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문화 유산 보존 복원을 시민 운동으로 성취한 아름다운 수원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공정과 상식이 맑은 계곡수처럼 펼쳐 흐르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다. 공정과 상식이 세상살이 곳곳에서 더불어 베풀어지는 것을 일컫는다. 처음 수원 화성의 빼어난 경관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의 만남을 떠올린다. 경관을 통해 마음에 명경수 하나를 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누구나 쉽게 시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세월과 함께 공정과 상식을 지속적으로 반영하였다. 처음 이곳의 경관에 빠져 다닐 때에는 정자 마루에 신발 신은 채로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여름철 노숙자가 밤이슬을 피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때도 나 같은 몇 부류는 신발을 벗고 둘러앉았다. 막걸리를 펼쳐 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이제는 먼 옛이야기이다.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신발을 벗고 오르세요" 라는 푯말로 마루 바닥은 반질반질 기름 먹인 옛 초등학교 복도처럼 빛난다. CCTV 설치 후 음식과 음료는 감시 방송으로 제지한다. 공공의 문화유산에 관한 공정한 관리이다. 사회 발전에 따른 성숙한 시민의식이 바탕이 된 상식이 발현되는 현장이다. 사회적 진보는 합의에 의한 공정과 상식을 역행하지 않는다. 이 사회를 끌고 나가는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의 가치 판단은 합의를 통한 공정과 상식에 근거한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일대의 명승고적(名勝古跡) 또한 그러한 공정과 상식에 힘입어 보존과 복원이 이루어진 역사를 읽는다.

 

(좌) 「몰락의 방화수류정」, 조선일보, 1927.7.20. 기사(우) 「조선 대표적 건물인 방화수류정(화홍문) 중건」, 동아일보, 1932.5.9. 기사
(좌) 「몰락의 방화수류정」, 조선일보, 1927.7.20. 기사(우) 「조선 대표적 건물인 방화수류정(화홍문) 중건」, 동아일보, 1932.5.9. 기사

 

 

수원은 다른 곳에 못하지 안케 名勝古跡(명승고적)이 만헛스나(…), 수원이여 왜 그러케까지 沒落(몰락)하게 내어버려 두는가, 내 조상의 피와 땀으로 남기어 논 수원의 자랑이요 우리의 자랑이 아니냐? 내가 봄에 봄마지하러, 여름에 더위 이즈러, 가을에 들구경하러, 겨울에 눈 구경하러, 心火(심화)날 때 火(화)프리하러 가는 그곳을 엇지 이다지도 몰락하게 방치하는가, 그것이 잇슴으로 수원이 얼마만한 위안을 바덧스며 얼마나 수원에 대한 애착이 깁헛든가, 수원이여! 우리의 자랑! 우리의 보금자리! 방화수류정의 몰락을 막자! 우리의 성의와 노력만 잇스면 그를 다시 뒤집을 수 잇나니 成服(성복) 후 藥方文格(약방문격)이 되지 말기를 깁히 바란다.

-「몰락의 방화수류정」, 『조선일보』, 1927.7.20.

 

사람이 죽은 다음, 성복제를 지내는데 뒤늦게 이러니저러니 약방문을 들이대는 건 틀어진 대책이라는 말이다. 당시 화홍문 누각이 홍수에 사라지고 방화수류정이 퇴락하는 안타까움에 수원의 모든 시민이 나설 수 있기를 촉구한다. 방화수류정은 그 불공정하고 비상식이었던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풀어주는 명소이다. 봄맞이, 더위 잊기, 가을 들판 구경, 겨울 눈 구경 뿐만 아니라 심화(心火, 마음속에서 북받쳐 나는 화)가 날 때 위안을 받는 곳이다. 그러면서 수원 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고향이라는 동일시의 대상으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실제로 1922년 대홍수로 사라진 화홍문 누각의 폐허를 수원읍의원 ‘차재윤(車載潤)’씨와 뜻있는 수원 유지들이 ‘수원명소보존회’를 결성하였다. 시민 모금 3,000원으로 복원에 불을 당겨 승인을 받아 1931년 가을부터 건축에 착수하여 1933년 5월에 화홍문 누각이 복원되었다(「조선의 대표적 건물인 방화수류정(화홍문) 중건」, 『동아일보』, 1933.5.9.). ‘수원명소보존회’는 ‘내셔널 트러스트’ 등 문화 유산 보존의 세계적 초창기에 수원 시민의 모금으로 착수하여 복원을 이끌어낸 매우 드물고 귀한 국제적 성과를 지닌 시민 조직이었다.

