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 원림’인가 ‘백운동 정원’인가?문화재청에서는 ‘강진 백운동 원림’이라 부르며 자연유산/명승/역사문화경관으로 분류하였다. 관리자인 강진군은 이곳을 ‘백운동 정원’이라 한다. ‘백운동 원림’을 네비게이션으로 좌표 삼을 때는 ‘백운동 정원’으로 입력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명명되어 이정표로 통용된다. 그랬을 때 십중팔구 ‘설록다원 강진’이 펼쳐지는 제법 운치 있는 고개 정상쯤의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숲인가보길도 부용동 원림의 시경을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어부사시사」 40수에서 발견한다. 65세(1651년)에 창작되었음이 고산 윤선도의 연보에 기록되었다. 인생의 가장 원숙기에 접어든 54세(1640년)에 를 짓고 56세(1642년)에 「산중신곡」 18수를 창작하였으니 「어부사시사」는 이후 11년이 지난 후이다. 중국은 병자호란 이후 순치제,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이다. 프랑스는 루이14세 시대이며 베르사유 궁원이 조성되었다. 인도는 샤 자한 재위 기간으로
시경(詩境)과 화경(畫境)의 만남서석지 원림의 시경을 살피기 전에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인 '쌍계입암'을 먼저 관람한다. 영양의 입암면에 있는 입암(선바위) 주변을 그린 것이다. 바위의 골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입암 앞의 파문이 이는 격류는 기운생동하는 봄 풍광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물 건너편 둔치에서 선바위와 암벽을 올려다보는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이 보인다. 화중 인물이 올려다본 선바위와 암벽을 그렸으니 앙관(仰觀)의 시선 풍광이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화중 인물을 내려다본 둔치 뒤
시경(詩境)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고 온전한 감흥이다.시경은 시의 경지에 이르는 흥취이다. 시흥(詩興)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경치나 시정(詩情)이 넘쳐흐르는 흥취 있는 풍광을 말한다. ‘절로 시 짓고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미적 정취’인 시정화의(詩情畵意)이고 의경(意境)이다. 시흥이 고취되어 풍광을 읊는 시 창작의 경계에 도달하는 온전한 감흥이다.지난 연재에서 "일찍이 원림 공간에 걸린 대련이나 제영과 시는 ‘형상 너머의 형상’인 상외지상(象外之象)으로 의경의 공간을 표현한다. 그래
숲길이 있어 미음완보(微吟緩步)의 소요유(逍遙遊) 가능열린원림문화의 향유는 숲길로 성립한다. 숲길이 있기에 미음완보의 거닐기를 통한 소요유가 가능하다. 소요유는 원림이어서 행세한다. 그래서 윤선도(1587-1671)의 산중신곡에 나오는 임천한흥(林泉閑興)은 우주적 직관이다.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원림을 거닐면서 여유롭고 한가한 흥취에 접어드는 임천한흥의 묘사는 찾기 힘들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생명의 약동인 엘랑비탈(élan vital)의 생기발랄한 행위와 임천한흥은 교접한다. 숲길 / 온형근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
가을비가 주는 안개의 풍광은 신선이 놀다 간 흔적가을비 심하게 흔들린다. 우산대를 똑바로 세우는 게 어렵다. 산발로 흔들린다. 추분 지나면 초목에 찬 이슬이 맺힌다는 한로인데, 이 지점의 가을비는 방향을 특정할 수 없다. 수시로 흔들리는 게 바람의 항로일지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일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른다. 평일 아닌 휴일의 원림 향유는 의지와 상관없다. 들쑥날쑥 산만하다. 월요일이라는 기점에서 마땅히 진진한 의미의 변화를 꿈꾼다. 새로움은 곧 변화이고 이윽고 구태이다. 그러니 원림은 늘 변하지 않으면서 자세히 보면 지극정성의 다정
