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해거불여강거(海居不如江居), 강거불여계거(江居不如溪居)

살만한 곳의 선호도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중환(1690~1756)은 택리지에서 거뜬하게 서술한다.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계곡에서 사는 것만 못하다.”라고. ‘거창 수승대(搜勝臺)’가 위치한 위천(渭川)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길이다. 위천은 약 80리(32.89㎞)의 청량한 계곡 물길로 북상면의 ‘용암정(龍巖亭)’ 일대의 숲과 바위 사이를 흘러 위천면의 수승대에 이른다. 이어서 마리면의 ‘사락정(四樂亭)’을 돌아 거창읍의 ‘건계정(建溪亭)’ 천연 암반을 씻으며 동쪽으로 흘러들어 ‘합수(合水)’에 도달하고 합천댐을 채우고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위천의 상류 구간인 성천(星川)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내와 하얀 반석’의 계곡이라 여름이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이 ‘위천’의 고을인 원학동(猿鶴洞)을 “본래 동천복지라 칭하는 곳(素稱洞天福地)이고 맑은 내와 하얀 반석이 상하 오십리(淸川白石上下五十里)에 걸쳐 있다”고 하였다. 이런 ‘청천백석’의 으뜸가는 명승지가 수승대 주변의 경관이다. 이규경의 ‘낙토가작토구변증설(樂土可作菟裘辨證設)’은 60여 곳 정도의 낙토(樂土)를 소개한다. 남사고, 비기, 정감록, 택리지 등을 참고하여 선정하였다. 은일할 수 있는 험준한 산악과 강으로 접근성이 낮은 곳이다. 나라의 권세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심상의 공간이 아닌 실재의 장소이다. 수승대는 낙토인 이곳 원학동의 핵심 지역이다.

수승대는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인 구연암(龜淵岩)을 지칭하지만, 지금은 명승으로 지정된 자연유산이다. 이 일대의 구연서원, 관수루, 요수정, 함양재 등의 역사문화경관과 계곡을 아우른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이었던 ‘안의삼동(安義三洞)’은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일컫는다. 화림동에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이, 심진동에 풍류암, 장수사, 용추폭포가, 원학동에 수승대가 위치한다. 수승대 일대는 1982년 국민관광휴양지, 1995년 거창국제연극제, 2008년 명승 지정으로 이어져 야외수영장, 썰매장, 야영장, 오토캠핑장, 야외무대, 스탠드 등의 이질적 경관과 혼재한다.

구연서원지(龜淵書院誌)와 이건창(1852~1898)의 명미당집에서 찾은 수승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安義之龜淵洞 山水之勝甲于嶠嶺中 有一巖狀如伏龜而臨水 上可座百有人 數十株老松成蓋 本羅濟使价相送之所 名曰愁送臺(구연서원 중건기) : 안의 구연동은 산수의 승경이 영남 최고이다. 물에 거북이가 엎드린 모양의 바위 위에 백여 명이 앉을 만하고, 수십 주의 노송이 덮고 있다. 본래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송별하던 곳으로 이름을 ‘수송대’라 불렀다.

臺舊名愁送 不知其所自 或云當新羅百濟時 兩國之使 相送于此 輒不勝其愁 故以稱.[「수승대기」명미당집, 한국고전종합DB] : 대의 옛 이름은 신라와 백제 사신이 서로 보내며 그 시름을 번번이 이기지 못하여 근심을 보낸다는 ‘수송(愁送)’이라 칭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수승대라 불리기 이전에 수송대(愁送臺)로 호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정서를 만남의 기쁨으로 바꾼 수승대

근심으로 이별의 정서를 다스리는 ‘수송대(愁送臺)’는 퇴계 이황(1501~1570)으로 인하여 들떠서 찾아가는 빼어난 승경인 ‘수승대(搜勝臺)’로 거듭난다. 퇴계는 장인이 머물던 마을의 정자를 ‘사락정’으로 작명하고, 맞이하고 보낸다는 ‘영송(迎送)’이라는 마을 이름을 빼어난 경치를 맞이한다는 ‘영승(迎勝)’으로 제안한다. 이 마을에서 장인 회갑연 동안 머무는데 구연서원과 요수정을 경영하던 황산마을 신권(1501~1573)의 초청을 받는다. 그러나 급한 일로 방문하지 못한다. 최고의 풍광을 지닌 ‘수송대’의 명칭을 ‘수승대’로 부르자고 넌지시 운을 떼며 오언시를 읊는다.

 

搜勝名新煥(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봄을 맞은 경치 더욱 좋으리)

遠林花欲動(먼 숲 꽃망울은 터지려 하고)

陰壑雪猶埋(그늘진 골짜기는 눈에 묻혔네)

未寓搜尋眼(좋은 경치와 사람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

唯增想像懷(마음에 회포만 더해 가네)

他年一尊酒(다음에 한 동이 술로)

巨筆寫雲崖(큰 붓으로 구름벼랑에 시 쓰려네).

