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프롤로그-전시서, 거연정에 앉아 푸르고 깊은 물결을 바라본다

순순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나는 스스로 그러함의 일상에서 머문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흐르는 물살처럼 투덜거리며 바위에 부딪친다. 물의 속살도 멍든 물감 풀어낸 듯 깊다. 그러니 교란의 심사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 지난 겨울 내린 눈은 잠시라도 강가를 하얗게 덮어 바위는 잘 다스린 종부의 장독대 정원처럼 소담소담 풍요로웠다.

겨울 강가의 찬 물기로 느끼는 싸한 가격감에 휘청한다. 먼길을 한마음으로 달려왔다.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들이 강가로 주거니받거니 풍경의 고단함을 말갛게 씻는다. 내려가는 길은 웬지 옷깃을 숙연히 여미게 한다. 한참 내려가 올려보니 그 위에 무지개다리가 선계로 드는 승선교처럼 놓였다. 화림교라 부른다.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동의 푸른 꿈을 한 발치 떨어져서 흐믓하게 바라본다. 띠로 엮어 간단명료 초라한 정자에 앉아 화림재 전시서는 형언할 수 없는 눈길로 맞은편 암벽 현애의 깊어진 수심을 바라본다.

누군들 그의 속마음을 알까. 일찌감치 내치고 은거하려 작정한 건 스스로의 결정이다. 어쩌면 나아가 머물며 경륜을 펼칠 때 예고된 바이다. 어쩌면 뜻을 펼친다는 건 처음부터 기만이었다. 너와 내가 어울려 주고받으며 투닥거린 투정의 흔적이다. 그곳을 훌훌 털고 나와 자연에 거하니 하찮았던 몇몇 행위들로 선명하게 부끄럽다. 자연에 거한다는 것은 이름도 명예도 시들하고 젊어 좇던 돈맛도 땡기지 않는 그야말로 명리 추구의 일상이 싫어졌다는 반증이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에 기대는 본성은 누구에게 있다. 이를 싹 틔우고 자연에 대한 미학을 양육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제라도 관을 벗고 고쟁이를 걷어 발을 씻는다. 돌이켜보면 아쉽지만 아득한 시절이라 치부한다. 거연정이라 이름 짓고 오고 가는 명분으로 삼는다.

먼훗날 내가 차지할 텍스트는 그리하여 자연에 거하였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더 뭐가 필요할까. 그냥 쓰윽 보면 지나치고 말 격량의 한낱 물줄기였겠지. 자세히 다가가 어루만지듯 세심한 마음으로 들여다 보니, 온통 기암괴석의 잘생긴 돌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다. 물에 씻겨 단단해진 돌을 가져와 화분대를 만들어 감상하는 수석의 취미는 사랑방 취미이다.

그에 비할까. 사방 여럿이 앉을만한 너럭바위를 골라 워킹하는 수석의 패션쇼를 맨 앞줄에서 초대받아 감상할 줄이야. 생각난 김에 오늘은 시회(詩會)라도 열어야겠다. 나의 풍경과 그대의 풍경이 만나는 지점을 열어보자. 지난번 시회로 드러난 풍광은 이곳 화림 계곡보다는 전거에 빠져 허우덕거린 감이 짙었음을 그대는 아는가. 지난 일을 회고하자니 절로 시경 일어 한달음으로 거연정의 승경을 읊는다. 그 마음이 내 마음이려니 옛사람을 사귀는 상우(尙友)의 만남이라 두둔한다.

 

명승인 거연정 원림을 거닌다

화림재(花林齋)라는 호로 일찌기 화림계곡을 통틀어 선점한 전시서(全時敍)는 출처관이 뚜렷하였다. 물러나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매우 현명하게 추진하였다. 1640년(인조 18년)에 서산서원을 짓고 억새로 만든 정자를 경영하였다.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서원의 재목으로 1872년 후손이 다시 짓고, 1901년 중수하였으니 거연정(居然亭)이다. 거연정은 ‘물과 돌이 조화로운 자연’과 편안하게 더불어 융화한다는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을 가져와 정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거연정은 국내를 통틀어 매우 출현 빈도가 낮은 누정 이름이다. 그만큼 흔하지 않아 독창적이다. 화림 계곡의 현존 누정의 독창성이나 단순함은 군자정(君子亭)과 동호정(東湖亭)에서도 발견한다.

거연정 송림 (2022.11.14..) / 거연정 화림교 (2022.11.14.)
거연정 송림 (2022.11.14..) / 거연정 화림교 (2022.11.14.)

