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둑방을 걸으며 의림지의 시경(詩境)을 읽는다.

나는 둑방 걷기를 좋아한다. 그 푹신한 느낌이 좋아 ‘둑방길’이라 표상하며 즐겨 찾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감촉 밀고 들어오는 그 관능, 그때마다 제방을 쌓은 공력과 발효된 세월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감지한다. 특별한 경험은 오래 남는다고 했다. 걸어서 의림지로 소풍 가고 있는 어린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의림지 둑방을 걷기만 했을까. 뛰고 춤추고 놀던 원체험을 지녔다. 아버지의 젊은 모습이 사진으로 담긴 곳이기도 하다. 제천(堤川)은 냇둑이라는 말이다. 제천의 옛 지명인 내토(奈吐)로 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둑방의 개념이 빠진 적 없다. 이 오롯한 사실이 의림지가 안겨주는 장소성의 진실이다. '제천(堤川)', '의림(義林)' 이 두 단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말의 진원지를 두리번 찾게 한다. 내게는 꽤나 위력있는 말이다. 의림은 둑방에 심은 오래된 소나무 숲이다. 저수지 둑방을 의롭게 지키며 호수로서의 풍경을 완성한다. 그래서 의림지의 풍광을 임호(林湖)라고도 부른다. 의림이라고 써서 연구소 한켠에 두고 자주 쳐다본다. 그렇다. 나는 제천 사람이다. 제천과 의림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 깊은 무의식의 심연 어딘가가 울렁거리고 심박수 빨라진다. 

 

연구소에 비치된 의림-月白 作 (2020.03.02.) / 의림지 우륵정, 우륵대, 연자암, 순주섬(2023.02.20)
연구소에 비치된 의림-月白 作 (2020.03.02.) / 의림지 우륵정, 우륵대, 연자암, 순주섬(2023.02.20)

 

살면서 내 동네, 내 고향을 일찍 떠나와 성장하다 보니 되돌아볼 틈 없이 분주하다. 아름차고 고탑지근할 때마다 하던 일을 접고 다녀오고픈 격랑이 인다. 엊그제 디스크 협착으로 입원하였는데, 제천과 의림지가 떠올라 고질병처럼 갈급한 갈망이 돋아났다. 입원의 긴긴밤을 새우다시피 의림지의 누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읽었다. 의림지의 누정을 만나러 아니갈 수 없게끔 들뜬다. 지금 시도하고 있는 취재 현장 답사를 통한 ‘한국정원문화콘텐츠’의  재발견을 ‘의림지 누정 원림’으로 택정한다.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의 취재 답사 대상지로서의 제천이 발바닥의 용천혈을 타고 온몸을 휘돈다. 꼭 만나러 가자는 약속을 손바닥 노궁혈을 세게 누르면서 긋는다. 그래서 제천이고 의림지이다. 만사를 제치고 나선다. 그 속에 들어가 소통하며 추체험으로 몸소 확인하고 관계맺기에 스며들 참이다.

17~18세기 제천에 연고를 둔 남인계 일군의 멋진 인물 네 명과 만난다. 창랑 김봉지, 송파 이서우, 연초재 오상렴, 학고 김이만이 그들이다. 창랑 김봉지(1649~1713)는 ‘제천16경’을 의림지의 시경으로 처음 제시한다. 이어 송파 이서우(1633~1709)는 이를 계승하여 오언절구 연작시로 시경을 전파한다. 물론 약간의 변형은 필연이다. 송파 이서우의 제자인 연초재 오상렴(1680~1707)은 ‘창랑옹모산별업16경소지’에서 시경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학고 김이만(1683~1758)은 <임호부>와 <산사> ‘의림지’조에서 의림지 시경의 틀을 변모시키고 격조를 북돋운다.

 

용추폭포에서 머물다

김봉지와 이서우, 오상렴과 김이만이 의림지를 걷는다. 의림지에서 체화하여 건져 낸 시와 풍경의 고급스러운 운치에 이끌린다. 제천에서 태어난 김봉지의 ‘제천16경’은 일실되었으나 이서우의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을 통해 재현된 대상 경물을 순서대로 호명한다. 조선시대 원림의 특성을 잇는 경관 해석에 등장하는 ‘16경’은 전국 경승지 곳곳에서 출현하고 경영되었다.