 

화성성역의궤가 일궈 낸 세계문화유산의 ‘왕의 정원’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¹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증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의궤에서 방화수류정의 뛰어난 풍광을 따로 언급하는 부분이 놀랍다. 이런 찬사는 어떤 의궤에서도 쉽지 않은 표현이다. 다분히 들뜬 풍경의 발견이다. 『화성성역의궤』의 ‘동북각루’는 다음과 같은 도설로 기록되었다.

 

벽성의 서북 19보 용연(龍淵)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뻗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 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長安門)을 잡아 당겨 화홍문(華虹門)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일면을 제압하고 있다. 마침내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이라 하였다. (…)

-『화성성역의궤』, 권수, 도설

1) 책 이름. 1010. 조선 정조(正祖) 18(1794) 1월부터 동왕 208월까지 경기도 수원(水原)의 화성(華城)을 축조한 경위와 그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 정조 209월부터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완성하고, 순조(純祖) 원년(1801)에 간행하였다(단국대 한국한자어사전).

방화수류정의 입지를 간결하게 설명한다. 장안문을 잡아당겨 화홍문과 잇고 앞뒤로 마주하여 절벽 위에 누를 세우니 방화수류정이라 이름을 단다. 누(樓)를 세웠으나 이름은 정(亭)으로 하였다. 동북각루는 유사시 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부로 운영한다. 평상시에는 성곽 아래의 용연 등 경관이 좋은 위치라 경치를 조망하는 정자의 역할을 겸한 것이다.

 

(좌) 동북각루 외도1 : 용두에 해당하는 암벽이 가깝게 나타남, (우) 동북각루 외도2 :용연과 중도가 보임
(좌) 동북각루 외도1 : 용두에 해당하는 암벽이 가깝게 나타남, (우) 동북각루 외도2 :용연과 중도가 보임

 

 

세계문화유산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곳이 방화수류정 원림이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을묘년 원행’에 방화수류정에 올라 화성 성역의 중간 평가를 하면서 화성유수 조심태의 노고를 치하한다. 다시 1797년(정조 21) 정월 현륭원 방문 후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칠언시를 지은 뒤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춘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한창이라 歷遍春城日未斜(역편춘성일미사)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다운데 小亭雲物轉晴佳(소정운물전청가)

난기가 계속 삼련의 적중함을 보고하니 鑾旂慣報參連妙(난기관보삼련묘)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萬柳陰中簇似花(만류음중착사화)

-『홍재전서』, 제7권 / 시3,

 

봄의 방화수류정은 맑고 아름답다. 화살 하나를 먼저 쏘고 그 후 화살 셋을 연달아 쏘는 것이 삼련(參連)이다. 적중되었다고 임금의 깃발인 ‘난기(鑾旂)’로 보고하고 있으니 기분도 최상이다. 화살촉이 마치 버드나무 그늘 아래 핀 꽃처럼 환할 정도로 정조의 화성 순시는 과히 들뜨고 행복하다. 그러고도 또 1798년(정조 22) 8월, 이곳에서 하룻밤을 노닐었던 기록으로 보아 ‘왕의 정원’으로 방화수류정 공간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연(龍淵)은 성을 만들기 이전에 존재하였고 ‘동북각루 외도2’에서 보이는 연못 앞 용두(龍頭)는 “정자 아래에 있는 용두라는 바위는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으로 사람이 걸터 앉을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이 있었음을 유추한다. 지금은 수목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용두로 일컬은 바위 부분의 수목을 제거하고 드러나게 하면 연못의 이름인 용연과 용두각이라 불렸던 정자의 의미가 보다 극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동북각루 외도’ 도면에서 용연 주변의 버드나무와 중도의 소나무가 보이고, 용두에는 초화류, 철쭉류가 군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방화수류정 누정 원림을 걷는다

