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산수(四郡山水)라는 버킷리스트

온형근 문화유산조경 박사
온형근 문화유산조경 박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 번 다녀와야 하는데….”를 연발하였다는 것이다. 영남이나 호남의 사대부에게 ‘사군산수(四郡山水)’ 또는 ‘사군강산(四郡江山)’은 더욱 특별하였다. 탐승지로서의 신비한 풍모를 보고 싶어 한시바삐 나서고 싶었던 곳이다. 사군(四郡)은 제천, 청풍, 단양, 영춘을 말한다. 서로 인접하여 대부분 암벽 산으로 이루어진 궁벽한 곳이어서 함부로 찾아들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암벽 산 주변으로 남한강의 비경이 곳곳에서 넘실댄다. 암벽에서 뿜어나오는 화기(火氣)를 강물의 수기(水氣)가 휘감아 품어 아늑한 풍광을 만든다. 기어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475년 전(1548, 명종 3), 청풍에서 단양 향교까지 10㎞의 춘광(春光)을 미음완보(微吟緩步)1)하며 「단양산수가유자속기」2)라는 유람기를 남긴다. 퇴계의 ‘단 하루’ 유람기는 이후, 조선의 내로라하는 강호의 시인묵객으로 이어져 환호를 자아낸다. 탐승 안내 지침서가 된다. “산수를 등지고 살았다고 부끄러워하고(半生堪愧北山靈), 구름에 깃든 학처럼 청산을 거닐고 싶다(在山願爲棲雲鶴)”는 등 사군에서 퇴계의 시경(詩境)은 조선의 후배 문인들을 도저히 방구석에 머물 수 없게 하는 지령이었다.

사실 ‘사군산수’의 시작은 퇴계 이전에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에 의해 경승지로 뚜렷한 계기를 만든다. 구담(龜潭)과 옥순봉(玉筍峯) 일대의 장회나루 협곡을 ‘단구협(丹丘峽)’이라 명명하고 “열 걸음 걷다가 아홉 번 뒤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절경(廻首如別佳人,十步九顧)”3)이라 노래하였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구담과 도담(島潭)을 탐승하면서 청풍 팔영루(八詠樓)의 편액을 썼다.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權尙夏, 1641~1721)는 상선암(上仙巖)을 새로 명명4)하여 후일 사군 유람에 나선 이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장소로 의미를 더했다. 어디 그뿐이랴, 사군에서도 가장 은밀하게 숨겨 놓은 비경 중의 비경, 사인암(舍人巖)의 기이함은 어찌할거나. 단양의 사인암(舍人巖)은 명승 제47호이다. 사인암은 고려시대 역동 우탁(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 있을 때 이곳에 와서 즐겨 유람하였기에 사인암으로 이름하였다. 우탁이 배를 띄워 노닐어 지금도 배를 묶은 석혈이 있다고 학사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학사선생문집」 권1의 「운암삼절」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5)

‘사군산수’ 중 사인암을 다녀왔다. 사인암은 계절에 따라 운치를 달리한다. 여름 사인암은 늘어난 인파와 더불어 명승의 가치를 제대로 구사한다. 눈 내린 겨울의 고즈넉한 운치 또한 남다르다. 봄과 가을의 사인암은 계절의 감흥을 고스란히 감싸서 오래도록 그리운 풍광으로 자리한다. ‘조경기술사’이며 매일 만나는 우리식물 이야기의 저자인 한국조경신문 김부식 발행인도 가을의 사인암 풍광을 찾았다. 내가 사인암 원고를 준비하는 것을 듣고는 직접 그린 귀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사인암을 그린 많은 그림 중에 그래도 이 시대의 조경계를 이끄는 영원한 현역인 김부식 대표의 「단양 사인암」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김부식, 단양 사인암, 600×450, 2020년 10월 1일
김부식, 단양 사인암, 600×450, 2020년 10월 1일