-‘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 이황

 

퇴계의 ‘수승대를 쓰다’라는 오언시이다. 슬픔의 정서를 벅찬 감흥의 정서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딜 나선다는 것은 시 한 줄 읊을만한 승경을 찾아나서는 일로 비견된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을 나눌 수 없듯이(不學詩 無以言)” 시를 모르면 사리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감정과 사상을 아름답고 부드럽게 끄집어내는 데에 풍류 명승만한 곳이 또 있으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들렸을 선유(仙遊) 풍광을 퇴계는 스킵(skip)한다. ‘좋은 경치와 사람(尋眼)’을 찾았으나 아직 나누지 못해 회포는 쌓이겠지만 다음에 한 동이 술과 큰 붓으로 풍류청운(風流淸韻)을 나누자 약조한다. 예나 지금이나 ‘다음에’라는 기약없는 약속처럼 맥빠지는 게 없건만, 동갑내기 신권의 화답시는 고마움과 정중함으로 가득하다.

 

林壑皆增采(숲골짜기는 온갖 풍채를 더하는데)

臺名肇錫佳(대의 이름을 아름답게 바로잡아 하사하네)

勝日樽前値(좋은 날 걸맞게 술동이 앞에 두고)

愁雲筆底埋(구름 같은 근심을 붓 끝에 묻네)

深荷珍重敎(보배같은 소중한 가르침 깊이 짊어지고)

(......)

-‘수승대봉화퇴계운(搜勝臺奉和退溪韻)’, 신권

 

요수(樂水) 신권의 ‘수승대 퇴계의 운에 화답하여’라는 오언시이다. 구구절절 긍정의 답글이다. 좋은 날 술 한 잔 나누자며, ‘수송’이라는 이름을 붓으로 묻고 귀중한 가르침 보배처럼 간직하겠다며 생각을 다진다. 퇴계의 시와 요수의 답시를 보고 갈계마을의 임훈(1500~1584)은 생각을 달리한다. 수송대는 수송대일 뿐이라고 뒤튼다.

 

花滿江皐酒滿樽(강가에 꽃 가득하고 동이에 술도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粉紛(벗하자고 소맷자락 잡아도 어지럽게 뿌리치네)

春將暮處君將去(봄은 점점 저물고 그대도 장차 떠나니)

不獨愁春愁送君(봄을 보내는 근심만이 아니라 그대 보내는 시름도 있다네).

-‘해수송의이시제군(解愁送意以示諸君)’, 임훈

 

갈천(葛川) 임훈의 ‘수송의 뜻을 풀어서 그대들에게 보이다’라는 칠언시이다. 퇴계가 수승으로 개명한 것에 대하여 해명하는 시이다. 술동이 가득한 꽃피는 날을 노래한다. 그러나 셋째 행에서 ‘그대도 장차 떠나니’라는 ‘군장거(君將去)’의 팩트를 시전한다. 여기 살지 않고 떠날 사람이 이름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비아냥댄다. 종래의 이름인 수송을 고수한다. 봄을 보내는 걱정보다 그대 떠남이 근심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삶의 외로운 존재를 시름겨워하는 의경(意境)이 시의 깊이를 더한다.

퇴계 이후 수승대는 내로라하는 명사의 풍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수승대에 와서 시 한 수 읊지 않고 어찌 청사에 이름 한 자 올리겠는가. 퇴계 이전의 수송대와 이후의 수승대는 생동감이 다르다. 영원한 현재를 살 듯 계속 시경(詩境)으로 재현된다. 지속과 지향은 차이와 반복의 속성을 지닌다. 매번 다른 시간에 살기에 다른 존재가 된다. 재현은 똑같을 수가 없다.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은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난다. 근래에 ‘성락원’의 역사성 논란으로 전국 명승 별서정원의 고증을 위한 전수 조사로 문화재청은 수승대의 명칭을 삼국시대의 명칭인 수송대로 변경하는 공고(2021.09.02.)를 내었으나 거창군이 반대하였고, 이후(2021.11.10.) 문화재청은 ‘수승대’ 현행 명칭을 유지하기로 밝혔다.

 

맑은 내와 흰 반석에 새긴 청천백석(淸川白石)의 흥취

수승대 거북바위는 높이가 10미터에 이른다. 고소공포 증세가 있는 나같은 사람은 생각만으로 그 느낌 안다. 그래도 올라갈 수만 있다면 감내하고 신선의 풍광을 훔쳐볼 생각이다. 남쪽 암벽과 북쪽 암벽에 빼곡하게 바위글씨를 새겼는데, ‘수송대’와 ‘수승대’를 나란히 새긴 곳은 북쪽 암벽이다. 그 밑에 퇴계가 대의 이름을 지었다는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와 갈천 임훈이 지팡이 짚고 신발을 끌던 곳이라는 ‘갈천장구지소(葛川杖屨之所)’를 세로 제목으로 새긴 후, 앞의 5언시 ‘기제수승대’ 40자와 갈천의 7언시 ‘해수송의이시제군’ 28자를 비교할 수 있게 한 곳에 새겨 후인들이 대의 이름의 변천사를 증좌하도록 한 배려는 가히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수승대(1)와 수송대(2) 바위글씨(2022.11.14.) / 수승대(1)와 수송대(2)의 시문 위치
수승대(1)와 수송대(2) 바위글씨(2022.11.14.) / 수승대(1)와 수송대(2)의 시문 위치

