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산수유 마을은 알겠는데, 육괴정(六槐亭)은 처음

이천을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 꽤 많은 ‘첫’이 탄생한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첫 발령지이다. 결혼과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연 많은 곳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옛이야기는 접자. 4년 6개월을 근무하였을 뿐인데 기억의 회로에는 46년의 추억거리로 뭉쳐 맴돈다. 오래도록 꺼내지 못한 탓이다. 꺼내지 못한 옛 추억은 묻어 둔 채, 새롭게 이천을 떠올렸다. 이천 백사에 있는 ‘육괴정(六槐亭)’을 취재 답사하기 위해서다. 제법 이천에 대하여 알고, 백사의 산수유 축제도 잘 안다. 남한강 강변 미루나무 그늘에 여름 한낮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런데도 오늘에야 ‘육괴정’을 알았으니 이천 전체가 갑자기 생소하다.

당시에 산수유나무 고목 한 그루가 자녀 대학 학비를 충당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백사에서 등교하는 학생에게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86아시안게임이 끝나고,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시대였다. 학생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일할 사람 구하는 일이 매우 어렵던 시절이다. 산수유 열매를 벗기고 난 씨앗을 구해 파종하였다. 2년 발아라 파종 후 1년을 빈 밭 제초를 하느라 애썼다. 기어코 2년째 되던 해에 발아하더라. 산수유나무가 주택 조경 등 눈높이 식재 수종으로 잎과 꽃과 열매 모두가 관상 가치가 높으니 많이 육성하라고 주변에 권했다. 유망한 조경수 개발 품종으로 식재 설계에 많이 넣었다. 지금은 널리 퍼져 쉽게 산수유나무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쓸만한 규격의 산수유나무를 공급하는 일은 중간 도매상인 소위 ‘거간(나까마)’도 튕기면서 일하던 때였다.

 

이천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 누정 위치 현황도  A : 육괴정, B : 산수유 마을, C : 산수유 군락지, D : 낙수재 폭포, E : 반룡송, F : 원적산
이천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 누정 위치 현황도 A : 육괴정, B : 산수유 마을, C : 산수유 군락지, D : 낙수재 폭포, E : 반룡송, F : 원적산

 

‘육괴정’은 이천 백사면 도립리에 위치한다. 앞서 말한 산수유마을이다. 산수유마을은 와 보았어도 육괴정은 처음이다. 뭐 그럴 수 있다. 늘 관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지는 게 이치 아니겠는가. 육괴정 가는 길에 천연기념물 반룡송도 있으니, 답사에 덤 하나 얹는 기쁨도 쏠쏠하다. 도립리는 이천의 진산인 원적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평화롭다. 3년간이나 중단되었던 ‘이천 백사 산수유 꽃축제’를 올해 24회를 맞이하여 2023.3.24.(금)~3.26(일)까지 도립리, 경사리, 송말리 일원에서 열렸다. 기후 변화로 인해 산수유도 점점 꽃망울이 예년보다 일찍 터뜨린다. 500년이 넘는 산수유나무를 포함하여 1만 7천여 그루의 산수유나무 군락이 꽃이 필 때는 온 동네를 노랗게 물들인다. 그 황홀함은 겪어 보지 않고는 나눌 수 없다. 꽃이 필 때 ‘산수유 군락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산수유 노란 꽃이 스멀거리며 길게 이어진다. 이게 봄이다. 과연 단일 수종 꽃 군락이 주는 장엄함이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최대치인 게 분명하다. 가을의 새빨간 산수유 열매 또한 그림 같은 정취를 안겨준다. 살 맛이 나는 풍광이다. 하물며 해묵은 느티나무의 중후하고 엄숙한 장중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천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은 이런 이유로 계절을 살펴야 한다.

 

(좌) 산수유 마을(구글어스 사진) (우) 산수유 군락지(구글어스 사진.)
(좌) 산수유 마을(구글어스 사진) (우) 산수유 군락지(구글어스 사진.)