사인암의 붉은 기운 도는 암벽 바위 색깔의 특색을 잘 표현하였고 가까이에서 관찰한 듯한 바위의 수직절리와 판상절리를 잘 묘사하였다. 화면 가득히 사인암을 배치하여서 한 눈에 훅 들어오는 웅장한 기개가 엿보인다.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는 51세(1796년, 정조 20)에 사인암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병진년화첩6)은 보물 제78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김홍도, 「사인암도」, 병진년 화첩 366×267, 1796년, 리움 ⓒ온형근
김홍도, 「사인암도」, 병진년 화첩 366×267, 1796년, 리움 ⓒ온형근

조경가가 그린 사인암과 조선의 최고 화가의 사인암을 함께 감상한다. 김부식의 「단양 사인암」에서는 암벽의 골격미가 도드라지고 소나무가 한결 풍요롭다. 김홍도는 세밀한 선으로 묘사하여 사실성을 높였다. 암석의 색조와 분위기는 화면에 물을 칠해 마르기 전 채색하여 몽롱한 맛을 내는 미세한 선염(渲染)으로 표현하였다.

사인암은 여전히 비경(祕境)인가?

사인암은 이제 명승으로 지정되어 찾는 이가 더 많아졌다. 이재용(2018)의 「명승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한 조사 및 계획 항목의 도출에 관한 연구」를 보면 명승 정비 계획에서 다루는 항목은 주변 지질 조사 등, 주변 자원 연계 프로그램 코스 개발 등, 역사적 건축물 등으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명승의 유형 분류는 체계적인 틀이 안착하도록 종합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항목 도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7) 단양의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사인암은 명승 지정 이전에 이미 대중에게 널리 비경으로 알려졌기에 주변 관광 자원과 연계한 프로그램 코스 개발 정비 항목 유형에 해당한다.

사인암은 수직과 수평의 파동이 서로 부딪친다. 마주친 파동의 울림이 덕절산(780.6m) 줄기의 깎아지른 듯한 남조천 담수에 머물며 공명한다. 사인암의 기세는 맑은 물에 충분히 담긴다. 머금은 물이 적으면 사인암의 기세에 눌린다. 사인암의 크기에 비해 담긴 물이 드넓으면 사인암의 기세는 울림이 없다. 딱 지금 크기의 물 흐름과 머무름이 미학적으로 감동의 공간감을 자아낸다. 강한 기세의 사인암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담아내기에 역동적이며 고아(古雅)한 신인묘합(神人妙合)의 미적 이상에 닿는다. 행위로는 풍류와, 시각적으로는 멋과, 심리적으로는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으로 자연과 인간의 유희적 상생 관계를 성립한다.

충청의 남한강을 읊은 선비의 시는 ‘호서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책이다.8) 여기에 사인암을 읊은 시는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사인암」으로 시작하여, 고성겸(高聖謙, 1810~1886)의 「단양 사인암」,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사인암」,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사인암」, 신승구(申昇求, 1850~1932)의 「사인암 용축중운증주인성아」가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사인암을 제목으로 하는 시는 더 많다. 그중에서 완당전집 제10권에 수록된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사인암」을 읽는다.

     괴이하다 한 폭 그림 하늘에서 내려왔나 / 怪底靑天降畫圖 괴저청천강화도

     범속한 정과 운은 털끝 하나 없군그래 / 俗情凡韻一毫無 속정범운일호무

     인간의 오색이란 본시가 한가하고 느긋한 것 / 人間五色元閒漫 인간오색원한만

     촉촉이 젖은 붉고 푸름 정말로 격 밖일세 / 格外淋漓施碧朱 격외임호시벽주

     -김정희, 「사인암」, 완당전집 제10권 / 시, 한국고전종합DB.

사인암 암벽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림이다. 그야말로 신의 필치로 그려진 그림이다. 한가하고 느긋한 암벽의 색상으로 물기가 촉촉이 젖어 붉은 듯 푸른 듯 그야말로 그림의 격식이나 관례에서 벗어난 선계의 영역을 그렸다. 김정희는 사인암 자체를 예술적 필치의 그림으로 승화시킨다. 한만(閑漫)은 한가하고 아주 느긋한 상태를 말하고, 임리(淋漓)는 흠뻑 젖어 뚝뚝 흘러 떨어지거나 흥건한 모양을 말한다. 사인암의 색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암벽이 젖어 있는 붉고 푸름이 주는 풍광에 흠뻑 빠졌다.