고산 윤선도의 ‘산수지벽’고산 윤선도(1587~1671)의 ‘산수지벽’은 시경, 성과 경, 출처관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산수지벽(山水之癖)이 있어 재물을 속바치며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한 고산이다. 무엇이 고산을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진 버릇이며, 지나치게 즐기는 병을 의미하는 ‘벽(癖)’에 빠지게 하였을까. 우선 원림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천천히 완만하게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로 거닐면서 시경(詩境)의 세계에 드는 행위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고산에게 시
고산 윤선도의 ‘상우(尙友)’에서 배우는 원림 행위옛 것을 가져온다. 옛사람을 배운다. 과거를 복기하고 즐기는 취향을 레트로(retro)라 한다. 회상, 추억 등을 뜻하는 레트로스펙트(Retrospect)를 줄여서 쓰는 말이다. 인류의 어떤 순간마다 복고는 물결처럼 파고를 탄다. 이내 잠잠하였다가 어느 계제에 일렁인다. 그래서 복고주의는 항상 명맥을 유지한다. 파도처럼 높낮이가 있고 물결처럼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다. 옛 것에 새로운 현대적 재해석이 더해지는 것을 ‘뉴트로(Newtro)’라
명승의 미디어 콘텐츠 노출에 따른 신화 탄생중부 지방으로 물 폭탄 쏟아지면서 침수와 수해에 예측 어려운 피해가 속출했다. 장마철 대비 배수로와 하수로, 하천 점검은 어김없이 제 때에 실시되어야 한다. 해마다 배수관 교체 등의 정비 사업이 꾸준히 거듭되어야 한다. 공공과 개인 모두 동참하는 거국적 일상의 루틴이어야 한다. 마을만들기 사업이나 정원박람회, 가든쇼 등의 보여주기식 조성비용에 진심이기보다, 만들어진 것의 유지관리에 집중하여야 한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시행으로 공공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세심한 관찰이 수반되자는 관점이
사대부의 출처관에 기록된 원림 문화사대부는 글을 읽는 선비인 ‘사(士)’와 벼슬하여 관료가 되는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사’는 은거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의 생활을 한다. 이를 ‘처(處)’라고 한다. 반면에 ‘대부’로서 조정에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는 ‘치인(治人)’을 ‘출(出)’이라 한다. 처는 수기에 들고 출은 치인에 나선다. 여기서 처
포화용수량의 원림을 수용하는 증폭된 호수면갈수기의 폭우는 급하다. 유속도 빠르다. 줄어든 저수지의 빗금을 금세 채운다. 새로운 호수풍광에 놓인다. 산비탈까지 증폭된 수면 안에 갈수기의 빗금을 간직한 채 남실거리며 찰랑찰랑한다. 원림의 열음정(悅音亭)에서 호수를 굽어본다. 숲의 나무 사이사이로 푸른 수면이 번뜩이며 일렁거린다. 원림 바깥에서 갈급한 기별 하나 접속한다. 먼발치에서 참나리 붉게 타올라 주변 사람의 얼굴이 화끈화끈 볼 발간 새악시란다.사실 갈수기를 채웠던 폭우의 며칠 동안은 몰랐다. 이후부터 원림은 계속 땡볕이었다. 바람
해남 ‘삼산막걸리 구도’와 만나다비 온다는 예보에도 감행한 전통건축 ‘수곡포럼’의 해남과 보길도 답사는 운 좋게도 우산 없이 2박3일을 마칠 수 있었다. 다녀오고 나니 물 폭탄 같은 비가 이틀을 내리 붓는다. ‘조원동 원림’의 저수지는 가득 찼다. 보에서 흘러내는 물소리가 폭포소리를 내며 급하게 흐른다. 호안에 식재된 버드나무는 물위에 공처럼 일정 간격으로 운율을 갖춘 채 줄기는 묻히고 수관만 떠있다.이렇게 비 내린 후면 해남 수정동 원림과 금쇄동 원림이 떠오른다. 비
‘열린원림문화’는 일상에서의 사띠(Sati)와 다름아니다매일 새벽 원림을 향하는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오르기 싫은 날도 있고, 유난히 꾸물대는 날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생긴다. 이런 사정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작심삼일처럼 되돌이표를 찍는다. 그래서 내 몸에 ‘인이 박이도록’ 나선다. ‘인’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몸에 깊이 밴 버릇”이라는 순우리말이다. ‘박이다’에는 &ldq
‘열린원림문화’ 향유는 우아한 거닐기새벽 일찍 어둠이 채 가시기 전 원림에 다가설 때가 있다. 아뿔싸! 벌써 내려오는 사람을 본다. 이런 기시감은 처음이 아니다. 나는 이를 불가사의라고 일컫는다. 새벽에만 생기지 않는다. 밤늦게 내가 마지막 야간 산행이라 여기고 올라서는데 부스럭 하산의 인기척을 만나면서 급하게 ‘아! 이건 정말...’라면서 혼자 중얼대는 방언. 이때의 언어는 외계어였을 것이다. 동틀 무렵 – 임천한흥.178 / 온형근 임천으로 어둑한 발걸음 헛디디지 않아방금 터
