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원문화 관점 답사의 대의는 격물치지와 존심양성

온형근 문화유산조경 박사
온형근 문화유산조경 박사

어디를 다녀왔다고 호들갑 떨 일 눈에 띄게 줄었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차일반의 관심사로 나아갈 경거망동은 없다. 그렇다고 잠행을 다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경관의 미학이라는 광석을 캐내는 발굴자이다. 사람이 우주에 내면화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우주성이 내재한 사물에 사람의 정감을 투입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신과 사람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신인묘합(神人妙合)’의 직관으로 미적 이상을 들여다본다. 특히 우주를 인격화한 신과 사람이 극적인 화해로 만나는 통합의 지점을 ‘신인묘합’에 담는다. 천인합일의 주체가 우주 중심적이라면, 물아일체의 주체는 사물 중심이다. 그에 반하여 ‘신인묘합’은 상호 주체적이다.

새해 소망 하나 다진다. 앞으로 지극하게 3년을 더 한국정원문화 관점 답사에 몰입한다. 나의 한국정원문화 관점 답사의 대의는,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식견을 넓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바탕으로 한다. 이에 더하여 하늘이 준 타고난 질박한 본성을 보존하고 심성을 바르게 하여 참된 성정을 기르는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줄을 댄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50여 편 정도의 누정기를 남겼는데, 신숙서(申叔胥)의 죽당에 붙인 ‘죽당기’에서 격물궁리(格物窮理)를 통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지어지선(止於至善)으로 나가는 수신(修身)을 강조한 내용을 속 깊게 품는다.

한국정원문화의 관점 답사를 격물치지와 존심양성에 기반하여 시의 경지를 헤아려 경관의 미학을 한층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단양 온달산성을 다녀왔다. 조선 후기의 버킷리스트인 제천, 청풍, 단양, 영춘을 포함한 사군산수(四郡山水)의 하나인 영춘에 위치한다. 지금은 단양군에 속한 영춘면이다. 온달산성은 매우 친근하다. 낯설지 않다.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으로 선행 학습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마치 다 아는 듯한 기시감이 앞선다. 그래서일까? 온달산성을 등반하듯 오르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 내가 그랬다. 늘 그 밑 관광지에서 위를 쳐다보거나 온달동굴을 찾는 것으로 다녀왔음을 대신하였다. 그렇게 격물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겼으면서도 그랬다. 그러니 이번에 온달산성을 올라가 본 것은 아뿔싸! 처음이다.

오르는 계단에 이끼가 서려 있는 게 이쪽이 여간 습한 곳이 아니다. 온달 영화 세트장 산 쪽 서향 기와와 담장에도 짙은 이끼가 두껍게 덮였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세월의 뜰 녹처럼 견고하다. 거기다 사람의 흔적이 드물어 인공이 자연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온달산성 오르는 길은 구절양장처럼 산길과 계단으로 이어진다. 산 아래쪽 목재 계단 가장자리는 온통 이끼로 잠식되거나 젖었다. 나중 한참 올라가면 햇볕 양명한 바짝 마른 계단을 만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오르다 몇 번 쉬고 어디쯤일까 견주는 앙감(仰瞰)의 시선이 잦다. 그만큼 오르는 일은 초심을 견인하여 운영하는 확신의 실행이다. 몇 번을 구부려 오른 후에 제법 다 올랐을까 싶은 기막힌 혈처에 정자가 보인다. 단아하고 알맞은 크기로 바위와 산의 한쪽 가장자리, 그렇지만 깎아지른 절벽 위 강물을 향하여 서 있다. 잊힐만하면 만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면 길이 없는 낭떠러지기'라는 경고성 푯말이 보인다. 곳곳이 급격한 낭떠러지기로 둘러싸인 반갑고 신비로운 구성이다.

