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운조루 사랑 마당의 자랑거리 – 수양버들 닮았으나 잎은 향나무 느낌인 위성류

곧추서서 위로 곧게 자라던 운조루 사랑 마당 화오의 위성류 원줄기는 온데간데없다. 새로 나온 줄기가 암갈색으로 거칠게 갈라져 고풍의 아취로 마당을 향해 뻗는다. 뒷줄기도 질세라 서향으로 줄기를 고쳐 자란다. 화오(花塢)는 작은 흙담에 꽃나무를 심어 즐기는 화단으로 한국정원문화의 백미이다. 화오는 전통조경에서 시설물 중 화계와 함께 식재 시설에 속한다(김충식, 전통조경 복원정비 기준마련, 문화재청, 2022, p.37.). 화계(花階)가 축대처럼 섬돌(階)을 만들어 층단으로 식재하는 화단이라면 화오는 보통 1단으로 만든 화단이다. 사랑 마당 서쪽 화오에 식재한 위성류(Tamarix chinensis Lour.)는 부근의 다른 집에 없는 귀한 나무여서 자랑거리이다. 잎은 침엽수를 닮았으나 실상은 낙엽활엽수이다. 은행나무와 함께 형태와 생태가 서로 비교되는 나무로 각종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가느다란 가지는 늘어져 푸른 안개 낀 듯 눈매가 시원하다. 분홍색 꽃은 암갈색 줄기를 배경으로 더욱더 화려하고 곱다. 어느새 위성류 한 그루만으로 사랑 마당이 꽉 차는 느낌이다.

 

운조루 사랑 마당의 위성류(2023.03.04.) / 운조루 위성류 (국립수목원 웹진 Vol.134) / 운조루 족한정 마루에서 바라본 오봉산과 위성류(2023.03.04.)
운조루 사랑 마당의 위성류(2023.03.04.) / 운조루 위성류 (국립수목원 웹진 Vol.134) / 운조루 족한정 마루에서 바라본 오봉산과 위성류(2023.03.04.)

 

 

운조루의 정신으로 타인능해(他人能解)와 기단 굴뚝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나눔과 베풂의 실천 덕목에 합치한다. 깊은 사유를 지닌 배려의 산물이다. 타인능해는 뒤주에 쌀을 담고 잘 보이는 곳에 놓는 데서 출발한다. 누구라도 열어 필요한 쌀을 가져가게끔 하였다. 기단 굴뚝은 밥 짓는 연기가 담장 위로 오르지 않고 기단 구멍에서 흩어지게 하였다. 끼니 거르는 사람의 오감에 의한 소외감 증폭을 예방하자는 구체적 실천 조치이다. 이처럼 뒤주와 기단 굴뚝은 철저하게 남의 심사를 정성스럽게 살피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랑 마당의 위성류는 다르다. 돋보이기 위한 조경 식재이다. 독보적 우월의 식물 현시욕이다. 그러고 보니 유제양(1846~1922)과 손자 유형업(1886~1944)의 조경식물에 대한 접근 방법은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조경식물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배양, 식재 행위가 같고, 꽃을 사랑하는 조부의 ‘애화(愛花)’와 손자의 ‘애림(愛林)’은 성격이나 다루는 질적 가치로는 약간 다르다. 조부인 유제양 때의 토지가 손자 시대에 절반 가까이 줄 탓일까. 손자는 밤나무를 집단 식재하여 밤 농사를 짓고 참나무를 심어 도토리를 수확하여 가계를 윤기있게 꾸렸다. 소위 산림 경영의 일환으로 유실수를 도입한 것은 손자인 유형업이다.

조부인 이산 공께서 돌아가신 1922년은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량 기지화의 시대로 암울했다. 수리조합비, 비료 대금 등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식량 수탈이 심했다. 국내 식량 사정이 악화하어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하여 식량으로 보충하였다. 돌아가신 이듬해 제작한 영정 사진에는 활짝 핀 매화 분매가 가깝게 놓였다. 말년의 하얘진 모발과 수염이 분매의 흰 꽃 배경에 더욱 빛나서 하양만으로 눈부시다. 왼손에 살포시 잡은 책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듯 임장감이 생생하다. 손자 유형업은 화엄사 길상암의 ‘화엄매’를 보았을 것이고 분양받을 수 있었다. 일제의 수탈에 견디고 식솔을 줄이며 운조루를 지켜내는 일은 순전히 손자의 몫이고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도 선대에서 식재한 조경 식물은 여전히 사랑 마당의 위성류처럼 운조루를 고풍스럽게 이어간다. 조부 유제양이 화엄사 등지에서 귀한 식물을 구해 운조루의 조경 식물로 활용하였다면 손자인 유형업은 나무 심고 가꾸는 종수애림(種樹愛林)을 십년지계로 언급하고 가계 경영의 목적으로 대량 식재를 하였다.

