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영보정의 단아한 자태

온형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미래문화유산대학원 한국정원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온형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미래문화유산대학원 한국정원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바람이 분다. 성급하게 가을을 힐끗 본다. 최기운 화백과 영보정(永保亭)을 찾았다. 최 화백은 최근 보령(保寧)을 주제로 연작화를 그린다. 어느 날 카톡으로 안부차 날아온 그림은 한 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보령의 영보정이었다. 영보정으로 생각의 향방이 갈렸다. 나팔꽃처럼 길게 늘어져 얽힌 답사 대상지의 선정이 죽비처럼 단호해졌다. 영보정은 그림으로 살며시 다가왔으나 당장 떠날 채비를 할 정도로 이끌렸다.

답사 일정은 기왕이면 최기운 화백과 동행하고자 한 주를 더 기다렸다. 그렇게 나서면서 그와 보령에 대하여 좀 더 가까워진다. 영보정은 오천항에 위치한다. 충청수영성의 영내에서 정박한 배들이 가장 잘 보이는 으뜸의 장소이다. 오천은 자라 오(鰲)자와 내 천(川)자를 쓰니 ‘자라내’라 하겠다. 과연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자라목처럼 길게 물길이 이어진다. 오천면과 천북면 사이에 좁고 긴 바다인 이곳의 옛 기록은 소성강(蘇城江)이다. 바다를 강으로 표기한 것은 옛사람들의 낭만이리라. 입구에 많은 암초로 막혀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파도가 일지 않으며 수심이 깊어 어떤 기후 조건에서도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다. 들락날락하는 바닷물의 조수에 따라 갯벌은 건강하다.

배롱나무와 영보정 (2023. 09. 09.) ⓒ온형근
배롱나무와 영보정 (2023. 09. 09.) ⓒ온형근

점심때 먹은 바지락 칼국수가 떠 오른다. 항구 빈터마다 턱 하니 갔다 풀어 놓은 배들은 낚시꾼들의 민낯이다. 주꾸미 낚시꾼들의 ‘염치 불고’ 취향의 소치(所致)이다. 항구에서 주차 공간 찾기는 정박한 배에서 거북선 찾기만큼 비현실적이다. 이곳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최 화백은 충청수영 장교청 앞 나무 그늘에 정차한다. 영보정이 9월의 배롱나무 꽃더미 속에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바로 향하지 않고 더 멀리서 조망하고자 물러난다. 바로 오석으로 축성한 충청수영성의 성벽이다. 능선으로 성벽이 견고하다. 충청수영을 둘러싸는 성벽이다. 제법 난이도 있는 성벽에 올랐다. 과연 원경으로 영보정의 단아한 자태가 돋보인다. 능선을 타고 위로 더 오른다. 고소 공포에 시달리는 잠깐의 어질함 속에 최기운 화백의 영보정 그림이 착화된 시점에 도달한다.

그는 그 위치에서 영보정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어루만지며 붓 터치의 감각을 손가락으로 셈하고 있다. 나는 풍경을 새기고 읽으면서 시 울림을 거두고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최 화백과의 동행 내내 그의 서글서글한 마음결이 내게 스미었다. 내심 잊었던 사내들만의 진한 우정이 오랜만에 모락모락 터지고 있었다. 나의 젊음은 오죽 우정과 의리를 앞세우며 살았던가. 부딪히고 모나게 깎이고, 쓰리고 아프면서 지우며 석화되었던 우정과 의리 그것이 스멀거린다.

영보정은 정박한 세월의 닻을 두루 살피는 명승지

충남 보령의 영보정을 그린 한국화 - 「영보정의 보이는 오천항」, 최기운 작 ⓒ온형근
충남 보령의 영보정을 그린 한국화 - 「영보정의 보이는 오천항」, 최기운 작 ⓒ온형근

최기운 화백의 그림에 피어오르는 안개는 영보정을 중심으로 소성리 일대의 충청수영성과 오천항, 그 건너의 학성리 너머의 천북항을 에워싼 산맥까지 바다의 옥색 일렁임이 붙잡아 준다. 안개는 영보정 일대의 풍광을 하나의 경물로 돋보이게 하고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영보정 주변을 에워싼 낙엽수의 민낯이 단아하다. 가지마다 금방 터질 듯 꽃눈과 잎눈이 두툼하게 노출된 이른 봄의 영보정 풍광이다. ‘해변기암절벽’을 향하여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에게 서로를 의지하며 고개를 부드럽게 낮춘다. 살랑이는 바람은 보령방조제에서 달려와 절벽을 치고 오른다. 소나무의 기백을 설레게 한다. 영보정은 정박한 세월의 닻을 두루 살핀다.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영보정은 그 위치만으로도 의연하다.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라도 그 자리에서 든든한 곁을 내준다.