청명과 곡우 사이의 원림에서 3시간을 거닐다봄이 꽤나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다. 지난 5월5일 어린이날이 여름의 시작이라는 입하(立夏)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봄 계절을 좀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청명과 곡우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전개되는 봄 이야기이다(2022.4.15.). 초고를 쓴 시점과 이 글의 발표 즈음은 한 달여 차이가 난다. 한 달 전의 ‘계절의 풍광’을 다시 새기자는 속셈이다.한 달 전 숲은 연두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처음에는 ‘조원동 원림’의 웅크리고 앉아 되돌아보는 정자인
도시의 공간과 임천한흥(林泉閑興)의 원림 공간원림을 미음완보한다. 원림의 출발지를 ‘내원재(內苑岾)’로 삼는다. 내원재는 경사가 있어 처음부터 고도를 높인다. ‘백두고원(白頭高原)길’에 이르러 잠시 평탄해진 틈에 늘 걸쳤던 겉옷을 벗는다. 백두고원길 지나 ‘원로분지(元老盆地)’에 이른다. 원로분지에서 몸의 유연성을 즐기는 이들에게 내 모습은 뻣뻣하기만 하다. 겉옷을 팔목에 감고 지나는 과객인지라 머뭇대지 않고 스치듯 지난다. 이곳 원로분지는 원림을 향유하는 시민에게 순
진달래는 힘겨운 찬란함의 내재율을 지녔다.춘분 지나 청명이 가깝다(2022.04.02.). 이곳 원림은 진달래 활짝 피느라 분주하다. 꽃 자체는 얼마나 화려한지 모른다. 곳곳에서 군계일학이다. 그러다 다시 주변과 함께 둘러보면 단아하다. 청초하다. 검소한 것인가 싶다가 아하 저것이로구나 소박함! 아무리 추워도 향을 팔지 않는다는 매화가 진한 향내로 압도하는 가운데 숲에서 띄엄띄엄 진달래 들어섰다.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주’의 꽃이 진달래이다. 주변 숲은 아직 겨울
원림을 경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고산 윤선도는 머무는 곳마다 ‘산수치’라 자평하며 도대체 고칠 수 없는 질병처럼 ‘원림 경영’을 실천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은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흥분하고 탄복하며 감탄과 경악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자기 스스로 못 말리는 열정과 취향의 세계에 든 것임을 진단하고 이를 마땅히 ‘허허~거참’ 하면서 받아들인다. 계를 받듯 내 안의 부름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거부하지 않고 그러함이라며 자연스러움으로 치환한다. 그게 고산을 조선 최고의
‘살고자 함’은 「생의(生意)」로 집결된다.‘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음, 또는 그 마음’을 ‘생의’라고 한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말과 대등하다. 가깝게 위치한 뒷동산과 이어지는 산림을 원림으로 삼아 곳곳에 의미를 각인하는 행위 또한 ‘생의’로 이어진다. 조경에서 물리적 장소성과 내용적 콘텐츠를 경유하는 것은 설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접근 방법이다. 이는 ‘열린원림문화’ 향유의 실천 방식이
「원림 리부트」란 말을 사용하는 의미「원림」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을 지칭하는 학문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은 조원, 한국은 조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열린원림문화' 향유에서의 「원림」은 중국의 원림이 아닌 문화유산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한국정원문화와 조경 유적의 본질을 소환한다. 한국정원문화콘텐츠를 어떻게 파악하고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하여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 면에서 ‘임천’이라는 말이 매우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