 

한가롭게 머문다는 운조루 누마루 족한정(足閒亭)

운조루 사랑채 누마루인 족한정 주인께서 출타 중이시다. 마루에는 사색 매화가 꽃병에 꽂혔다. 백·홍·청·분홍이다. 포트에 물은 담겼고 차호도 비웠다. 찻잔도 가지런히 엎어져 단정하다. 「오봉학당」 연례 답사에 참석한 당원끼리 서로 앉자고 청한다. 두리번대며 다섯 명이 주춤주춤 앉는다. 팽주가 되어 찻봉지를 살피니 뽕잎차가 있다. 더 둘러보니 마땅한 차가 안 보여 보이차 담은 상자를 연다. 상자 겉에 멋들어진 그림이 그려쳐 차함인 줄 알게 한다. 백자 차호 대신 자색 나는 차호를 올린다. 알맞게 차를 넣고 객만 두런대며 운조루의 열린 벽으로 풍경을 음미한다. 샛노랗게 제 빛내며 만개로 치달리는 산수유가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문 바깥마당 장원에 피기 시작한 산수유와는 차이가 크다. 미기후의 차이가 자아낸 세밀한 비교이다. 빨래터의 빠른 유속이 차가운 물기를 날려 분사하여 바깥마당 주변 꽃눈을 머뭇대게 한다.

찻물이 떨어져 솟을대문 옆방으로 물 받을 곳을 여쭙는다. 원 나무줄기는 없이 새로운 줄기가 사방으로 늘어진 위성류 한편에서 물을 담는다. 차탁 아래 새로운 찻봉지가 잡혀서 열어보니 황차였다. 다시 백자 차호에 황차를 우린다. 한가롭게 운조루의 안산인 오봉산도 바라보고, 사성암이 있는 오산의 위치를 짐작한다. 족한정 뒤의 소나무 숲의 솔바람 소리를 직접 듣는다. 그 위로 노고단으로 내려오는 산맥의 기운을 더하여 솔바람 소리도 훨씬 더 호탕하다. 노고단 남측 능선이 운조루로 향하고 섬진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배산임수이다. 노고단이 북현무라면 남주작은 계족산이다. 좌청룡으로 왕시루봉이, 우백호로 천왕봉이 있다. 과연 「택리지」, 「조선의 풍수」에서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기록의 맥락이 허언이 아니라며 일어서려는데 솟을대문으로 들어오는 족한정 주인이 들어선다. 나서면서 뒤늦게 인사를 나누고 풍수계의 기능을 하는 연지의 물이 말라 있음에 대하여 물으니, 곳곳에 물이 새서 군청과 협의중이라고 한다.

 

구례 운조루는 노고단의 기맥이 바로 내려오면서 안산인 오봉산을 마주본다    ⓒ구글어스
구례 운조루는 노고단의 기맥이 바로 내려오면서 안산인 오봉산을 마주본다 ⓒ구글어스

 

 

문 안에는 한 쌍의 백학이 있고 문밖에는 버들이 두 줄로 늘어섰네

매천 황현(1855~1910)은 자신과 교유하고 있는 20명을 대상으로 ‘세모회인제작(歲暮懷人諸作)’이란 회인시를 남겼다. 이중 이산 유제양에 대한 회인시를 보면 운조루의 정원문화가 일상으로 그려진다.

