에 있었다.”라는 김상헌(1570~1652)의 ‘원우당기’를 보면 이곳에 대재각 이전에 원우당(遠憂堂)이라는 정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고로 대재각 터의 예사롭지 않은 풍광을 시대를 넘나들며 누군들 그냥 두었겠는가.

 

대재각 만나다 / 온형근

지극한 고통이 가슴에 남았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이 멀다.*

 

문장 하나에 머금은 치 떨리는 현실 분별

될 수도 이룰 수도 예감할 수도 없으니

 

​오오 크도다 그대 말씀이여!

 

​대재각大哉閣은 부산浮山과 백마강이 어울린

격랑을, 어깨를 흔들만한 물결로 차츰 재우는

부소산성을 호통하듯 깎아지른 단애취벽丹崖翠壁 앞

철계단 오르고 내려 다가서는 안개비 걷혀 선명하다.

 

​큰 뜻 가슴에 새기라고 풍광 또한 도우려는지

바닷가 비바람 기암괴석까지 둘러보고 내려보고 멀리 연다.

일찌감치 가슴이 답답할 때, 그보다 더 큰 아픔을 만나듯

새롭게 정화되는 눈물 한 방울 그 이상으로

바위에 새긴 우암의 비통한 일필휘지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

참고 삼키어 배기도록 버티며 견뎌야 한다.

*백강 이경여의 북벌 관련 상소에 답한 효종의 글귀 중 우암 송시열이 쓴 8자 글씨, 송시열이 유배지에서 백강의 아들 이민서에게 전함. 이를 손자 이이명이 금석에 새김

 

아름다움은 공유의 가치다. 아름다움은 오감과 육감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근사한 풍광이었다면 누군들 놓칠까. 발견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어느 순간 내게도 와 닿는다. 문화의 전승이다. 옛사람과의 상우(尙友)의 만남이다. 그이가 반했던 풍광에 나도 어느 순간 머물며 탄복한다. 그이처럼 나도 시 한 수 남긴다. 좋은 친구와 다음에 함께 가자고 기약한다. 기약은 보통 막연하여 허공을 떠돈다. 육 개월에 한 번씩 진료하다 일 년에 한 번으로 바뀐 침투성 강한 병원과 환자의 붙잡힌 관계가 아니다.

격동의 일상에서 기막힌 아름다움의 풍광은 주마간산처럼 스친다. 그래서 풍류는 자신을 스스로 내치고 버려야 담긴다. 이곳의 풍광이 안개에 가렸다 걷히는 연유처럼 풍광은 특정인에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자유자재로 발휘한다. 아름다움 스스로 신명이 있어 제멋에 겨워 자연을 부린다. 그래서 대재각은 오래된 비밀의 원림 공간이다. 대재각 이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결같이 자연 속에 소박하면서 평온하다. 사비수(泗沘水)의 물결이 세차 오히려 주변이 고요하다. 뜻을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산수 명상의 깊은 사색의 장소이다. 원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공간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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