 

누정의 이름에 다가서는 자연경관 요소인 주변 식물

누정의 이름은 유래가 있다. 누정 주변의 경관 요소를 중심으로 유래를 구분하여 설명한 것을 찾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동국여지비고』, 『증보문헌비고』의 1,016개의 누정명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누정명을 분석한 안계복의 연구가 좋은 자료이다. 이 연구에서는 누정명 분류 방안을 다음 표와 같이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출현하는 누정의 이름을 크게 자연경관, 사회문화, 경관 이용, 기타로 나누었다. 그리고 자연경관을 구성 요소로 구분하여 지형, 동·식물, 자연 현상으로 나눈다. 그중 동·식물적 요소를 보면, 동물로는 학이 가장 많고 봉황, 거북 순으로 나타난다. 식물은 동물보다 더 많이 쓰였다. 누와 정자 근처에 가까이 위치하는 식물을 누정명에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름 지을 때 주변을 쓰윽 쳐다보는 행위와 함께 작명의 계기는 차고 넘친다. 식물의 상징성과 누정의 이름은 나란히 달려나가는 궤도이다. 그만큼 식물이 지니는 상징성은 의미소(意味素)로 작용하고 주변 경관을 성립하게 하는 주경관 요소이다.

식물의 기상과 뜻과 의미를 누정의 이름으로 이용한다. 안계복(1989, p.153.)의 연구를 보면, 주로 많이 사용된 식물은 소나무, 연꽃, 대나무, 동백나무, 수풀 림자, 단풍나무 등이다. 즉 송(松), 연(蓮), 죽(竹), 백(栢), 림(林), 풍(楓)의 순서로 많이 쓰였다. 또한, 식물 관련 누정 이름의 독특한 특성을 보면, 누정 근처에 배롱나무가 많이 식재되었음에도 누정명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연은 주변에 식재된 것보다 누정명으로 더 많이 사용된 경향이고,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덕을 칭송할 만한데 심어진 빈도보다 누정명으로 쓰인 정도는 낮은 편이라는 것이다.

 

느티나무 또는 회화나무로 이름 짓는 누정명 괴정(槐亭)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괴목(槐木) 이라고 부른다. 느티나무인지 회화나무인지는 앞뒤의 문장과 진술 내용을 통하여 감별할 수 있으나 때로는 구분하기 힘들 때도 있다. 괴정(槐亭)은 ‘괴목이 심어진 정자’를 의미하는데, 정자가 아닌 헌(軒), 대(臺), 당(堂), 재(齋) 등까지 포함하여 ‘괴정’이라고 정의한다.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누정명으로 사용한 괴정의 종류는 다양하다. 식재된 괴목의 수를 대상으로 하여 누정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단순하면서도 꽤 널리 알려진 방식이다. 이번 취재 답사를 나선 이천의 백사면 도립리에 있는 육괴정 원림도 식재된 괴목의 수로 이름을 지는 누정이다. 보통 괴정, 쌍계정, 삼괴정, 사괴정, 오괴정, 육괴정, 칠괴정, 구괴정 등으로 누정명이 성립되어 분포되었다. 팔괴정은 없다. 한 조사 연구는 (일)괴정(45.1%), 쌍괴정(16.9%), 삼괴정(21.1%), 사괴정(5.6%), 오괴정(4.2%), 육괴정(2.8%), 칠괴정(2.8%), 구괴정(1.4%)로 괴정이 들어간 누정명의 분포를 집계하였다.

이천 육괴정은 분포상 매우 드문 누정 이름이다. 예산 육괴정과 이천 육괴정이 있을 뿐이다. 예산 육괴정은 느티나무 여섯 그루로 이름 지은 것이다. 예전 수덕사 가는 길에 있던 수덕고개에 있는 느티나무 군락이다. 그 밑에 조그마한 민가가 있었고, 이제는 2층짜리 음식점이 길게 들어섰다.

 

(좌) 예산 수덕고개 육괴정 군락 옛 사진 (우) 지금의 예산 육괴정 느티나무 군락, 출처 : mooksu.tistory.com
(좌) 예산 수덕고개 육괴정 군락 옛 사진 (우) 지금의 예산 육괴정 느티나무 군락, 출처 : mooksu.tistory.com

 

이천 육괴정을 들뜬 마음으로 찾았다. ‘도립리 육괴정’ 안내문에는 육괴정 건립자는 엄용순(생졸년 미상)이다. 엄용순은 효성이 지극하였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낙향하여 초옥을 짓고 연못을 만들어 ‘남당(南塘)’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사화를 피해 낙향한 김안국(1478~1543), 강은(1492~1552), 오경(생졸년 미상), 임정신(1512~1588), 성담령(생졸년 미상) 등과 시회를 열고 학문을 강론하며 교유하였다. 이때 우의를 다지는 뜻으로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초당을 ‘육괴정’이라고 불렀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육괴정의 나무를 ‘회화나무’라고 하였다. 실제로 육괴정에 식재된 나무를 현장 실사 없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연못은 처음보다 규모가 줄어들었다. 포장하면서 없앴다가 다시 흔적만 옹색하게 남긴 연못이다. 육괴정 앞을 흐르는 냇물과 이어지지도 않았다. 이천 육괴정을 감싸며 산수유 봄바람을 몰아주는 원적산 둘레길이 뜨고 있다. 산수유 군락지와 더불어 낙수재 폭포, 잣나무 임상으로 이어져 영원사까지를 육괴정 누정 원림으로 삼아 거닐고 미음완보하는 것을 주선한다.

