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매주 취재 답사 대상지를 인연 닿는 대로 떠올린다

매주 취재 답사 대상지를 떠올린다. 계획으로는 시서화를 비롯하여 구곡 팔경, 풍수, 유불도, 산수 유람, 아회(雅會), 정치, 행정까지 아우르는 한국정원문화를 다룰 참이다. 그 첫 번째가 작년에 다룬 ‘한국정원문화 향유론’이다. 두 번째로 ‘시경(詩境)으로 본 한국정원문화’를 설계하였다. 내가 시작하여 방향을 개척하면 기존 연구자도 자신의 연구 영역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내 주변에 한국정원문화콘텐츠를 생산하려는 분들이 많다. 여기에서의 생산은 온고창신(溫故創新)의 재생산이면서 구조화된 창조와 맥을 같이한다. 생각은 글을 쓰면서 정리한다. 생각만으로는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 전범을 매주 즉흥(卽興)으로 취재 답사 대상지를 떠올리면서 시도한다. 물론 다녀온 곳 모두 글로 살아나지는 않는다. 아무리 많이 다녀 왔던 데라도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는다. 이미 여러 번 왕래한 곳이 대다수다. 그래서 원고를 송고하고 나면 곧바로 답사지를 찾는다. 억지로 정해 놓은 게 아니라 물 흐르듯 이끌리며 꼴리는 대로 답사 대상지를 정한다.

대학 후배 종덕이가 본인의 정년을 앞두고 "형수님과 함께 제주 오셔서 한 바퀴 답사하시죠."라며 제안하기에 앞뒤 재지 않고 다녀왔다. 첫날 방선문(訪仙門)과 정방폭포를 들렸다. 반갑게 만난 후배에게 이런 말을 나누었다. “마사회 제주 렛츠런 같은 곳에서 ‘학예직’을 한 팀 정도 채용하여 제주의 말 문화 곧 ‘한국의 말 문화’를 삼삼하게 끌어 올려야 하지 않을까?"라고 정색하면서 운을 떼었다. 아마 공기업의 인사 채용 문화는 당대의 임원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아주 혁신적인 조치가 아니면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방폭포의 물보라와 석양을 배경으로 피어오르는 무지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축구 국가대표 출신 ‘신상근’이 운영하는 '서귀포 흑돈'에서의 저녁 시간은 최고의 맛이었고 아직도 꿈만 같다. 그와 나는 52년 전 의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같이 축구 선수를 하였다.

제주 토박이인 이한우(1823~1881)의 영주십경(瀛州十景)은 “성산출일(城山出日)-사봉낙조(紗峯落照)-영구춘화(瀛邱春花)-정방하폭(正房夏瀑)-귤림추색(橘林秋色)-녹담만설(鹿潭晩雪)-영실기암(靈室奇巖)-산방굴사(山房窟寺)-산포조어(山浦釣魚)-고수목마(古藪牧馬)”의 10경이다. 이한우의 영주십경 시는 후인들에게 제주를 대표하는 경관으로 이어지면서 제주 경관을 시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풍광으로 자리잡는다. 이한우의 영주십경에 ‘용연야범(龍淵夜帆)’과 ‘서진노성(西鎭老星)’이 보태져서 오늘날의 ‘제주 십이경’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이한우 유적비는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의 신촌초등학교 앞에 ‘매계이선생유적비’로 세워져 있다. 영주십경 중 영구춘화는 ‘명승 제92호 제주 방선문’이고, 정방하폭은 ‘명승 제43호 정방폭포’이다. 녹담만설은 ‘명승 제90호 한라산 백록담’이고, 영실기암은 ‘명승 제84호 영실기암과 오백나한’이다. 산방굴사는 ‘명승 제77호 산방산’으로 지정되어 운영 중이다. 이외에도 이한우의 영주십경은 천연기념물 등으로 제주의 빼어난 문화 유산 경관을 대표한다.