오랜만에 꼭꼭 숨겨 감춘 내 마음의 풍파를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누정 원림을 찾는다.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된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혜경궁 홍씨의 회갑일에 맞춰 9월 4일 공사를 시작하여 ‘한 달 보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축적된 설계 역량과 건축 기술, 인력과 자재 조달 능력을 발휘한 건물이다. 망루의 역할도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빼어난 경관 지점이 존재하는 풍경의 조망을 더 높이 쳐준다. 내가 부여에 2년 있을 동안 부소산성의 ‘반월루’의 수리 복원이 둘러쳐진 울타리만 2년이 더 걸렸으니 그 시절 기술의 파급력과 성취 수준은 오늘날 가늠이 안 된다.

방화수류정을 찾을 때는 일부러 광교저수지 아래로 흐르는 수원천의 사행형 하천으로 시작한다. 방화수류정을 찾아가는 나만의 루틴이다. 직강 하천을 사행형(蛇行形) 하천으로 굽이쳐 흐르게 하였다. 앞선 친환경적 하천 정비의 수원은 전국의 모범이고 표준이었다. 환경 관련 교재에 빠짐없이 친환경적 하천 정비 우수 사례로 소개된다. 교수와 학생들의 현장 답사와 공무원의 견학까지 수원천은 한때 꽤나 이름을 날렸다. 수질 개선을 위하여 심은 갈대를 비롯한 수생식물은 여전히 다루기 힘들 정도로 왕성한 생육을 매년 거듭한다. 이곳에 깃드는 곤충과 새들 또한 왁자하다. 하천을 걷는 시민들이 모기 출현으로 민원을 자주 넣는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많은 수초가 베어진다. 그러다 또다시 왕성한 성장을 보인다.

하천길을 걷는 시민들은 건강하다. 걷다 보면 7개의 홍예 석교 위에 축설된 화홍문 누각을 만난다. 한때는 큰 홍수로 소실되어 누각 없이 교량처럼 보낸 일제강점기가 있었다. 저 풍광에서 화홍문 누각을 지우면 아치형 교량이면서 물이 빠지는 수문이다. 수문 위에 건물을 앉힌 게 신의 한 수이다. 수원화성의 뛰어난 경관미는 이렇게 완성한다. 포루나 공심돈 위에 기와 지붕이 올라앉아 멀리서 보면 성벽과 이어지는 고대광실처럼 보인다. 날아갈 듯 날렵하나 길게 이어진 성벽을 가만히 움켜쥔 듯 붙잡는다. 마치 엄마 손에 이끌린 소년의 다른 한 쪽 손에 쥐어진 풍선처럼 바라보는 눈길을 부드럽게 한다.

방화수류정과 잇대어 있는 북수문의 편액은 화홍문(華虹門)이다. 화성성역의궤의 ‘북수문’에 대한 도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대천(大川)이 성 전체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칸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 다리 위 북쪽 편에는 누각 6칸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칸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칸이다. (…)

-『화성성역의궤』, 권수, 도설

 

‘광교 대천’이라 기록한 수원천의 범람을 고려하여 물길을 정비하였다.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화홍문은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을 통하여 도심을 관통하여 흐른다. 화홍문은 방화수류정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방화수류정은 언덕을 올라가는 게 성화(成火)스럽기 때문이다. 화홍문 마루 바닥에 앉으면 북쪽 광교산에서 물길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남쪽 도심의 뜨거운 공기로 급하게 이동하기에 한여름에도 이곳에 앉으면 온 몸 구석구석이 바람 소리를 낸다.