사인암과 운암 사이를 오가며 정원문화를 누린 사람들

서문택(徐文澤, 1657~1706)의 「사군별곡(四郡別曲)」은 풍류와 선계(仙界)의 감흥이 잘 묘사된 전체 260구의 장편 기행 가사이다. 남한강이 시작하는 영춘과 단양, 제천, 청풍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었다. 그중 사인암과 운암을 오가며 풍류의 경관 미학을 펼친 부분을 찾아 읽는다.

반갑다 舍人岩(사인암)은 하늘의 들려시니 / 金冠玉帶(금관옥대)로 上皇(상황)의 뵈는쟉가 / 雲岩(운암) 져 世界(세계)는 幽僻(유벽)도 하나이나 / 山人窮士(산인궁사)의 氣像(기상)이 다 다르니 / 靑雲白雲(청운백운)이 어느야 놉닷말고.

-서문택, '금강산·사군유산기'9), 민속원, 2001.

사인암은 하늘에 매달려 있다. 마치 금관옥대를 한 황제를 뵙고 있는 듯 사인암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다. 속세를 벗어난 깊숙하고 한적하며 구석진 ‘유벽(幽僻)’한 곳이다. 사인암을 보고 운암(雲巖)으로 향한다. 이처럼 사인암과 운암은 서로 오가며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운암이 내는 분위기는 딴 세상이다. 산에 사는 곤궁한 선비에게서 남다른 기상이 보인다. 이곳 수운정(水雲亭)의 이름처럼 청운과 백운이 머무는 곳이다.

운암 오대익(吳大益, 1729~1803은 운선구곡(雲仙九曲)을 설정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오대익의 「운선구곡가」에서 사인암은 7곡에 해당한다. 사인암은 “칠성탄(七星灘)에 닿아있으며, 백 번을 돌아보아도 싫증 나지 않으니, 세상의 시와 그림이 어찌 이를 능가할까(世間詩畵那能此). 오직 못 가운데 달빛이 청아할 뿐(唯見潭心月色寒)”이라고 노래하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790년(정조 14)에 ‘단양산수기’를 남겼다. 남인의 선배인 오대익을 언급하였다. 오대익은 신선의 풍모를 지녔는데, 사인암에서 ‘신선이 학을 타는 놀이’인 ‘선인기학지유(仙人騎鶴之遊)’를 하였다는 것이다.

바위의 이름을 물으니 '사인암(舍人巖)'이라고 했다. 아, 이것이 이른바 사인암인가. '사인암'이라면 이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승지(承旨) '오대익(吳大益)'이 이 바위 꼭대기에서 나무학(木鶴)을 타고 백우선(白羽扇: 흰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을 잡고 밧줄을 소나무에 붙들어 매고 노복 두 사람에게 서서히 놓으라고 하여 맑은 연못 위에 내려왔는데, 그것을 부르기를 ‘선인(仙人)이 학을 타는 놀이(仙人騎鶴之遊)’라고 하였으니, 역시 기이한 일이다.

정약용, 「단양산수기」, 다산시문집 제14권/기, 한국고전종합DB.

오대익의 신선 풍모를 정약용은 더 세밀하게 묘사한다. 좋은 기운이 있는 혈처에서 수련하고 운암과 사인암 사이를 오가며 노닐다 벼슬을 하였고, 그 후 다시 단양으로 돌아가 단약을 고며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나이가 71세(壽宴, 1799)인데도 얼굴에서 화사한 빛이 돌고 흰머리를 보면 그대로 신선과 같았다고 오대익을 특별한 기인으로 서술하였다.