조선의 17세기는 명승지 유람과 함께 시문서화(詩文書畫)의 창작과 향유가 크게 유행하였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관의 명승을 탐미의 대상물로 삼았다. 그 시대의 집단 지성과 예술적 지향이 그러하였다. 명승은 구체적 경관 대상지라는 장소성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름있는 명사(名士)와 만날 때 비로소 명승이라는 지위가 부여된다. 많은 명승이 그러한 양상으로 세월의 자취와 함께 인문의 숲을 이룬다. 자연 스스로 명승이 되는 게 아니라 인문의 숲이 영글어져 서로 관여할 때 명승이 탄생한다. 명승은 발견자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의미를 부여한 기록이나 흔적을 딛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행적을 추체험(追體驗,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 또는 이전 체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처럼 느낌)하는 행위가 쌓이면서 명승으로 공인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명승은 오래된 인문의 숲을 추체험하는 것이다.

명승의 바탕은 빼어난 경물이다. 바탕을 이름나게 하는 것은 콘텐츠 생산이다. 그것은 수려한 경관을 ‘정성스런 알아차림’으로 접근하는 행위에서 비롯한다. 한국정원문화에 자주 등장하는 ‘유상곡수연’의 원형인 왕희지1)의 ‘난정서2)’를 떠올린다. 유종원(柳宗元3), 773~819)은 「옹주마퇴산모정기(邕州馬退山茅亭記)」에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난정수계(蘭亭修稧)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의 이 문장은 명승의 의미를 일찍이 간파한 깨우친 사색의 발현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다워지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蘭亭이 王右軍을 만나지 않았다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가 빈 산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夫美不自美, 因人而彰, 蘭亭也. 不遭右軍, 則淸湍脩竹, 蕪沒于空山矣.

부미부자미, 인인이창, 난정야, 부조우군, 측청단수죽, 무몰우공산의

-柳宗元,  「柳河東集」  卷26, 「邕州馬退山茅亭記」

‘우군’은 동진 때의 우군장군을 지낸 왕희지를 말한다. 그래서 ‘왕우군’으로 불렸다. ‘난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지인을 초대하여 음주와 시를 지으며 경관을 즐겼다.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 전문은 28행, 324자이다. 동아시아 조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연잎에 술잔을 얹어 굽이쳐 흐르는 물에 띄우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원형이다. 유상곡수 문화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한 것은 후대의 명사들이 그의 명승 체험 양상을 추체험으로 이어갔기 때문이다. 적벽이 소식(蘇軾4), 1037~1101)을 만나 명승이 된 것처럼 경물이 그 가치를 알아주는 행위자를 만나 콘텐츠가 창작되었을 때 장소성을 획득하고 의경(意境)이 된다. 명승은 향유자로 하여금 콘텐츠를 생산하는 힘을 지녔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세대를 넘나들며 전승되는 문화적 속성으로 표출한다.

1) 왕희지(王羲之)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이다. 예서(隷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서체를 완성하였다. 그에 의해서 글씨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을 넘어 예술로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2) 난정서(蘭亭序)는 왕희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353년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했다. 이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다. 이것이 바로 난정서이며 지금까지도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珍品)으로 인정받고 있다.

3) 유종원은 당 시대의 정치가, 문학가이다. 특히 당/송 시대를 대표하는 8명의 산문작가를 일컫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이다. 유종원은 독창적인 산문을 여럿 지었고 당나라 이전 시대의 산문(고문)을 집대성하여 중국 문학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4) 소동파(蘇東坡)라 부른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했다. 대시인, 대문장가, 서예가, 문인화풍 확립의 화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소순(蘇洵), 아우는 소철(蘇轍)인데, 이 세 부자를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이다. 당송팔대가는 당나라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이다.