 

누정 이름의 창의적 작명처럼 거연정은 화림 계곡의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과 함께 스스로 독립적인 원림의 영역을 이루면서 경영한다. 거연정을 향하는 발길을 따라 느티나무 숲은 눈높이로 시작하여 찬찬히 옮기다가 올려다보는 앙시(仰視)의 시각으로 이동한다. 더군다나 거연정은 ‘서산서원’의 운영을 위한 부속 공간처럼 작동하였지만, 나중에는 독립된 원림으로 기능한 것이 특징이다. 거연정은 소나무 숲으로 위요되었다. 강 한복판에 송림을 두룬 곳도 쉽지 않은 발견이다. 푸르고 장엄한 솔바람이 강바람과 잘 어울린 풍광이다.

조식(1501~1572)은 66세(1566) 3월에 안의삼동(원학동, 장수동(심진동), 옥산동(화림동))을 여럿이 모여 유람하였다. 이때 쓴 「유안음옥산동」이란 시 3수로 시경을 읊었다. 그 중 2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碧峰高揷水如藍(벽봉고삽수여람) 푸른 봉우리 우뚝 솟았고 물은 쪽빛인데

多取多藏不是貪(다취다장불시탐) 좋은 경치 많이 간직해도 탐욕이 아니네

捫蝨何須談世事(문슬하수담세사) 이 잡으면서 어찌 꼭 세상사 이야기하나

談山談水亦多談(담산담수역다담) 산 이야기 물 이야기만 해도 이야기가 많은데

-조식, 「유안음옥산동」 3수 중 2수

 

화림 계곡을 무릉도원으로 삼아 풍광을 찾았다. 그까짓 세상사 이야기 그만하고 이 멋지고 속 시원한 풍류에 들자. 좋은 경치를 취하는 것은 아무리 간직해도 과하지 않다. 산과 물 이야기만 하여도 하루가 짧지 않은가. 옆집 숟가락, 자식 이야기 같은 이 잡는 소리는 그만하자고 약간 들뜬 시경을 읊는다. 해학적이면서 신명이 짙게 깔린 심경이 드러난다.

 

거연居然에 처하다 / 온형근

거연정으로 향하는 내리막 길은

오래된 느티나무 숲으로 마치 깊은 산이다.

우거진 숲 사이로 계곡을 때리는 물소리

아주 잠깐 첩첩산중이었다가

시퍼런 강물로 반짝이는 햇살 명랑하다.

 

거연으로 한곳에 자리한다는 건

강의 한복판에 낙락장송 되어 성스러워지라는 필담

나아가고 처하는 바가 분명했던 조선의 선비는

그래서 사림이라는 숲이 되어 기암괴석의 숲을 이룬다.

 

거대는 버겁다고 그저 자연에 위탁하겠다는 거연정은

사백 년 세월 드센 물결로도 닳지 않은 커다란

거대의 암반과 거연의 물결로 서로 위무한다.

적대적이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 크고 작은 바위로 솟아 바라보는

제국을 향한 제후들의 근거 없는 희망,

굽신의 예처럼

좁은 홍교를 건너기 전 사림의 숲까지 털고자 했을까

 

철썩철썩 누 아래 암반 한쪽은

제방처럼 높아 급류를 진정하고

다른 한쪽이

분 삭이지 못해 선 넘은

파문 이는 물결을 빠르게 빼내는 축설蓄洩의 지혜

 

가두었다 익혀서 빼는 영혼의 건조함을

가끔은 출렁이고 철렁이는 물결로 완성한다.

(2023.02.27.)

 

시퍼런 물이 휘청거리며 흐를 때 언뜻 어질, 깊은 소를 보면 생기는 아득한 두려움의 모습이 거울처럼 되비친다. 자연에 처하고자는 인물 하나 거닐 폭인 무지개다리는 짧지만 오르내리기에 조심스러워 조용히 걷는다. 험한 물결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에게 거연정은 바닷물처럼 가득찬 발 아래 물결의 성냄으로 불끈한다. 아쉬움일지 회한일지를 머뭇댄다. 어쩌면 못잊을 그리움 일어날 때마다 두근대며 일렁인다. 그것이 멀미가 되어 한참을 꼼짝달싹 못한다. 그렇게 커다란 암반의 섬 위에 놓인 신선의 거처인 거연정을 무지개다리 한 가운데에서 오래 바라본다. 거연정은 누각이다. 바위에 심은 주초이기에 막강한 기초 위에 기둥을 세웠다. 하나같이 암반의 기복에 따랐기에 기둥의 깊이 또한 제각각이다.