파자(巴字)로 흐르는 남한강이 뚜렷하게 보이는 사모정 풍광

온달산성 주변 현황도, 온달산성 정상에서 ‘조망경관거점’으로 파자(巴字, S자)로 흐르는 남한강, ⓒ구글어스
온달산성 주변 현황도, 온달산성 정상에서 ‘조망경관거점’으로 파자(巴字, S자)로 흐르는 남한강, ⓒ구글어스

이윽고 올라가니 흐린 현판이 보인다. 검정 얕은 양각으로 사모정(思慕亭)이라 새겼다. 온달장군이 유시(流矢, 목표를 벗어나 빗나간 화살)에 맞고 전사하여 시신을 옮기려 하였으나 관이 꼼짝하지 않아 평강공주가 달래어 보낸 자리라 전해진다. 정자는 보통 세 가지 유형이다. 첫 번째가 벼슬에 출사하였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꾸려 운영하는 원림 유형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주요 키워드가 된다. 두 번째는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물러앉아 경관 그윽한 명승지에 자리 잡아 원림을 경영하는 유형이다. 첫 번째가 귀歸에 대한 삶의 의지라면 두 번째는 처處에 해당하는 삶의 모습이다. ‘귀’에 기반하는 이들 못지않게, ‘처’에 기반하는 이들의 전모는 순수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한다는 게 특징이다. 세 번째가 사모하는 정자이다. 존경하는 분들을 사모하기 위한 모慕의 키워드가 반영된 원림이다. 온달산성을 오르다 만난 정자인 '사모정'은 바로 세 번째에 해당하는 누군가를 사모하는 정자로 세웠다는 뚜렷한 증표이다. 대체 누구를 사모한다는 것인가? '온달' 장군이다. 누가 이 일을 도모하였을까? 한글로 새긴 중건기 현판에 그 답이 있다.

조남익 시를 삼석 김갑오의 각으로 도심정사 온일제 스님이 1995년 11월 13일 매단 현판 시 ⓒ온형근
조남익 시를 삼석 김갑오의 각으로 도심정사 온일제 스님이 1995년 11월 13일 매단 현판 시 ⓒ온형근

온달장군을 위한 진혼곡 / 조남익

이제는 돌이로다 / 아니 풀이로다

장군은 맹세하고 출정했었네 / 죽령 이북 실지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 결단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 삼국풍운의 전초기지에서 / 투구 쓰고 갑옷 입은 위용 / 남한강 배수진 치고 싸웠네 / 산천초목도 떨었던 용맹 / 멀리 요동 벌판에서는 / 날으는 마상의 위엄이 진동했었네 /

가슴에서는 누구보다도 / 뜨거웠던 사랑 / 평강공주의 섬섬옥수가 있었네 /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 한줄기 유시에 떨어진 큰 별 / 군사도 울고 백로도 울었네 /

아직 이루지 못한 맹세 / 너무나 분통해 관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네 / 평강공주 관 붙들고 오열하며 / 생사 이미 정해졌으니 돌아가사이다 / 하니 비로소 / 이승을 뜬 장군의 관 /

이제는 돌이로다 / 아니 풀이로다

나라 사랑 충혼 / 죽어서도 일편단심의 푸른 기상 / 인구에 회자되어 오기 천사백년 / 애틋한 장군의 뜻 / 하늘에 그리는 상형문자로 / 그 몸부림치던 혼이여 / 오랜 세월 그 몇 번이나 / 정숙하고 착하게 정화되어 / 겨레의 하늘나라에 올라 / 성령의 큰 사랑으로 빛나네 /

땅에는 이제 / 돌이로다 / 풀이로다

사모정은 온달산성 오르는 길, 가장 좋은 생기의 자리에 위치한다. 정자는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나 그 외양이 언뜻 보면 목조 정자처럼 보일 정도로 멋들어지다. 가까이 가야 콘크리트로 만든 정자임을 알 수 있다. 시를 창작한 시점은 온달장군이 ‘유시’에 맞아 사망한 지 1,400여 년이 지났다고 한다. 현판을 제작한 1,995년을 대입하면 595년이라는 해가 나온다. 온달 장군이 아단성에서 전사한 해가 서기 590년이니, 조남익(1935~ )의 시가 현판 제작 시기보다 5년 앞섰다. 시의 창작은 1990년에서 1995년쯤이 된다. 나중에 시를 현판에 새겨 중수기로 삼은 것이 1995년인 것이다. '사모정'의 입지 조건은 주변 경관이 확 트여 부감(俯瞰)되는 탁월한 자리이다. 현판 시는 사모정의 존재 가치를 인문의 보편적인 정서로 모은다. 사모(思慕)의 진정성을 지녔다. 사모정은 사적(史跡)으로 지정된 온달산성이라는 역사적 문화유산을 고무적인 기운으로 북돋는다. 온달산성의 조망경관거점을 중심으로 사모정의 직선거리는 500m, 온달동굴은 700m, 온달관광지는 1.0㎞, 영춘면사무소는 2.4㎞이다.