'한중명승도첩'에 소개된 유일한 한반도 남쪽의 명승지인 영보정

 

작자미상, 「영보정」, 한중명승도첩 제13장, A : 한산사, B : 쌍오도, C : 풍류도, D : 빙도, E : 해변기암절벽 ⓒ온형근
작자미상, 「영보정」, 한중명승도첩 제13장, A : 한산사, B : 쌍오도, C : 풍류도, D : 빙도, E : 해변기암절벽 ⓒ온형근

영국국립도서관 소장 '한중명승도첩(韓中名勝圖帖)'은 시 한 편과 한국과 중국의 명승 경관 각각 5폭씩 실경산수화 10폭이 실린 화첩이다. 중국(삼협, 악양루, 포산, 절강호, 황학루), 평안도(강선루, 약산동대, 통군정, 백상루), 충청도(영보정) 등의 명승이 담겨 있다. “화풍 자체는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화풍과 상통한다”.5) '한중명승도첩' 제13장에 나온 「영보정」 그림을 보면 ‘보령 영보정’의 모습이 보인다. 서쪽에서 부감(俯瞰)의 시점으로 기암절벽을 돋보이게 그리면서 영보정과 관아를 그렸다. 멀리 오서산(烏棲山) 줄기를 가깝게 끌어와 네모의 음영에 지명을 기재하였다. 빙도(氷島, 그림-D)는 현재 보령방조제에서 훨씬 동쪽으로 위치하였지만 그림에는 영보정 왼쪽 가깝게 배치되었다. 쌍오도(雙鰲島, 그림-B)는 이곳의 지명인 오천항(鰲川港)을 탄생시킨 근거의 섬이겠다. 쌍오도와 오천항의 자라 오(鰲)자가 주는 지명의 의미가 무게감을 남긴다. 서문 밖 해변에 정박된 배들이 한가롭다. 이외에도 그림에 명칭을 부여한 송호(松湖), 한산사(寒山寺, 그림-A)가 보인다. 일제 강점기부터 진행된 간척 사업으로 경관의 원형을 화첩으로 읽는다.

5) 박정애. 조선 후기 명승과 명승도 향유 양상 –한중명승도첩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vol. 119, 2022, pp. 169–210.

영보정은 주변의 낮은 구릉과 조수 간만의 차가 만드는 만과 섬의 풍경으로 고유의 뛰어난 경관을 자아낸다. 1795년(정조 19) 금정찰방 시절에 영보정을 방문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영보정연유기」가 이를 대변한다.

세상에서 호수와 바위, 누정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 으로 꼽는다.

世之論湖石亭樓之勝者 必以永保亭爲冠冕

세지론호석정루지승자 필이영보정위관면

-정약용, 「영보정연유기」, 다산시문집 권14.

영보정의 경관을 ‘벼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인 ‘관면(冠冕)’에 비유하였다. 명승지로서 벼슬한 것처럼 빼어난 승경이라고 까다로운 다산(茶山)의 안목으로 극찬한다. 그러나 다산이 영보정을 방문하게 한 계기는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의 시에서 비롯한다. 「영후정자」라는 5수의 시가 널리 읽혔다. 이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0 보령현조에 실렸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의 제2수에 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지칭하는 시구가 있다. 영보정 일대의 경관을 중국의 명승지인 소주에 빗대어 작명하기 시작한다.

저녁 조수 밀려드는 곳에 잠시 베개에 누웠다 / 晩潮來處暫欹枕 만조래처잠의침

눈길을 드니 홀연 새로 물가 생긴 게 보이누나 / 擡眼忽看洲渚生 대안홀간주저생

아침저녁으로 응당 그 누가 호흡하는 것이리 / 朝暮應誰事呼吸 조모응수사호흡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성쇠를 거듭하는 법이지 / 乾坤終亦有虧盈 건곤종역유휴영

남쪽 사람들은 배 타는 게 말 타는 듯하고 / 南人浮海如行馬 남인부해여행마

물나라(澤(國)에서도 봄을 만나 조금 개이더라 / 澤國逢春更少晴 택국봉춘경소청

날마다 누각에 기댄 채 내려오지 않노니 / 日日倚樓渾不下 일일의루혼불하

괴이하게 우는 백구 울음을 때때로 듣노라 / 怪聲時聽白鷗鳴 괴성시청백구명

-박은, 「영후정자」, 「읍취헌유고」 제3권, 칠언율시

5행과 6행은 배를 말타듯 부리는 ‘물나라(澤國)’라는 시어를 사용하여 중국 소주를 은유한다. 그래서인지 충청수영성은 지금 소주의 옛지명인 ‘고소성(姑蘇城)’으로 불렸다. 영보정 서북쪽 높은 지대를 ‘고소대(姑蘇臺)’라 명명하였고 앞바다 건너편 한산사와 황학루(黃鶴樓)를 건립하였다. 한산사는 소주에 있고, 황학루는 무한(武漢)에 있는 중국 강남의 명소이다. 임진왜란에 머물렀던 명의 장수들이 “중원에도 이런 절경이 없으며 악양루, 황학루보다 기이하다.”고 칭송한 언급6)이 확인된다.

