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탁사정 기억이 누정 원림의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제천 후배 영태에게 물었다. 탁사정(濯斯亭)을 가고 싶은데 근래 가 본 적이 있냐고 했더니, "탁사정은 유지 보수가 안돼 관리 상태가 안 좋을 것"이란다. "그래도 정자까지 올라가 보겠다."라고 말한 내게 "그러면 탁사정 주차장에서 만나자"라고 합을 맞춘다. 만나기로 정한 시간에 맞춰 출발 시각을 조정한다. 옛 생각이 절로 난다. 흰 모래톱이 길게 늘어서 해안가를 연상시키는 인상적인 과거의 풍경이 새삼 떠오른다. 친구들이 하도 멋진 곳이라고 가 보자 하여 따라나섰다. 한 떼의 청소년들이 버스에서 내린다. 탁사정 선경(仙境) 입구는 좁고 위로 경사졌으나 고갯마루 올라서면 활짝 별천지로 새로운 세상의 풍광이 펼쳐진다. 높지는 않지만 뚜렷하게 여기저기 출몰하는 단애취벽(丹厓翠壁)¹과 근사한 정자, 그 밑을 천연덕스럽게 흐르는 잔잔한 물살과 시원한 물소리에 크게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쉰다. 물살은 천천히 흐르다 굽이치며 빨라진다. 몇 번의 휘몰아침이 쓸고 온 하얀 모래와 자갈은 갓 삶은 옥수수와 감자처럼 탱탱하고 보드랍다. 학이 와서 고고한 걸음새로 천천히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정적이 스민다. 근처 구학(九鶴) 마을이 있으니 괜한 상상은 아니다. 구학산 아래 구학리에 천주교 배론성지가 입지한다.

 

1)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춘하추동의 순으로 시를 전개하였다. 봄은 만물이 생성하는 우주의 흥취로 가득한 계절로 신명의 심미의식이 다른 계절보다 많이 출현한다. 겨울의 신명도 독특하게 읊었는데, 가령 7수에 등장하는 배 세우기붉은 낭떠러지와 푸른 절벽인 단애취벽(丹厓翠壁)’의 감상이 신명 나게 그려졌다. 겨울 풍광을 시각적으로 수용하는 데 단애취벽의 경관 체험을 앞세웠다. 단애취벽은 계절에 관련 없이 시각적 우세 경관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탁사정(A)을 중심으로 지름 3km 원을 그리면 천주교 베론 성지(B)와 만난다. 그리고 동쪽으로 용두산 아래 의림지(C)가 위치한다.   ⓒ구글어스
탁사정(A)을 중심으로 지름 3km 원을 그리면 천주교 베론 성지(B)와 만난다. 그리고 동쪽으로 용두산 아래 의림지(C)가 위치한다. ⓒ구글어스

 

 

‘탁사정 팔각정 휴게소’(2) 앞 주차장에 주차한 후 구학교(1)를 지나 사유지인 임야인 B 지점의 계단을 따라 탁사정에 접근할 수 있다. 휴게소 맞은편 철문을 열고 오르면 역시 사유지인 C 지점의 언덕고개를 넘어 탁사정 계곡(3)이 펼쳐진다. 탁사정을 중심으로 지름 100m의 원을 그으면 용암천과 절벽의 송림이 모두 안긴다.A : 지목은 하천이며 구유지,  B : 지목은 임야(토지임야)이며 2,157평으로 관외(세종) 소유임,  C : .지목은 임야(자연림)이며 2855평의 관외(서울) 외 6명의 소유이다.    ⓒ구글어스
‘탁사정 팔각정 휴게소’(2) 앞 주차장에 주차한 후 구학교(1)를 지나 사유지인 임야인 B 지점의 계단을 따라 탁사정에 접근할 수 있다. 휴게소 맞은편 철문을 열고 오르면 역시 사유지인 C 지점의 언덕고개를 넘어 탁사정 계곡(3)이 펼쳐진다. 탁사정을 중심으로 지름 100m의 원을 그으면 용암천과 절벽의 송림이 모두 안긴다.A : 지목은 하천이며 구유지, B : 지목은 임야(토지임야)이며 2,157평으로 관외(세종) 소유임, C : .지목은 임야(자연림)이며 2855평의 관외(서울) 외 6명의 소유이다. ⓒ구글어스