 

“진섭헌(振屧軒), 의림지(義林池), 우륵당(于勒堂), 연자암(燕子巖), 대송정(大松亭), 호월정(湖月亭), 대제(大堤), 선지(銑池), 폭포(瀑布), 용담(龍潭), 홍류동 (紅流洞), 자연대(紫煙臺), 유만(柳灣), 순주(蓴洲), 내교(內郊), 외교(外郊).”

-이서우, 「송파집」 권10, 「시」,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 한국고전종합DB

 

이와 같이 ‘16경’은 김봉지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원림 경영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 ‘진섭헌 별서’이다. 김봉지는 ‘의림지 제방을 쌓느라 나막신에 묻은 진흙을 털어 놓아 만들어진 봉우리’인 ‘신떨이봉-한자로는 진섭산(振屧山)’에 ‘진섭헌(振屧軒)’을 건립하여 거점공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후선각(侯仙閣)을 지었다. 진섭헌은 김이만의「학고집」에서 “선지(鐥池)의 서쪽 산기슭의 비탈진 고개 위에 진섭헌이 있으니, 바로 김씨의 별서”라고 하였다. 선지는 의림지의 찬물을 잠시 가두었다 내보낸다. 못물의 온도를 조절하여 무논에 관개하는 현명한 조치이다. 김이만의「학고집」에 선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승국(勝國)의 말엽에 이르러 다시금 진흙이 물을 가득 메웠다. 조선의 정(鄭) 하동(河東) 인지(麟趾)가 호서·영남·관동 지역의 3로(路)를 몸소 살피면서, 그 장정들을 조율하여 의림지를 준설하여 치수하도록 하였다. 의림지 남쪽에 큰 제방을 축조케 하였으나, 수문을 설치하지는 않았고, 여러 돌들을 포개 쌓아서 물이 흘러나오게끔 하였다. 그 아래에 작은 연못이 물길을 받게 하여, 저수와 배수를 적절하게 조절하였으니, 이름하여 이르기를, ‘선지(鐥池)’라 하였다.

-김이만, 「학고집」 권9, 「잡저」, <산사-의림지>, 한국고전종합DB

 

승국은 고려를 말한다. 의림지는 고려말 매몰에 가깝도록 진흙으로 가득찼다. 그러니 나막신에 묻은 진흙을 떨어낸 게 산을 이룰만하다. 둑을 막은 큰 제방(대제, 大堤)의 아래에 선지가 있고, 그 서쪽 진섭산 기슭 비탈진 고개에 진섭헌 별서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조선초 정인지가 못물을 완전히 빼서 준설과 치수공사(준치, 浚治)를 할 때 의림지의 물을 받아 저수와 배수(축설, 蓄洩)를 조절하는 이중 수리 체계를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선각/임소정 터(2023.02.20.) / 용추폭포와 후선각터의 소나무(2023.02.20.)
후선각/임소정 터(2023.02.20.) / 용추폭포와 후선각터의 소나무(2023.02.20.)

 

의림지 둑방을 걷는다. 걷는 동안 몸은 저절로 움직였는지 경치에 이끌렸는지 분별없다. 다만 마시고 내쉬는 숨결을 느끼며 고요하게 걷고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시경으로 원림을 경영하던 그들의 세월은 거짓말처럼 흘렀다. 나는 지금 의림지 용추폭포에 멈췄다. 사실 의림지 누정 원림에서 가장 우월한 풍광을 안겨주는 곳이기에 발길이 멈출 수밖에 없다. 절벽으로 곧추 떨어지는 물줄기는 돋아난 단차의 암벽에 떨어질 때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새로 지어진 홍류정은 2층 루(樓)처럼 되어 올라가지 않으면 저수지 수리시설처럼 보인다. 