6) 박현규, 임진왜란 오천 忠淸水營城 소재 明軍 유적과 시편, 중국학논총 65, 한국중국문화학회, 2020, pp. 109~114.

중국의 쑤저우에 비견한 보령 영보정 승경

하백원, 「영보정」, 해유시화첩, 1843년, 지본담채, 24.4×31.9㎝, 규남박물관 A : 영보정, B : 한산사, C : 황학루, D : 거북선 정박 ⓒ온형근
하백원, 「영보정」, 해유시화첩, 1843년, 지본담채, 24.4×31.9㎝, 규남박물관 A : 영보정, B : 한산사, C : 황학루, D : 거북선 정박 ⓒ온형근

충청수영을 중국의 고소성이라 부르는데 소주의 한산사가 빠질 수 있겠는가. 소주 한산사에서 읊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유명한 시를 읽는다. 당나라 장계(張繼)라는 시인이 남긴 작품이다.

달 지고 까마귀 우니 서리 찬 하늘이라.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강 단풍, 고깃배 등불에 시름겨운 잠자리.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고소성 밖 한산사, 아 고소성 밖 한산사.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산

야반 종소리 울려 나그네 배에 들리노라.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중국시가선>, 지영재 편역, 을유문화사

고소성과 한산사는 말만 들어도 그 당시 문인들에게 가고 싶은 절실한 장소였다. 뱃놀이를 즐기면서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면 풍교야박의 스며듦에 절절해졌을 것이다. 중국 소주의 한산사를 배경으로 풍교라는 다리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지금도 이어진다. 그만큼 이 시를 통하여 소주의 한산사와 풍교는 명승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춘다. 지금은 없어진 영보정 소성강 너머의 한산사는 그래서 조선의 소주를 떠올리게 하는 명승지의 반열에 든다. 보령의 한산사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1709년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주도한 장소였다. 평생을 명승 답사를 다닌 옥소 권섭(權燮, 1671~1759)의 ‘남서유행기략’에 49세인 1719년에 한산사를 다녀온 것이 기록되었다. 또한 규남 하백원(河百源, 1781~1845)은 1843년 63세에 유배지 보령의 선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솔섬(松湖)과 고만(高巒)을 거쳐 황학루를 감상하고 한산사에 1박을 한 후 영보정까지 유람하였다. 이때 여섯 명이 시를 짓고 규남이 그림을 그려 해유시화첩(海遊詩畫帖)을 완성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이곳 산수가 중국 고소성과 한산사와 상부하다 하였다.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답사는 독특한 경험으로 기억한다. 큰 선물이다. 자주 들려 계절마다의 느낌을 지닐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슬그머니 각인한다. 예전에 폐허미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성주사지까지 높은 산에서 조감할 수 있었던 보령 답사이다. 그림에서 보았던 오천항에 정박한 거북선의 잔영이 여전히 따라다닌다. 그에 못지 않게 큰 수확은 그윽한 우정을 되살릴 수 있는 떨리는 감성을 오랜만에 챙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보정을 주제로 시 하나 남긴다.

영보정 / 온형근

먼 뱃길 거친 풍랑 잔잔한 오천항에 머물러라

 

쉼 없던 거북선, 자라처럼 웅크려 정박하는 동안

충청 수영 몇과 전라 수영 몇이 영보정 마루에 둘러앉는다.

 

성벽은 오석이라 까마득하니 아득하고

갯벌에 숨 틔며 바지락, 항구 틈새마다 주꾸미

 

뜻 맞아 풍경 바깥의 심상을 나누는 영보정에서

손 빠르게 우럭과 바닷장어를 손질하여

잠깐 잊었던 천 년의 우의를 되살렸다.

 

옥마산에서 우람한 골격의 산맥 아래

성주산 성주사지가 안녕하냐고 묻는다.

 

-2023. 09. 14.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