 

거북바위에 시문을 처음 새긴 연도는 1543년 요수 신권의 시 2편이 1~2번째 순서로 새겨지기 시작하여 1743년, 1810년, 1813년, 1865년, 1906년, 1900년대 중반, 1966년으로 이어진다. 위의 ‘기제수승대’와 ‘해수송의이시제군’은 1810년에 10~11번의 순서로 새겨졌고, 마지막 27번째 시문은 괴당 신대성의 ‘개축시’이다. 북쪽 암벽 19수, 남쪽 암벽 8수로 모두 27수의 시문을 새겼다. 423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바위글씨가 새겨진 셈이다. 각자(刻字)한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에 유행처럼 바위글씨 새기는 행위를 즐겼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시문의 순서대로 위치를 그림에서 보면, 이황의 시는 (10), 신권의 시는 (2), 임훈의 시는 (11)에 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거북바위에 투명한 ‘구암잔도’라도 만들어 둘레길을 내야 할 참이다. 계절마다 최고의 날에 설치와 철수가 쉬운 ‘유동형 투명잔도’를 도입할 만하다고 제안한다.

수승대 거북바위 주변의 물길은 바위에 부딪치며 맴돌면서 깊은 연못처럼 소를 이룬다. 연못처럼 짙은 물색을 지니는 특징을 살려 구연암(龜淵岩)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수승대 너럭바위는 연못 강역을 충분히 띄워 위치한다. 너럭바위에 앉아 거북바위를 쳐다 볼만한 감상 거리를 확보하였으니 천혜의 안배인 것이다. 이 너럭바위가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말한 ‘원학동 낙토’의 ‘맑은 내 하얀 반석’을 대표하는 승경이다.

 

거창 수승대 전경(2022.11.14.) / 수승대 너럭바위의 연반석(2022.11.14.)
거창 수승대 전경(2022.11.14.) / 수승대 너럭바위의 연반석(2022.11.14.)

 

수승대 너럭바위 / 온형근

단순히 넓어서가 아니라

태생이 끝없이 펼쳐지는 바위

그 틈으로 갈라져 가는 물줄기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었다는 세필짐洗筆㴨

그렇다면 벼루를 갈던 바위라는

연반석硯磐石도 틀림없이 이 근처

 

그렇다 그래서 암반에 새긴 흥취를

그 신명을 말릴 수가 없는데

붓 가는 대로 글 쓰다 산수의 다정을 흔들어

수승대 한쪽에 오목한 웅덩이에 묻은

장주갑藏酒岬 한 말의 막걸리는 누가 얻어먹을까

마신 티를 내지 않으니 들여다보는 저으기 큰 관심

시경詩境 절로 피어오르는 수승대 너럭바위에 서성인다.

-2022.11.14.

 

하얀 반석 위로 명징한 물이 흐르거나 닿지 못하여 드러난 은백색 화강암은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거북바위를 쳐다보면 절로 시경이 일어난다. 반쯤 위로 드러낸 너럭바위에 벼루를 갈던 연반석(硯磐石)이 있다. 좁게 갈라진 바위 틈새로 흐르는 물에 붓을 씻는다. 그렇게 사용하라고 친절하게 세필짐(洗筆㴨)이라 바위글씨를 새겼다. 도저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풍류의 공간이다. 거기다 오늘의 장원시에게 내 줄 한 말의 술도 보관할 장주갑(藏酒岬)에 준바하였다.

내를 건너 양쪽의 관수루와 요수정에서 흐믓한 미소 머금고 다소곳이 손짓한다. 거북바위에 오른다. 실제로 백여 명이 앉을 만한지, 내려보는 풍광은 머금던 시를 절로 풀어낼지를 가늠한다. 시를 읊으며 내려와 섬솔과 수승대 사이에 있는 영귀정 바위에 걸터앉는다. 관수루 마주보고 왼쪽 바위의 욕기암과 오른쪽 풍우대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단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는 은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욕기풍우영귀(浴沂風雩詠歸)의 의미를 속깊은 가슴에 새긴다.

 

관수루 욕기암(2022.11.14.) / 관수루 풍우대(2022.11.14.) / 수승대와 섬솔 사이 영귀정 바위(2022.11.14.)
관수루 욕기암(2022.11.14.) / 관수루 풍우대(2022.11.14.) / 수승대와 섬솔 사이 영귀정 바위(2022.11.14.)

 

1)「낙토가작토구변증설오주연문장전산고, 한국고전종합DB.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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