 

(좌) 매계 이한우 유적비가 있는 신촌초등학교(구글맵), 1-유적비 위치, 2-초등학교 본관 건물 (우) 제주 신촌초등학교와 매계선생유적비 위치도, A : 대섬(죽도)이다., ⓒ구글어스
(좌) 매계 이한우 유적비가 있는 신촌초등학교(구글맵), 1-유적비 위치, 2-초등학교 본관 건물 (우) 제주 신촌초등학교와 매계선생유적비 위치도, A : 대섬(죽도)이다., ⓒ구글어스

 

 

제주 토박이 이한우에 의한 제주 풍광의 기록-영주십경

영주십경(瀛州十景)에서 5개의 경관이 오늘날 제주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그중 제일 먼저 지정된 곳이 명승 제43호인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이다. 정방폭포의 지정일은 2008년 8월 8일이다. 영주십경은 이한우의 『매계선생문집』에 실렸다. 칠언율시로 열 군데의 경관을 시경으로 읊었다. 이한우가 살았던 19세기는 격변기이다. 피폐와 문란, 항거, 열강의 진출 등의 사회적 변혁기에서 개인의 삶은 극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도전하나 낙방과 좌절로 이어진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 귀의하고 독서와 수양으로 자신을 세운다. 현실에 머물며 현실을 넘나드는 시 창작으로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견지한다.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고 제주 사회에 제자를 배출하여 한 시대의 인물을 키웠다. 그러면서 제주 ‘신천’에서 태어난 토박이로서 제주의 자연을 통하여 정체성을 확보한다. 제주의 아름다운 경관을 「영주십경시」로 품는다. 이한우의 영주십경은 토박이가 내부자의 관점에서 경관을 바라본 사례이다. 이한우가 19세기 내부자의 관점에 바라본 제주 풍광 이전에는 어떤 관점이 있었는가. 17세기의 제주 풍광에 관한 관점을 살펴본다.

17세기 제주 풍광에 대한 외부자의 관점은 제주 목사였던 이익태(1633∼1704)의 『지영록』에서 ‘탐라십경’을 들 수 있다. 시에 이어 그림까지 그렸다. “제주에 대해 본토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다.”, “제주를 순력할 때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조천관(朝天關)-별방소(別防所)-성산(城山)-서귀소(西歸所)-백록담(白鹿潭)-영곡(靈谷)-천지연(天池淵)-산방(山房)-명월소(明月所)-취병담(翠屛潭)”의 10개의 경관이다. 이형상(1653~1733) 목사는 ‘지명+경관’의 형태로 시의 제목을 삼는다. “한라채운(漢拏彩雲)-화북제경(禾北霽景)-김녕촌수(金寧村樹)-평대저연(坪垈渚烟)-어등만범(魚等晩帆)-우도서애(牛島曙靄)-조천춘랑(朝天春浪)-세화상월(細花霜月)” 등 8경이 있다. 또한 이형상은 1702년 3월 부임 후, 10월 그믐에 출발하여 한 달만에 순력에서 돌아와 화공 김남길에게 명하여 순력의 내용을 40폭으로 그려 1첩으로 장황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 하였다. 1703년 5월 13일, 제주 감영의 와선각(臥仙閣)에서 서문을 지었다. 오태직(1807~1851)은 제주 토박이로 이한우의 선배이다. “한라관해(漢拏觀海)-영구만춘(瀛邱晩春)-영실청효(靈室晴曉)-사봉낙조(紗峯落照)-용연야범(龍淵夜帆)-산포조어(山浦釣魚)-성산출일(城山出日)-정방사폭(正房瀉瀑)”의 8경을 경관 연작시로 삼는다. 이원조(1792~1872)는 1841년 제주목사로 도임한다. “영구상화(瀛邱賞花)-정방관폭(正房觀瀑)-귤림상과(橘林霜顆)-녹담설경(鹿潭雪景)-성산출일(城山出日)-사봉낙조(紗峯落照)-대수목마(大藪牧馬)-산포조어(山浦釣魚)-산방굴사(山房窟寺)-영실기암(靈室奇巖)”의 10경이다. 이중에서 이원조의 시가 이한우의 ‘영주십경’과 거의 비슷해지는 경관의 일치를 보인다.