 

문 안에는 한 쌍의 백학이 있고 / 門內雙白鶴

문밖에는 버들이 두 줄로 늘어섰네 / 門外兩行柳

성곽을 둘러 시냇물은 하얀 깁과 같고 / 抱郭溪如練

신발 자국은 맑은 모래에 깊이 남았네 / 屐痕明沙厚

응당 오고 가는 사람이 있어 / 應有往來人

날마다 연못 속 연꽃을 바라보리 / 日看塘心藕

묻노니 사람들아 어찌하여 / 借問人何如

하찮은 고뇌로 백발을 재촉하는가 / 惱閒催皓首

꽃이 있는 동산을 늘 찾아다니며 / 常尋有花園

친구 없이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 / 不飮無客酒

당시를 작은 공책에 베껴 적어서 / 唐詩寫小本

항상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네 / 一篇長在手

벽을 아름다운 산수 그림으로 채워 놓고 / 滿壁佳山水

누워 감상하며 여생을 마치리라 / 臥游終吾壽

나는 매양 그것을 볼 때마다 놀랍거늘 / 我每見之驚

묻노라 옛날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 問否於古有

-황현, 「이산유제양」매천집제3권

 

유제양은 당시를 탐독한다. 당시를 베껴 들고 다닌다. 그의 시에 대한 열정이 드러난다. 하루에도 수십 수의 시를 지을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가졌다. 지주로서의 여유로운 일상을 매천은 놓치지 않는다. 운조루 정원의 풍경도 고스란이 그렸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도 학이 그려져 있듯이 한 쌍의 백학을 사랑 마당에 놓고 관상한다. 아름다운 누정인 족한정에서의 풍경과 연못에서의 연꽃을 날마다 바라본다. 유제양의 ‘애화’는 말 그대로 조경 식물에 대한 천착을 의미한다. 벽에도 산수 그림을 그려 누워서 ‘와유’의 원림 행위를 하나 더 추가하여 즐긴다. 시인이면서 조경가의 면모를 매천의 회인시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유이주의 영정 / 유제양의 영정 / 전라구례오미동가도     ⓒunjoru.com
유이주의 영정 / 유제양의 영정 / 전라구례오미동가도 ⓒunjoru.com

 

 

운조루 누마루인 족한정에서 화단을 보니, 회양목(Buxus sinica (Rehder & E.H.Wilson) M.Cheng var. insularis (Nakai) M.Cheng) 2주가 소교목처럼 커져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는 동백이 터져 나오려 빨간 입술을 뾰죽 내밀고 있다.

 

동백이 속마음 자백할 때 / 온형근

​새처럼 떠도는 구름을 운조雲鳥라 읊을 때

족한정足閒亭 누마루 한참 죽치고 차 마시다

고개 들어 오봉산과 오산이 어우러져 이룬

푸르고 더하여 푸르러진 청산靑山

계자난간으로 연기처럼 피어나는 위성류의 분홍색 꽃

을,

 

찻잔 가득 산수유 노란 꽃송이 둥둥 떠다녔을까

처마에 잇댄 겹처마는

노고단 산줄기 내달리는 속도를 늦추고

솟을 대문 앞 천년초

쾌속으로 흐르는 빨래터 내당수를

귀 늘어 처진 게으름으로 내다본다.

 

오봉산 줄거리 아련하게 달려와 반길 연지는 말랐다.

새어 나간 물 막을 틈 없이

곳간은 타인능해로 다시 차고

결구 풀린 삐거덕 디딤 마루로

잘 생긴 회양목 꽃 피어 벌떼 앵앵 난다.

지금은 동백이 속마음 자백하려 붉은 혀를 날름대고

빈 마당으로 위성류 흐드러져 드리운다.

 

우물마루 닳은 채로 고색창연한 운조루를

고개들어 나서는 나들이의 본심은 청라靑螺

지리산 바람과 섬진강 들판이 솨아대며 만난다.

알곡은 들판에서 영글고

운조는 강가를 맴돌며 낮게 비행한다.

구름이고 새인 한낮의 누마루가 삐거덕 운다.

(2023.03.06.)

 

산다는 건 무너졌다 일어나는 거고, 누웠다 일어나듯이, 잠들었다 깨듯이, 취하라고 마신 후 속 뒤집어 고통하듯이, 어제는 보내고 오늘을 맞이하는 연속이다. 운조루 누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차를 마시며 주변으로 피어나는 산수유와 동백에게 잠깐씩 정을 나눈다. 삐그덕 대는 우물마루를 그대로 고풍이라 여긴다. 구름이고 새인 한낮의 누마루가 최고의 행복이다. 명당 중의 명당인 운조루에서 풍수의 기본을 익힌다. 살아있는 것들의 생존 전략이고 그래서 명당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경지에 다가선다. 사람의 마음이 작용하여 좋은 터가 정해진다. 운조루의 가단 굴뚝인 가렛굴과 쌀뒤주는 마음의 행방을 정확하게 짚는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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