 

(좌) 육괴정 원림 전경 (우) 육괴정 현판, (2023.06.05.)
(좌) 육괴정 원림 전경 (우) 육괴정 현판, (2023.06.05.)

 

대체 물까치라는 새가 질타하는 것은 뭘까?

아무리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도 인연은 더딜 수 있다. 만남이라는 게 그만큼 시공간을 초월한다. 의념이 다가가야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질 수 있다. 육괴정에 도착하여 내가 좋아하는 누정 답사 행위인 누정 마루에 앉을 생각으로 서성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정려문과 육괴정 사이의 포장된 공간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물까치에게 뒤통수를 가격당한다.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살펴보니 물까치가 급강하하면서 뒤통수를 친 것이다. 왜일까를 궁금하여 주변을 살피니 물까치 새끼 두 마리가 도약 연습 중이었다.

 

짧고 강한 소리 / 온형근

​오백 년 넘은 느티나무에 앉으니 원적산 바람결 일렁이는 모습에 산수유 꽃 벙글어지는 순간까지 포착되잖아

천지에 먹을 것투성이야

누가 침입자라고 여기면 바로 신호를 줘

 

짧고 주파수가 넓게

더 날카롭고 더 강하게

 

그날은 현충일

왜병이 세종대왕릉을 해치려 할 때

분연히 일어나 용전분투하다

여주 남한강에서 순국한

그래서 내려진 충신정려문과 육괴정六槐亭 사이 안마당에서

 

처음 알 수 없이 갈기기에 크게 놀랐다.

정확하게 후두부 어느 혈을 짚은 거

그래서 둘러보니 물까치 갓 부화한 새끼가

뒤뚱대며 날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도약 중

그때 알게 된 높은 느티나무에서 내려다보는

물까치에게 나는 제 새끼를 위협하는 침입자

 

서둘러 남당 연못으로 나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나를 가격하다니 섭섭해할 때

다시 짧고 강한 소리를 내며 느티나무에서 급강하

같은 자리에 또다시 가격

새끼들 영역에서 나왔음에도 끝까지 추적하는

오늘 꼼짝없이 내침자로 낙인되었음이

 

육괴정 바깥 느티나무 회전 교차로 건너

오래된 산수유 그늘로 피해 사진 찍다가

세 번째 가격, 이후에는 나도 물까치를 추적한다.

꼭 뒤통수만 노리고 가격 부위도 같은 곳이었으니

그가 전수한 비급에 따른 급소를 노린 걸까

날아올 때, 손을 가로저으니 비행경로 이탈이다.

 

-2023.06.12.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라는 생각을 오랜만에 해보았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그렇다고 내가 위해를 가한 것은 전혀 없다. 사실 새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까치 어미의 공격은 자기 새끼를 보이게 하려는 의도일까. 그렇다면 수동적인 보호 본능을 넘어서 능동적인 행동인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영역인 느티나무 3그루와 번식 마친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는 그들의 짧고 강한 신호 체계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어느새 물까치 떼에게 나는 외부 포식자가 되어 답사 내내 머뭇대며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물까치가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몸소 당한다.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 물까치에게 그날의 나는 비행 목표물이었다. 그것도 끊임없이 빠르게 접근하여 가격하고 위협하여 귀찮아서 물러서게 만드는 전략의 대상이었다. 육괴정을 나서면서 충신정려문을 정독한다. 엄용순의 손자인 유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이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을 침해하는 것을 저지한다. 육괴정에서 영릉은 배로 잠깐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우던 유윤은 여주 남한강변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고종 30년에 그의 ‘충신정려문’이 이곳 육괴정에 내려졌다. 누정에 직접 충신정려문이 내려진 사실이 육괴문을 특징 지우는 큰 자산이다.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괴정육현(槐亭六賢)이 산수유도 함께 심었기에 오늘날 육괴정 앞의 산수유가 산수유마을의 산수유 중 매우 근본 있는 산수유나무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육괴정 입구에 세워진 ‘충신정려문’, 이조참의에 엄유윤을 증직함(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는 것)
육괴정 입구에 세워진 ‘충신정려문’, 이조참의에 엄유윤을 증직함(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는 것)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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