 

(좌)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우) 화홍문에서 바라보는 유천(버들내)
(좌)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우) 화홍문에서 바라보는 유천(버들내)

 

 

방화수류정을 콘텐츠로 담은 풍경

 

방화수류정에서 울화를 풀다 / 온형근

​광교 저수지 머물렀다 굽이 물길 흐르는

풀섶은 붉은토끼풀 앞세운 무성한 갈대숲이다.

 

물막이 작은 보에서 쏟아지는 왁자한 물결

아낙의 샘솟는 소리로 흐른다.

버드나무 수관 아래 구부정하게 선 남자의

지치고 처진 어깨가 물살 소리로 요동한다.

 

더러 아침 햇살 함박꽃 무더기처럼 반짝여

저들 눈빛과 선한 표정이 선 채로 선정에 들었음을

안다.

 

버들내에서 화홍문으로 버들 바람 흠뻑

쏴아 쏴아 큰 바다 물결처럼 인다.

답답하여 얻은 울화를 저격하며 씻어낸다.

 

손을 날개 삼아 펼치니 부풀린 가슴,

겨드랑이를 관통하며 부끄러움도 숨는다.

 

화홍문이 열리는 삐거덕대는 소리에

방화수류정 안마당으로 따사로운 햇살 조잘댄다.

 

동쪽으로 내달린 부드러운 곡선의 성벽 따라

용연의 늘어진 버드나무 치렁한 가지도 굽이쳐 흔든다.

흔들릴 때마다 연못 맞은편 동북포루의 각건이

연못 물기 피어올라 짙은 햇무리로 출몰을 거듭한다.

-2023.5.13.

 

굽이치는 사행형 하천은 생태계의 순환을 유지하는 순기능을 지닌다. 물가에서 물속으로 번지는 갈대는 수질을 정화한다. 작은 보에서 잠시 머물렀다 월류하는 물살의 소리가 제법 심산 구곡의 운치를 낸다.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이 일상에 지친 어깨를 감싸준다. 더러 햇살 강렬하여 바라보는 이에게 찬란한 광채를 준다. 무엇보다도 화홍문 마루에 서성일 때,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에 당혹스럽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사방으로 빙 돌며 시선을 나눈다. 경관의 시점 또한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오늘은 용연 이무기 토수구 근처 끄트머리 긴의자에 앉아 동북포루를 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방화수류정 누정 원림을 시점을 달리하여 바라보고, 누정에서 사방을 서성이다 생각난 친구가 있다. 함께 근무하던 친구이다. 전화를 하였다. “방화수류정을 시점을 달리하여 그린 그림이 있으면 좀 보내 달라.”라고 하였다. 4시간 후에 1작품, 다시 2시간 후에 1작품을 보내왔다. 방화수류정을 콘텐츠로 담은 풍경이다.

 

(좌) 최기운, 방화수류정에 가을이 깃들면(2017, 71×51㎝, 화선지, 수묵담채)(우) 최기운, 화홍관창, ‘자연울림 전’, 팔달구 청사 개인전, 수원 화성의 풍경 중에서.
(좌) 최기운, 방화수류정에 가을이 깃들면(2017, 71×51㎝, 화선지, 수묵담채)(우) 최기운, 화홍관창, ‘자연울림 전’, 팔달구 청사 개인전, 수원 화성의 풍경 중에서.

 

 

최기운 화백은 여전히 현역이고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개인전과 초대전, 그룹전을 비롯하여 수상 경력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건, 그와 내가 화통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근기를 갖췄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전화하여 말을 걸어도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만날 수 있는 기세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조만간 변함없는 기백과 예술적 골격을 확인할 참이다. 오른쪽 그림의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홍문 7개의 수문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말한다. 수원8경 중 제3경에 해당한다.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