막상 새로 건립한 홍류정에 올라가면 제2의림지인 비룡담 쪽으로 시선이 트였다. 용두산은 둘러싸인 백 개의 골로 산 전체가 울록불록 잘 다스린 근육이다. 왜 신월동 사람들이 백골산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비룡담 동쪽 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골짜기를 바투잡아 오르면 직선거리로 구석기 시대 유적인 점말동굴이 자리한다. 이곳을 용굴이라 부른다. 신라의 화랑이 명산대첩을 찾아 호연지기를 기를 때 의림지에서 점말동굴로 이어졌다. 그들의 이름이 동굴 암벽에 각자로 새겨져 있다. 점말동굴은 화랑이 유오(遊娛)하기에 더없이 좋은 경관이다.

다시 용추폭포로 돌아온다. 하얀 포말이 저녁녘 노을을 만나 붉은 포말이 된다. 그래서 홍류폭이다. 지금 누로 지어진 홍류정은 용담 아래에서 홍류동을 바라보는 지점에 있었다. 용추폭포의 장관에 깊이 빠져가며 홍류정 누계단을 내려본다. 용추폭포 유리바닥은 오래되어 탁하다. 탁한 시선을 외면하고 발돋음하여 보호책 위로 아래를 내려본다. 선명한 물결 튀는 현애의 절벽으로 물안개 깊게 피어오른다. 저 아래 홍류정지에서 올려보는 앙경의 용추폭포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김이만은 ‘무릉교’라 불렀다. 김이만은 홍류정(紅流亭)을 더러 ‘홍류각, 호정(湖亭), 위정(危亭)’ 등과 같은 시어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저 아득하고 깊게 파인 양안의 산줄기는 하나같이 우쭐하게 올라있어 점점 멀어지는 풍경을 읊을 수 있는 자연의 대를 가진다. 지금의 활터 자리가 그러한 위치 속성을 가졌다. 여기 건물 하나는 이미 이곳의 승경을 알고 지은 근대기 이전부터 자리하여 오늘까지 경제 행위를 이어왔을테다. 용추폭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직선으로 내려보는 게 아닌 사선으로 비스듬히 보는 각도가 필요하다. 무릉교 오른쪽 활터 자리가 그중 하나이고 경호루 못 미처 축대 자리가 또 하나이다. 이 자리가 김봉지의 후선각(侯仙閣) 터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우람하고 장하여 그 활력과 생김새를 따라잡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이다. 후선각 정자의 현판은 의림지 방향으로 임소정(臨沼亭), 용추폭포 방향으로 후선각으로 걸었다고 한다. 여기서 부감으로 내려다보면 과연 용추폭포의 전모가 한꺼번에 밝혀진다. 

쉼없이 포말 일렁이며 떨어진다. 크고 작은 포말은 끊임없이 부딪히며 부서지고 사라진다. 그 위를 또 다시 왁자하게 쏟아내며 떨어진다. 일렁이고 흩어진다. 무너지고 쪼개진다. 없어지는 게 아니다. 새로운 운동에너지에 의해 새로운 물줄기가 뭉친다. 사라진 물줄기인가 새 것의 물줄기인가를 똑똑히 부릅뜨고 쳐다봐야 한다. 야바위에게 눈 부라리며 대들었다가 털린 눈초리와는 격을 달리하는 바라봄이다. 시간이 어찌 지나는지 알 수 없다. 폭포의 소리가 귀에 더 크게 들린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도록 포말에 잠겨 든다. 그 안에 내가 어깨 춤을 춘다. 포말이 만든 무대로 세상이 버거운 많은 이들이 함께 어울린다. 저절로 일어나는 통쾌한 흥취에 이끌린다.

 

겨울 의림지와 누정 

내 첫 번째 시집인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에 실린 「아버지」라는 시에 의림지 누정이 나온다. 2002년 발간되었으니 20년 전에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창작은 그보다 오래전이었겠다. 1_산책, 2_노을, 3_친구, 4_입하의 4편의 연시이다. 그중 1편의 산책에서 영호정을 지나 경호루를 거치면서 용추폭포를 지나고 유만(柳灣, 버들물굽이)의 의림지 둑방을 걷는 풍광이 그려진다. 