 

(좌) 병와 이형상 제주 목사, 탐라순력도를 제작(2023.05.18. 제주목역사관). (중) 영주십경의 제4경인 ‘정방하폭’의 대상지인 정방폭포(2023.05.16..)(우) 탐라순력도의 ‘정방탐승’, 배를 타고 탐승, 폭포 위 곰솔을 강조해서 그림,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진다고 하였다.
(좌) 병와 이형상 제주 목사, 탐라순력도를 제작(2023.05.18. 제주목역사관). (중) 영주십경의 제4경인 ‘정방하폭’의 대상지인 정방폭포(2023.05.16..)(우) 탐라순력도의 ‘정방탐승’, 배를 타고 탐승, 폭포 위 곰솔을 강조해서 그림,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진다고 하였다.

 

 

사계절을 중 여름을 노래한 영주십경의 제4경 ‘정방하폭’

이한우의 영주십경은 ‘해와 달’로 상징하는 해뜨는 성산과 지는 해의 사라봉이 있고, ‘사계절’ 봄의 방선문, 여름의 정방폭포, 가을의 귤림, 겨울의 백록담이 있다. ‘제주 지형 풍경’인 기암과 굴사, 그리고 ‘제주 풍물’로 낚시와 말농장을 대표 경관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영주십경시의 창작 동기를 ‘제영주십경후’라는 시로 남겼다.

 

승경을 헤아려서 십경시를 지었지만                          시성십경경다의詩成十景景多疑

다만 호리병을 그렸울 뿐 기경은 못 그렸네.              지화형로미화기只畵荊蘆未畵奇

기이한 모습 세상 사람들 보기 어려운 경치러니      기재세인난견처奇在世人難見處

사람들이 별경이라 하는 걸 시로 그렸네.                    인칭별경화어시人稱別景畵於詩

-이한우, 「제영주십경후」, 『매계선생문집』, 97쪽

 

영주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제주를 신선이 사는 영주라고 불렀다. 제주의 뛰어난 경관을 시경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부끄럽다. 변죽만 울렸을 뿐이다. 더 뛰어나고 빼어난 기이한 아름다움을 그려내지 못하였다는 겸손이 앞선다. 사람이 찾아보기 힘들고 놓치기 쉬운 소위 ‘별경’이라고 부르는 10곳의 경관을 찾아 시로 나타냈다. 겸손의 후기이지만, 그래서 제주만의 고유와 특성을 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이한우가 처음 지어낸 풍광이 아니다.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별스럽게 부르던 그 경관을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시로 그림을 그리는 화어시(畵於詩)이다. 영주십경에서 시로 그린 제4경인 정방폭포의 여름 풍광인 ‘정방하폭’을 표현한 시경은 다음과 같다.

 

거센 폭포 우레 소리로 정방을 깨뜨리니                       급폭뇌성파정방急瀑雷聲破正房

불꽃 구름이 쏟아붓는 자주빛 안개                                염운도사자연광炎雲倒瀉紫煙光

삼복인데 눈 날리듯 청산이 서늘한                                설비삼복청산냉雪飛三伏靑山冷

긴긴 여름날 허공의 절반은 무지개 걸렸다.                 홍괘반공백일장虹掛半空白日長

잇닿은 하늘에서 곧게 떨어져 바다로 돌아가고         직도연천귀대해直倒連天歸大海

땅에 떨어져 옆으로 흘러 연못을 만들었네                  횡류낙지작방당橫流落地作方塘

마침내 비를 내려 넓은 못을 알게 하네                          내지보택종성우乃知普澤終成雨

오르고 빠지는 게 신룡의 숨은 조화일세                       진입신룡조화장盡入神龍造化藏

-이한우, ‘정방하폭’ 「영주십경시」, 『매계선생문집』

 