(왼쪽) 사모정에서 영춘, 남한강 내려다봄, (오른쪽) 사모정으로 오르는 경관(2023.11.20.) ⓒ온형근
(왼쪽) 사모정에서 영춘, 남한강 내려다봄, (오른쪽) 사모정으로 오르는 경관(2023.11.20.) ⓒ온형근

느릅나무를 매개로 한 온달과 평강의 로맨스

삼국사기에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 느릅나무가 나온다. 그대의 향기가 남다르고 손이 부드러우니 천하의 귀인이라고 노모가 공주에게 말한다. 아들은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다고 한다(取楡皮山林). 그리하여 마침내 산 아래에서 공주와 온달이 만난다(見温逹負楡皮而来).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과 공주는 첫 대면을 한다. 세기의 로맨스가 느릅나무를 매개로 하여 첫 대면을 하는 장면이다.

머언 산 청운사(淸雲寺) /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 맑은 눈에 // 도는 / 구름

-박목월, 「청노루」

박목월의 「청노루」에는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굽이를'이 나온다. 느릅나무는 초봄 머언 산 우거진 숲 어딘가에 녹자색의 꽃을 피운다. 녹자색의 믕쳐서 핀 꽃이 시에서 말하는 '느릅나무 속잎'으로 읽힌다. 물론 연이어 피는 느릅나무 연녹색 새싹 또한 '속잎'으로 충분한 경관적 가치를 지녔다. 그러나 시인이 시경으로 끌어낸 '속잎'은 봄 이르게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이다. 이를 발견하여 '속잎'이라는 시어로 표상한다. 시인이 발견한 남다른 시선이 '새싹'도 아니고 '새잎'도 아니고 '속잎'이라니! 그래서 느릅나무를 새롭게 환기하여 다시 살핀다.

느릅나무의 '어린잎'은 쌀가루나 콩가루에 버무려 떡으로 쪄 먹는다. 이를 ‘유엽병(楡葉餠)이라 한다. 느릅떡인 셈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당시의 문물제도 및 세시에 관해 기록한 풍속지인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월 초파일에 느릅떡을 만들어 부처님께 바치고 손님에게 대접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사람의 음식으로 풋풋한 맛을 내기에 '속잎'이라고 친밀한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다. 이르게 딴 어린 잎으로 나물을 무치거나 죽에 넣어 먹기도 한다.

느릅나무는 대형목으로 자란다. 큰 그늘을 만들어 한여름을 시원하게 해준다. 덕스럽고 인자하다.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산에 들어간 것은 겨울 지나 식량 공급이 원만하지 않을 때라는 말이다. 느릅나무의 속껍질을 우려내거나 말려서 가루를 내어 다양하게 음용한다. 그 방법은 느릅나무의 껍질을 벗겨 속껍질을 분리한 후 잘 찧는다. 그런 후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어 우려낸다. 이를 쌀가루와 솔잎 가루를 섞어 떡을 만드는 방식이다. 또는 느릅나무 껍질을 말려 가루를 낸 것으로 쌀과 섞어 죽이나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도토리 가루나 메밀가루와 섞어 전병(煎餠, 부꾸미)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온달산성과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삼국사기'

온달산성은 1979년 국가사적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온달산성이 위치한 본래 산 이름은 성산(城山, 454.5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산은 “영춘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이곳에 성황사(城隍祠)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지금은 온달산성 올라가는 입구 왼쪽에 ’성황당‘이 자리한다. 온달산성을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표기하였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5백 23척이고, 높이가 11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石築。周一千五百二十三尺,高十一尺。內有一井,今半頹圮)”고 하였다. 실제로 성 둘레는 685m이고, 높이가 5m 정도이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온달산성의 측정 기록의 척尺은 대략 1척에 45cm에 해당한다. 온달산성의 동문을 통과하여 남문으로 오르는 지점에서 산꼭대기인데도 불구하고 지하수가 올라와 지표면이 젖어 있어서 충분히 우물이 있었을 연유(緣由)를 알 수 있다.