전 병조 참판 오공(吳公-오대익)이 젊었을 적에 단양을 찾아 굴혈(窟穴)로 삼고 일찍이 윤건(綸巾)과 우선(羽扇) 차림으로 검은 학과 흰 사슴을 타고 운암과 사인암 사이를 노닐다가 중년에 나가 벼슬하여 금화전(金華殿)에 오르고 옥당(玉堂)에 들어가며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쳐서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다. 만년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가서 단약(丹藥)을 고며 초년에 일찍이 하던 일을 다 수행(修行)하여 지금 나이 71세인데, 그 화사한 얼굴, 흰머리를 바라보면 신선과도 같다.10)

-정약용, 「병조참판오공대익칠십일수서」, 여유당전서 제1집시문집제13권 문집/서, 한국고전종합DB.

벼슬과 은거를 과장 없이 누린 오대익은 도교적 풍모와 수련을 계속한다. 현학과 백록을 거느리고, 단약을 다려 연단하여 화사한 얼굴을 지닌다. 오대익은 벼슬하던 중년 이전에, 사인암에서 가까운 운암(雲巖)이라는 명승지에 수운정(水雲亭)을 경영하였다. 「운선구곡가」 3곡이 수운정이다. “파자(巴字)로 물 흐르고 바위는 배와 같은데(三曲巴流岩似船)”라고 수운정의 주변 경관을 표현한다. ‘파자’는 오늘날 ‘S자’라고 보면 된다. 물 흐름이 태극 문양의 중앙분할선 모양이라는 말이다. 운암이라는 거대한 풍광의 바위를 휘돌아 감아 흐른다는 말이다. “서에 옹의 정자 그 옛날 어느 때에 있었나(崖翁亭閣昔何年)?”라고 말한다. 이 기막힌 풍광을 먼저 발견한 것은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다. 임진왜란으로 버려진 정자를 왕에게 받은 호피 한 장으로 매입하였다. 후에 무너진 것을 오대익이 중건한 것이다. “신선은 한 번 비웃으며 구름에 앉아서(仙人一笑雲中坐), 머리 돌려 속세를 바라보며 가련하게 생각한다(回首紅腐乙可隣).”라고 읊었다. 오대익의 수운정 경영이 그의 신선 같은 풍류의 유유자적한 삶을 대변하고 있다. 지금 이곳 수운정 터는 주인이 바뀌면서 2002년 가족 납골묘가 자리하였고, 주변으로 철제 울타리를 둘러서 출입을 금한다. ‘사군산수’ 관련 시문을 보면, 조선의 사대부에게 운암은 사인암의 명성보다 먼저 이름을 드높이던 명승지였다.

운암(雲巖)과 파류(巴流)형 물굽이, 그리고 수운정(水雲亭) 터 ⓒ한국관광공사
운암(雲巖)과 파류(巴流)형 물굽이, 그리고 수운정(水雲亭) 터 ⓒ한국관광공사

오대익 이전 세대인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단구일기를 보면 “사인암은 운암에서 수백 보 떨어졌다고 하면서도 수소문하여 유람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西望數百步。有舍人岩。不足搜覽)”. 사인암보다 운암을 더 찾은 것이다. 수석이 아름다운 운암에 도착하니 물가의 큰 바위 옆에 노송이 있고 두견화가 피어 이곳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술자리를 가졌다고 기록하였다.11)

입 벌린 석문 위 동천의 평평한 터에 서벽정을 짓다

사인암에는 수없이 많은 바위 글씨가 새겨졌다. 워낙 많은 이름이 새겨져 한결같이 명승지의 수려한 암벽의 기운이 이름에 담아지기를 기원한다. 조선 최고의 경관 미학자로 최다 탐승 실천자인 옥소 권섭(權燮, 1671~1759)은 사인암을 총석정의 바위와 같았지만 밝고 빼어남은 총석정보다 낫다고 비슷함과 다름의 경관 비교를 한달음에 서술하였다. 12) 특히 단양은 단릉 이윤영(李胤永, 1714~1759)과 능호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우정과 풍류로 오래도록 언급되어 단양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1753년 늦봄, 구담에 ‘창하정(蒼霞亭)’을 세우고, 1753년 한겨울(仲冬)에 사인암에 ‘서벽정(棲碧亭)’을 세웠다. 그중 사인암 서벽정에 관한 민우수(閔遇洙, 1694~1756)의 기문은 다음과 같다.