 

 

그렇게 원주 치악의 산세를 돌아 탁사정 삼거리에서 ‘구학교(그림, 1 지점)’ 교량 입구에 길게 설치한 주차장으로 나섰다. 후배와 내가 탁사정이라고 여긴 곳의 위치는 막연하였다(그림, C 지점). 왜 그 위치에 탁사정 정자가 있었다고 생각하였을까. 사실 탁사정은 강 건너편에 위치한다(그림, B 지점). 내가 생각한 탁사정은 언덕 고갯마루에서 바로 내려 보이는 ‘탁사정 계곡(그림, 3 지점)’이라 불리는 방향의 가파른 산꼭대기 어느 지점이다. 탁사정은 ‘구학교’ 다리에서 왼편으로 올려 보인다.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기암괴석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탁사정 팔각정 휴게소(그림, 2 지점)’에서 다행히 인물됨을 간파하고 잠가두었던 ‘탁사정 계곡 원림(그림, C 지점)’으로 가는 철제 출입문을 열어준다. 백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탁사정 계곡 원림’은 봉황산의 산줄기가 용암천으로 뻗어 내려온 형국이다.

 

탁사정 누마루에서 마주 보이는 ‘탁사정 계곡 원림’의 탄생

탁사(濯斯)는 ‘물에 적셔 이것을 막대기로 두드려서 더러워진 곳을 빠는 것’을 말한다. ‘청사탁영 탁사탁족(淸斯濯瓔 濁斯濯足)’인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는 초사의 「어부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전국에 ‘탁영탁족’ 관련 경물 명은 다양하게 조합되어 변용된 구성으로 분포한다. 지금의 탁사정은 1925년 일제강점기에 창농(滄儂) 임윤근에 의해 건축되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그 유래는 400여 년이 넘었다. 1568년(선조1)에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1523~1586)이 고향인 제천으로 돌아올 때 해송 묘목 8주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하였고(현재의 팔송리 유래), 그의 아들이 현재의 위치에 정자를 짓고, 팔송정(八松亭)이라 하였다. 구한말 제천 팔경을 지은 정운호(1892~1930)는 이곳을 ‘자루 바위’인 대암(帒巖)이라고 하여 탁사정 아래 용암천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의 풍광을 노래하였다.

 

堤川八景(제천팔경)

 

林湖釣叟(임호조수) : 의림지에서 낚시하는 늙은 강태공

蓮寺歸僧(연사귀승) : 감악산 백련사로 돌아가는 노승

帒巖遊魚(대암유어) : 대암(자루 바위) 아래 한가로운 물고기

灡亭鳴灘(란정명탄) : 관란정(송학면 장곡리)에서 듣는 서강 여울물 소리

碧樓秋月(벽루추월) : 한벽루(청풍면 읍리)에 비추는 가을 달빛

綾江春帆(능강춘범) : 능강리(수산면) 봄 나루터의 돛단배

玉荀奇巖(옥순기암) : 옥순봉(수산면)의 기이한 바위 절경

月岳晩楓(월악만풍) : 월악산의 늦가을 단풍

(‘제천팔경’, 정운호)

 

구한말 제천 팔경에 나오는 지명은 의림지, 감악산 백련사, 대암(탁사정 받치고 석벽 삼봉 기암괴석), 관란정, 한벽루, 능강리, 옥순봉, 월악산 등이다. 그 후 이곳은 다시 제천 십경 정비 사업으로 보수되었다. 제천 십경의 순서는 의림지, 박달재, 월악산, 청풍문화재단지, 금수산, 용하구곡, 송계계곡, 옥순봉, 탁사정, 제천 배론성지로 탁사정은 제9경에 포함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래된 기억과 함께 탁사정 풍광을 시경으로 읊었다.

 

탁사정 풍광에 기대다 / 온형근

​옆얼굴로 해맑게 풀어 낸 미소 번진다.