 

아버지 / 온형근

 

1. 산책

 

...

어느 귀퉁이에 혼자 놀다

퇴근 길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따뜻한 허리를 껴안고

내가 한없이 행복해 할 때쯤

당신은 나를 안아 내린 채

소나무 숲 의림지 둑방을 걸었지요

영호정에 오르고 경호루에 걸터앉기도 했어요

 

너른 품속에 안겼던

볼은 따갑고 숨이 막혀

아무리 밀어내도 미동도 없었지요

당신은 허허대며 웃었지만

정말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은

가슴속에 나는

작은 새가 되어

소나무 숲 의림지 하늘로 날고 싶었지요

너무 잊고 살아

꿈길에 당신과 걸었습니다.

 

...

(「아버지」'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68~72, 2002.10.28.)

 

지금은 의림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산책로를 개설하였지만 그때는 주로 의림지 남쪽 둑방에서 서쪽 둑방만 걸을 수 있었다. 오래된 노송이 즐비하여 감탄의 탄식이 절로 나는 풍경은 주로 이곳에서 완성한다. 임호(林湖)의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인데 함께 걷던 아버지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걷는 게 기쁨이니 몸은 껍질이 아니고 영혼으로 가득찬다. 디딘 양발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혼이 어슬렁거렸고 나는 어느새 그 따스했던 겨울 의림지를 자꾸 떠올린다. 차안(此岸)에서 떠오르고 잦아들고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스며듦의 배역이겠지만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서우의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의 기록을 통하여 비정한 의림지 십육경① 진섭헌 ② 의림지 ③ 우륵당 ④ 연자암 ⑤ 대송정 ⑥ 호월정 ⑦ 대제 ⑧ 선지 ⑨ 폭포 ⑩ 용담 ⑪ 홍류동 ⑫ 자연대 ⑬ 유만 ⑭ 순주 * (위 지도에 빠진 경관) ⑮ 내교(안뜰) ⑯ 외교(청전뜰) Ⓒ구글어스
이서우의 '김밀양봉지제천십육경'의 기록을 통하여 비정한 의림지 십육경① 진섭헌 ② 의림지 ③ 우륵당 ④ 연자암 ⑤ 대송정 ⑥ 호월정 ⑦ 대제 ⑧ 선지 ⑨ 폭포 ⑩ 용담 ⑪ 홍류동 ⑫ 자연대 ⑬ 유만 ⑭ 순주 * (위 지도에 빠진 경관) ⑮ 내교(안뜰) ⑯ 외교(청전뜰) Ⓒ구글어스

 

현재 의림지 누정 원림에는 영호정(映湖亭), 경호루(鏡湖樓), 홍류정, 우륵정(于勒亭)이 있다. 입증 가능한 누정 경영의 기록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복원하지 않았다는 게 특징이다. 의림지 누정 원림의 점진적인 제 모습 찾기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제언한다. 우선, 진섭헌 별서를 중심 거점 공간으로 복원한다. 이를 중심으로 호월정, 홍류정을 영건한다. 용추폭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후선각과 폭포소리를 듣는 청폭정을 제 위치에 짓고 연지암이 마주보이는 곳에 대송정을 복원한다. 우륵당도 도로공사 이후의 산자락에 위치시키고 특히 야외무대로 사용하고 있는 유만을 물굽이처럼 처리하여 왕벚나무 대신 버드나무로 교체한다. 

이러한 하드웨어적 복원은 시간과 예산을 요구한다. 그러니 최소한 의림지 누정 원림이 자리했던 터에 문화유산 해설판이라도 정성스럽게 설치하여 장소성을 고양한다. 이왕이면 오래된 사진이나 그림을 포함하여 품격있는 안내 표지여야 한다. 복원은 그 다음 천천히 격조있게 추진하면 될 일이다. 문화유산이 있었던 ‘유지(遺址)’를 정성 다하여 조사하여 표지판을 설치한다. 이를 찾아다니며 걸을 수 있는 동선을 완비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할 때 의림지 누정 원림의 복원은 ‘지성감천’의 현실적 동력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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