사인암에서 약간 서쪽으로 10여 보를 옮기면 입을 벌리고 열려 있는 석문이 있다. 여기서 위로 올라 꼭대기에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암벽이 둘려 동천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棲碧亭’이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자리는 청연암의 ‘삼성각’이 자리한다.(2023.11.20.) ⓒ온형근
사인암에서 약간 서쪽으로 10여 보를 옮기면 입을 벌리고 열려 있는 석문이 있다. 여기서 위로 올라 꼭대기에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암벽이 둘려 동천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棲碧亭’이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자리는 청연암의 ‘삼성각’이 자리한다.(2023.11.20.) ⓒ온형근

사인암에서 약간 서쪽으로 10여 보를 옮기면 입을 벌리고 열려 있는 석문이 있다. 여기에서 위로 걸어 올라 꼭대기에 이르면 돗자리처럼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암벽이 둘려 있어 동천(洞天)의 모습을 띠고 있다. 친구 이윤지가 이곳을 찾아내어 작은 정자를 짓고 “서벽(棲碧)”이라 명명하였으니, 이백의 시어에서 취한 것이다. 사인암은 사군(四郡)의 명승지 중 하나여서 온 나라에 소문이 나 있지만, 서벽정은 윤지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으니, 또한 기다림이 있었던 듯하다. 윤지가 내게 짧은 기문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해달라고 청하니, 이때는 계유년(1753) 중동이다.

-민우수, 「이윤지단구이정기」, 정암집 제9권 /기, 한국고전종합DB.

‘윤지’는 단릉 이윤영의 자(字)이다. 이윤영도 오대익과 비슷한 시기에 도교 성향의 글과 자취를 남긴다. 민우수의 정암집에 기록된 이윤영이 지은 2개의 정자는 그 위치 비정이 매우 선명하다. 사인암의 서벽정 자리는 지금 청련암의 ‘삼성각’이 자리한다. 민우수는 구담과 사인암 두 곳에 이윤영이 정자를 구축한 내용을 기문으로 남겼다. 창하정은 가은산(562m) 아래 터를 잡은 작은 정자로 구담과 마주하게 지었으니 지금의 ‘성골선착장’ 근처로 비정한다. 서벽정은 지금의 삼성각 자리에 작은 정자를 지어 동천13)의 풍류를 즐겼다는 것이다. 이윤영은 사인암을 운화대(雲華臺), 서벽정을 운화정(雲華亭)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신선세계에 대한 그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의 친구 이인상 역시 도교에 심취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나이는 이인상, 이윤영, 오대익 순이지만, 적멸은 이윤영, 이인상, 오대익 순이다. 연치는 오대익(75), 이인상(51), 이윤영(46)으로 오대익이 오래 살았다. 이들이 살던 18세기 단양은 그야말로 신선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정원문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읽고 경관을 평론하는 일을 지속해서 수행한다. 되도록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고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이번 명승 사인암에서의 경우처럼, 기록이 분명한 ‘서벽정’의 장소 비정과 복원은 절실하다. 아울러 구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터에 구축한 ‘창하정’도 같은 맥락에서 복원함이 마땅하다. 사인암을 대상으로 한국정원문화를 서술하면서 ‘운암’과 ‘수운정’이 늘 함께 따라다니는 추체험을 한다. 옛사람의 탐승 경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뚜렷하게 확인한다. 사인암과 운암을 오가는 경로를 새롭게 정비하고 서벽정과 수운정의 역사문화경관을 되살린다. 이것은 무궁무진한 ‘단양문화유산’ 자원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묘합으로 되살리는 실천이다. 최소한 변천 과정을 기록한 안내판이라도 조속히 제자리에 조화로운 디자인으로 시설하는 것이 마땅하다.