 

과거보러 떠나던 선비의 마음을 들쑤신 ‘선비문화탐방로’

경남 함양은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6.2㎞의 ‘선비문화탐방로’를 조성하였다. 과거보러 덕유산 60령을 넘기 전 지나는 길목이 화림동 계곡이다. 화림동은 심진동, 원학동을 포함하여 예부터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불린 빼어난 경관을 갖춘 풍류의 공간이다. 안의삼동은 옛 안의현에 위치한 세 개의 동천이라는 의미이다. 동천(洞天)은 깊은 산골짜기에 둘러싸인 신선이 살만한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주변 지형요소로 위요된 경관이며 무릉도원처럼 신선이 살 듯한 장소를 은유한다. 화림동천은 거연정과 군자정 권역, 동호정 권역, 농월정 권역으로 공간을 나눌 수 있다. 각각의 공간은 독립된 원림으로 경영되었다. 거연정 원림은 현재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咸陽 花林洞 居然亭 一圓)’이라는 명칭으로 명승으로 지정되어 운영한다. 화강암 반석 무리가 골짜기로 흐르는 계곡물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처음 들린 곳이 거연정 원림이다. 거연정은 ‘내를 따라 방문하여 찾아본다’는 방수천(訪隨川)이라 새긴 바위글씨가 영역을 크게 구획하고 있다. 거연정은 군자정에서 수십 보 거슬러 오르면 있다고 송병선(1836~1905)의 「연재선생문집」 「유안음산수기」에 기록되었다. 근처 암반을 원림의 구성 요소로 도입하여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는데, 암석이 일어나고 엎드리며 산을 등지고 정자가 솟아 있는 곳이다. 바위 사이로 정자를 안고 물이 흐르며 깊어진다. 남쪽 기슭의 바위로 물 돌아나가는 곳에 방수천(訪隨川)이라 암각을 하였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 영귀대(詠歸臺)가 새겨졌다.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나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는 논어의 ‘욕기풍우영귀(浴沂風雩詠歸)’의 영귀대이다.

 

거연정 영역의 바위글씨 – 방수천 (국립문화재연구소) / 군자정 맞은편 바위글씨 – 영귀대 (국립문화재연구소)
거연정 영역의 바위글씨 – 방수천 (국립문화재연구소) / 군자정 맞은편 바위글씨 – 영귀대 (국립문화재연구소)

 

옛사람들의 경관을 경영하는 기본은 풍광이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 또는 강학을 중심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토론과 만남을 통하여 학풍을 완성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 정자들은 개인 재산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중에서 관리하는 것이라 국가의 예산 지원이 부족하다. 보다 정교한 지원 계획에 의거 자자손손 이어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 문중에서는 이러한 정자를 만들어 경영한 선조들의 큰뜻을 새기기에 자랑스럽겠지만, 이들만의 소유이고, 이들만이 이곳을 유지관리하는 것은 아니기에 세심한 지원을 기대한다.

화림계곡은 바위가 많다. 너럭바위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계곡에 산재한다. 너럭바위와 바위들이 섬을 이루는 지점의 경관 포인트에 거연정이 자리한다. 거연정에서 사방 계곡의 물흐름과 주변 풍광을 볼 수 있고, 반대로 정자 바깥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기막힌 풍경은 거연정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곳 함양 일대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흔적이 있고, 조선시대의 사림의 일상이 스며 있다. 김종직을 필두로 하여 이곳 사림들의 험난한, 그래서 더욱 선비의 기상을 배양하며 살았던 세월이 정자 문화로 되살아난다.

경관을 경영한 사람들의 시대적 고뇌와 정신을 오늘의 사람들이 음미할 수 있어야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여름 한 철의 더위를 식히는 곳으로 이곳이 각인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 강학하던 조영자의 의지를 떠올려야 한다. 물이 불어나면 정자가 위험할 것처럼 위치하였지만 누처럼 기둥이 정자를 지탱한다. 암반이 솟아난 곳은 주초 없이, 드러누운 바닥은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아래층은 물이 쉽게 빠질 수 있도록 바위가 경사로 이어졌다. 웬만한 물은 바위 중 높은 곳에서 막아내고, 그나마 넘치면 곧바로 경사진 암반을 타고 빠지게끔 구상되었다. 바위 곳곳에 새긴 빨간색 이름은 은일과 낙향에서도 명리(名利)가 앞선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쓰다. 거연정 원림을 거닐며 옛사람의 심회를 되살리고 시경을 읊는 행위는 ‘한국정원문화콘텐츠’의 실천 영역이다. 옛사람의 심회가 고루한 것이 아니다. ‘완고하고 고지식한 올곧은 저 정신’을 풍류와 해학으로 신명 나게 되살린다. 아울러 자연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통하여 평온한 ‘정원문화(庭苑文化)’를 창조한다. 그럴 때 '지금 여기서'의 조경 설계 언어와 조경 계획 기본 철학이 가일층 윤택하고 넉넉해진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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