 

그때 팔송 가는 막차를 놓치면 왕암으로 갈아탔던가 그 친구,

구학 사는 친구는 여름 폭우로 불어난 내를 못 건너 당당하게 결석했고

 

​꽃다운 나이 탁사정 모래톱 쳐다보았을 때

대저 살아갈 일 막막하니 절경이 절망에 가렸었다.

그때는 뭘 거기까지 올라가냐고 손사래 쳤었는데

삼백 리 길 허겁지겁 달려 탁사정 우물마루에 앉는다.

 

​오르다 보니 참꽃 부끄러움으로 흐드러져 피어

여덟 그루 제주 곰솔 심은 팔송정 자리라는데

낙락장송 굽은 소나무만 용암천의 물보라에 익어

어느 날은 아홉 마리의 학을 부르고

날을 잡지 못한 아득한 순삭에 봉황 깃드네

 

멀리 감악산이 봉황산을 부려 탁사정 바위를 지켜

용암천 용소의 깊은 세월로 갓끈을 씻고

내친김에 먼 길 달려온 발도 씻는다.

(2023. 04. 20.)

 

꽃다운 나이에 들린 탁사정의 절경은 흥겨움보다는 깊은 한숨을 자아내는 내적 성찰의 장소였다. 두루 탁 트인 부감으로 내려보는 경관은 여전히 근사하다. 내가 지칭하는 ‘탁사정 계곡 원림’은 탁사정에 앉아 마주 보이는 건너편 송림 우거진 개인 소유의 임야이다. 고갯마루 넘어 다가오는 계곡의 풍광이 뛰어나다. 제법 물살이 궤적을 그으며 굵은 물줄기로 뭉쳤다 풀어졌다 하면서 하얀 포말이 인다. 강물로 튀어나온 암반의 아찔함도 압도의 규모가 아닌, 인간적 척도의 은근한 웅장함을 안긴다. 조금 더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로 나선다. 강바닥으로 거친 소나무 껍질의 질감으로 넓게 펼친 너럭바위가 일군의 경관을 지배한다. 물을 품어 보듬다가 서서히 풀어내는 일시적 경관을 연출한다. 송림 우거진 숲을 헤쳐 두루 살핀다. 치악산으로 향하여 굽어지고 암반을 부딪치며 바다의 소리를 낸다. 이 모든 경관을 숲을 오가면서 살피는데, 곳곳에 암반으로 이뤄진 대가 산줄기 끝에 매달렸다. 거문고나 가야금을 타거나 대금을 불 수 있는 기막힌 장소성을 지녔다. 그 지점 두 곳을 명상 터로 표시한다. 탁사정 원림을 두루 경험하려면 산줄기 끝의 호안으로 나선다. 호안으로 뻗은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이루어진 암벽의 대는 거듭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장소성을 지녔다.

용암천으로 키 큰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모래톱으로 곧장 누웠다. 그냥 놔둔 상태이다. 울창한 숲으로 간간이 햇살은 쾌속이다. 울울창창한 숲속에 양옥 건물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빈집이다. 물가로 내려가는 도중에 작은 정자 놓을 정도의 터가 사각형으로 풀이 나지 않도록 장판으로 덮였다. 더 내려간다. 숲의 끝자락이다. 작은 줄기가 끝나는 지점은 벼락이다. 암벽이 단단하게 내려오던 산줄기의 기세를 품는다. 그러니 물살의 속살거림에도 산자락이 더는 파여 나가지 않는다. 암반 위가 펑펑하다. 가부좌 틀고 앉아 소주천(小周天)을 돌린다. 명상 터이자 작은 규모의 일인용 암벽 대이다. 앙시로 올려보면 탁사정이 세워진 단애취벽이 주변 숲에 일부 가린 채 단정하다. 탁사정에 앉아 맞은 편 ‘탁사정 계곡 원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분하고 안정적이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이나 김득신의 ‘파적도’처럼 ‘저공경사부감’으로 굽어본다. 짙은 물 색깔로 깊이감을 더하는 곳이 용소이다. 용소 앞의 모래톱이 마른 채 큰 비에 씻기길 기다리는 모습을 만난다.