구월의 한 날, 훌쩍 다녀간 사인암의 새벽을 만난다. 넋을 잃거나 허한 마음의 빈 줄마저 단단히 여미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사인암을 여기 펼친다.

 

사인암 / 온형근

청련암 출렁다리에서 나는,

금긋듯 가로로 세로로 차곡차곡

사인암 각진 마음 따라가며

슬쩍슬쩍 그어 나가는 동안

넋을 잃거나 허한 마음의 빈 줄

흔들리지 않았다.

사인암 꼭대기 떡하니 모신 우람한 바위

각진 근육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떠날 채비

무겁게 올라탄 저 심사가 사인암일 듯

대흥사 의병의 봉기를 닮아 꽉 쥔 주먹

앙다문 노기를 물 깊은 사선대 너른 물 마당에 푼다.

사선대 너럭바위 올곧게 층진 우람 위로

바람 일어 남조천 물결 낮은 파란 일고

황정산의 한숨과 수리봉의 날갯짓이 키운

사인암 암벽 틈새로 진흙 알갱이 딛고 소나무

세상의 풀 죽은 기개는 잊으라고

맑은 초록으로 한꺼번에 들고일어난다.

물도 암벽도 소나무도 새파랗다.

 

-2023.09.12.

1) 작은 소리로 시를 외우거나 나직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뜻하는 미음(微吟)과 느리게 걷는 것을 가리키는 완보(緩步)가 합쳐진 말이다. 주로 자연 속에서 풍경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리킨다. 같은 뜻으로 소요음영(逍遙吟詠)이 있다. 정극인의 「상춘곡」에 미음완보가 27행, 소요음영이 15행에 나온다.

2) 이황, 「丹陽山水可遊者續記」, 퇴계집, 퇴계선생문집 권42/기, 한국고전종합DB.

3) 김일손, 탁영집 권3, 「이요루기(二樂樓記)」. “이러한 절경으로서 아무런 이름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서 비로소 단구협이라 이름하였다. 단구협으로부터 동쪽을 향하면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았다. 10 리를 가면 산협이 끝나는데 마치 아름다운 아가씨와 헤어지는 듯이 열 걸음에 아홉 차례나 돌아보곤 하였다(惜絶境之無稱, 肇名之曰丹丘峽. 由峽而東, 山益奇水益淸. 行十里峽盡, 廻首如別佳人, 十步九顧).”

4) 하선암은 이황이, 중선암은 김수증이, 상선암은 권상하가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5) 김응조, 학사선생문집 권1, 「운암삼절병서」, “禹祭酒 爲舍人時常來賞 故名云.”, “禹祭酒因漲船遊。今有維舟石穴云.”, 한국고전종합DB.

6) 김홍도필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은 총 20면으로 된 366×267 크기의 화첩이다.

7) 이재용, 「명승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한 조사 및 계획 항목의 도출에 관한 연구」, 문화재, vol. 51, no. 3, 2018, pp. 91–92.

8) 호서문화연구소, 충청의 남한강을 읊은 선비의 시, 조율, 2017.

9) 서문택은 송시열의 문인이며, 금강산·사군유산기는 1705년 금강산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4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문이다.

10)前兵曹參判吳公, 少日得丹陽爲之窟, 嘗以綸巾羽扇, 騎玄鶴驂白鹿而游敖於雲巖舍人巖之間. 中歲出而仕, 躋金華上玉堂, 歷揚內外, 位至亞卿. 晚年復歸丹陽, 藥爐丹竈, 悉修其初 年之所嘗爲, 年今七十一, 韶顏白髮, 望之若神仙中人.

11) 김창흡, 「단구일기」, 삼연집 제27권/일기, 한국고전종합DB.

12) 권섭,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민속원, 2008, p.118.

13) 동천은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비롯된 말이다. 동천은 ‘하늘에 통하는’ 길상(吉祥)의 장소로서 천상의 이상 세계로 나아가는 입구이자 통로이다. 복지는 재난을 입지 않고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도교 적 수행에 적합한 ‘복된 땅’을 말한다. (최원석,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한길사, 2014, 39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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