구한말의 명문장가인 창강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온달전의 문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조선 5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이다”라고 격찬하여 후세 사람이 다시 「온달전」을 찾아 읽는 계기를 제공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온달전」의 수록 의도는 충(忠)과 효(孝)와 신(信)을 강조하는 왕조 시대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하다. 국가의 고심을 풀기 위하여 출전하여 목숨을 바친 충성심과, 눈먼 노모를 봉양한 효심과, 탈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죽자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듯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신의에 찬 면모를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심어 왕조의 가치관을 넓게 펼치고자 하였다.

온달산성 현황도 1. 동문, 2. 북문, 3. 남문(구인사 방향으로 산림경관거점 역할), A : 정자, B : 송림, C: 조망경관거점 ⓒ네이버 지도
온달산성 현황도 1. 동문, 2. 북문, 3. 남문(구인사 방향으로 산림경관거점 역할), A : 정자, B : 송림, C: 조망경관거점 ⓒ네이버 지도

보은의 삼년산성이 매끄러운 잘 만들어진 도회지 같은 분위기라면 온달산성은 깊은 청산에 위요된 청정 산수의 청량감을 안겨준다. 더군다나 산성의 꼭대기 남문에서 구인사 방향의 소백산 줄기를 바라볼 때 봉우리가 만들어 내는 부드러운 곡선의 ’스카이라인‘은 마치 연꽃이 피는 듯 규모와 비례가 적합하게 모여 신비한 산림경관거점을 제공한다. 특히 산성의 남문 근처에 세운 계단이 두 곳에 있는 규모가 큰 정자는 앞으로 어떤 기능과 역할로 콘텐츠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을 모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산성 정상 남쪽 꼭대기에 커다란 둔덕을 이루며 북쪽으로 이어진 산성의 꿈틀대는 기운 위에 식재된 소나무 군락이 온달산성의 모든 경관을 압도할 정도로 맑은 기운을 뿜는다. 그 맑은 기운으로 온달산성의 시경을 남긴다.

솔바람 숲에 눕다

온형근

북저남고의 비스듬한 고구려풍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풍우는 활짝 열린 하늘을 수놓으며 고스란히 솔숲 바람에 미끄러진다. 남쪽 성벽의 단애 굽어보다 어질하다. 동문을 통해 남문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서서 두려움은 헤실거리며 풀린다. 성채 안쪽 짙은 그늘을 따라 올라가며 도열한 둥근 강돌의 석환石丸. 제각기 속살로 파고든 접선은 치안을 담보하였다.

애틋하여 그리워하는 정 흠뻑 담아 잘 만든 콘크리트 정자, 사모정까지만 오르고 말 것을. 조남익 시인의 '온달장군을 위한 진혼곡'을 읽고 나니 시인과 각자와 시주의 묘합이 담대함을 솟구친다. 단숨에 달려 오르는 남한강 북풍에 탑승하여 훌쩍 산성 안을 사뿐히 걷는다.

말 부려 뛰고 달리면 말의 무릎이 쉬 닳을까. 급정거와 발진을 이겨낼 재간이 있을까. 가장 높직한 남쪽 꼭대기 소나무 군락에서 굽어살핀다. 기울기 열어젖트리는 하단, 두 개의 계단을 갖춘 누정은 무심하다. 오로지 생기발랄한 산성 중앙을 돋움새김한 낮은 구릉 언덕이 동과 서를 사이좋게 나눈다.

북에서 남으로 굵직한 돌무더기와 흙살로 판돈 삼은 건 소나무 굵직한 줄기의 귀갑龜甲이다. 천년의 배포를 두르고 다시 오백 년을 별첨한다. 고깔 솟아난 가운데 줄기 어드메 솔숲 바람에 눕는다. 태화산 줄기 남한강으로 달려올 때, 아침 햇살 눈부심은 주변 산의 읍배揖拜, 포갠 손 놓치지 않게끔 호소하듯 풍광에 새긴다.

-2023. 11. 24.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태화산과 영춘 – 산성 내의 소나무 군락지가 길게 이어져 생동감을 부여함 (2023.11.20.) ⓒ온형근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태화산과 영춘 – 산성 내의 소나무 군락지가 길게 이어져 생동감을 부여함 (2023.11.20.) ⓒ온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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