 

‘저공경사부감’의 시점으로 그려진 (좌)  신윤복의 ‘단오풍정’과 (중)  김득신의 ‘파적도, (우) 탁사정 맞은편 원림
‘저공경사부감’의 시점으로 그려진 (좌) 신윤복의 ‘단오풍정’과 (중) 김득신의 ‘파적도, (우) 탁사정 맞은편 원림

 

 

송림 우거진 탁사정 원림의 그윽한 즐거움, 대를 오른다

단전에 기운을 몇 차례 달라붙게 하고 일어선다. 또 다른 작은 줄기 끝 암벽으로 향한다. 물살 소리가 거문고 연주하듯 현이 되어 운다. 서서 지긋이 눈을 아래로 깔고 손끝과 발끝으로 정적의 속살을 더듬는다. 내면에서 꿈틀대는 탁사정 원림의 자리를 기억한다. 협착의 통증에 시달리듯 집중적으로 쐬인 햇빛에 나뭇잎이 저도 모르게 떤다. 정적이 내는 소리이다. 청각으로 흔들리는 떨림의 모습이 시각 중추에 의경(意境)으로 맺힌다.

송림 울울하여 뽐내는 아름다운 운치는 호안으로 무심하게 툭툭 던져지듯 다부지게 심어진 암벽의 심지이다. 그 깊은 바위의 마음이 무게감과 단아한 중력감으로 다가선다. 사유지인 이곳 원림의 공간감이 한층 돋보인다. 봉황산(鳳凰山)에서 호안까지 달려와 용소를 마주하며 탁사정을 앙경으로 올려본다.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위하여 경관 짜임의 꼭짓점에 정자가 입지하였다. 그 안에 사람이 포함된다. 조경은 폭넓은 삼차원 공간이다. 펼쳐져 있으나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마음 크기를 지녔다. 방금 지나면서 보았던 경관은 앞뒤로 갈리면서 시차를 지닌다. 순간적이지만 풍광이 다르다고 느끼는 감흥은 더욱 천차만별이다. 어두운 숲이었다가 호안에서 환해지는 풍광은 팔뚝에 감지하던 습한 공기를 한꺼번에 거둬간다. 반듯이 앉아 바라보면 민물가마우지가 건너편 호안 깊은 물인 ‘용소’에서 연신 잠수를 거듭한다. 물고기 천국인 듯 그의 몸놀림은 잽싸고 활기차다.

민물가마우지는 어민들이 사냥을 허락해달라고 호소한 그 새이다. 급격하게 개체 수가 늘어나는 민물가마우지가 탁사정 용암천에서도 바쁘게 잠수를 반복한다. 민물가마우지는 내가 매일 소요하는 ‘조원동 원림’의 호수에서도 날개를 펴 말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먹성이 좋아 어족 자원이 줄고, 서식지 주변의 나무가 배설물로 하얗게 고사하고 있다. 천적이 없어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할 시급한 기후변화의 산물이다. 탁사정 계곡은 유원지이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러면서도 탁사정에 올라 전체의 원림 경관을 살펴본 경험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 맑은 계곡에서 ‘탁영탁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 오래된 석벽 삼봉이 하늘가를 떠받치는 탁사정의 의젓한 존립 자체가 옛사람의 풍류를 기억이라는 맥락으로 이어준다. 익숙한 장소는 긍정적인 감정 반응으로 보상을 준다. 살아가는 회복 탄력성은 자연을 감각적이고 감성적으로 포착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내가 자연에 있고, 자연 속에 내가 있는 상호 관계성을 다양한 시점에서 접근한다. 가깝게, 약간 멀게, 아주 멀게 등 중첩하면서 수없이 되돌아본다. 오감과 육감으로 시점의 높낮이와 층위를 조절하는 즐거움에 다가선다.

[한국조경신문]

(좌) 석벽 삼봉 위 탁사정  /  (중) 탁사정 근경  /  (우) 탁사정 주변 송림
(좌) 석벽 삼봉 위 탁사정 / (중) 탁사정 근경 / (우) 탁사정 주변 송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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