‘정방하폭’은 서귀포 동쪽에 있다. 바다와 연한 폭포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하늘이 망망하다. 폭포가 하늘과 잇닿아 있어서 연천(連天)의 환경이다. 하늘과 맞닿은 폭포에서 직강하로 웅장한 두 줄기 물이 거침없이 떨어진다. 떨어진 물은 잠시 연못을 이루었는가 싶더니 곧바로 큰 바다로 돌아간다. 하늘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출생과 환생의 비밀을 본 듯 하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무지개가 시점을 달리하여 허공에 절반은 걸려 있는 홍괘반공(虹掛半空)의 경관이 여기저기 서린다. 안개처럼 튀어 사방을 내리치고 있어 얼굴부터 팔목까지 서서히 젖는다. 쏟아져 내리고 바다로 되돌아간다. 바다의 신인 용의 보이지 않는 조화인 것이 분명하다. 예로부터 도력이 넘치는 비밀스러운 일은 범인이 헤아리거나 알아차릴 수 없다. 정방폭포의 여름날은 자연의 외경스러움에 몰입한다. 한참을 나를 잊는다.

천상에서 물줄기를 심는다. 정지한 줄기가 아니라 생생불멸하는 쏟아짐이다. 쏟아진다는 것은 은혜로운 베품이다. 그것도 모자라 쏟아지는 소리를 낸다. 포효일까? 점점 고막을 점령한다. 첩첩산골 몇 개를 접어 비경처럼 숨겨 둔 고산준령의 폭포는 청량하다. 푸른 숲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처럼 다른 소리가 비집어 들 여지가 없다. 우주를 찢는 우뢰였다가 운율을 갖춘 현악이다가 타악의 리듬이더니 그지없이 청량한 계곡수더라. 아니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 고요이더라. 바다를 향하여 열린 정방폭포는 오히려 고요하다. 한참을 비폭 아래 머물던 폭우소리는 이내 고요하다. 거기에는 고단한 세월이 머문다. 폭풍 일어 들어닥친 집채만한 해일이 머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뱃머리로 나와 정방의 바다를 거닌다. 노래 하나 읊는다.

 

정방 탐승 正房 探勝 / 온형근

접안接岸에 이르러서야

 

선명한 두 줄기 어둠을 환하게 밝히며

물줄기 주변 해넘이로 봉래산 무지개 영롱하니

짙은 송림은 오른쪽 물보라에 씻기어 선골仙骨로 거닐고

왼쪽 해안선 이룬 용암 절벽이 죽죽 바다로 손 내민다.

 

갈 수 없는 아득하여 고단한 연식年食을 이끄느라

눈 크게 뜨고 마주하여 환히게 웃으려고는 했을까

 

너와 나의 지난 이야기 정방正房에 다다르니

커다란 물줄기 와르르르 쏟아지는 저 시원함 앞에

뱃머리는 정방을 비껴 타원을 긋는데

풍악은 멈추고 고개를 외로 꼬더니 한곳으로 거둔다.

폭포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유하주流霞酒* 권한다.

 

그제야 인동덩굴, 찔레, 다정큼나무 향기로 보이더니

보랏빛 멀구슬나무 꽃이 곳곳에 만개한

먼나무 빨간 열매의 짙은 녹음에 골격이 물든다.

 

*流霞酒 유하주 : 신선(神仙)이 마신다는 좋은 술의 이름.

-2023.05.20.

 

쏟아지면 바로 바다이다. 이런 단촐한 여정이 또 있더냐. 폭포 아래 일정 영역을 용암의 돌밭을 만들었으니 이게 석전(石田)이다. 마음을 다스려 수양하는 석전을 두었으니 정방(正房)은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라는 훈계이다. 석전으로 배를 몰고 갈 수는 없다. 마음의 밭으로 거리를 두고 정방의 진면목을 살핀다. 풍광이란 마음의 시선으로 순간적으로 스치는 게다. 그대로 가져와 단전(丹田)에 꾹 눌러 재인다. 석전으로 거리를 두고 마음의 밭인 심전(心田)으로 이끌어 단전에 눌러 놓는다. 정방폭포는 그러라고 거기에 바다를 향하여 두 줄기로 의젓하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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