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열린원림문화’는 일상에서의 사띠(Sati)와 다름아니다

매일 새벽 원림을 향하는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오르기 싫은 날도 있고, 유난히 꾸물대는 날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생긴다. 이런 사정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작심삼일처럼 되돌이표를 찍는다. 그래서 내 몸에 ‘인이 박이도록’ 나선다. ‘인’은 “여러 번 되풀이하여 몸에 깊이 밴 버릇”이라는 순우리말이다. ‘박이다’에는 “버릇, 생각, 태도 따위가 깊이 배다”는 뜻이 있다. 원림에서의 거닐기는 ‘인이 박이다’가 될 정도로 자연스레 앞장서는 지경에 도달하여야 한다.

일단 나서기가 번거롭고 마음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인이 박이게끔’ 몸이 먼저 나서게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나서서 원림 입구인 ‘내원재(內苑岾)’를 오를 때쯤이면 이미 온전하게 원림에 집중되어 사유의 몰입에 든다. 내려갈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자는 권유를 다그친다. 더 많은 시간을 원림에서 주의 깊은 관찰로 알아차림과 깨달음에 들겠다는 숲내음으로 기분이 환하다.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정갈하다. 옷매무새를 여미고 발걸음이 가뿐하다. 단정하게 정성을 쏟아 내딛는다.

원림문화는 원림이라는 대상과 내가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나누는 쌍방의 정성에 깃든다. 마치 사띠(Sati)의 수행 방식과 무척 가깝다. 사띠(Sati)는 주의 깊음, 조심스러움, 잊지 않음, 기억 등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일상의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으로 “대상에 깊이 들어가 파지하여 확립하고 마음을 보호”하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림에서 발견하는 ‘알아차림’의 대상은 가끔 해묵었거나, 때로는 매우 새롭다. 둘 다 발견이고 깨달음으로 이어져 상기된다.

이런 주의 깊은 정성으로 ‘열린원림문화’가 완성된다. 정성은 주의 깊은 관심에서 일어난다. 주의 깊은 관심은 애정의 기운으로 매료된다. 주의와 관심과 애정의 기운이 원림에 스멀댄다. 원림에서 매일매일이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이다. 일상에서의 ‘알아차림’ 수행인 ‘사띠(Sati)’의 수련까지 연마한다. 물아일체이면서 천인합일이며 신인묘합의 의경(意境)으로 이어져 영원의 담금질로 계속된다.

 

원림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닌 연결이다

원림을 소요한다는 것은 즐긴다는 것이고 원림을 통하여 나를 충족시키고 만족하는데, 사실은 이렇게 대상이 되는 원림과 뭔가를 주고 받는 개념보다는 연결이라는 개념으로 원림문화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원림에서 ‘알아차림’의 수행은 수시로 주의를 환기하며 대상과 존재를 연결한다.

망종에서 하지 즈음이면 봄에 핀 꽃들이 결실에 들어 녹색의 풋열매로 땡글땡글하다. 작년 겨울눈에 형성된 원기는 새잎과 꽃으로 모두 사용된다. 그래서 진달래를 비롯한 자유생장하는 몇몇 나무들은 새로 만들어진 원기로 하엽을 빼꼼 내민다. 작고 연하여 어린아이 볼처럼 보드랍다. 저절로 주의 깊은 관심의 눈길이 머문다. 선한 마음의 따스한 눈길이다. 이게 망종 즈음에 원림에 출현하는 하엽의 지위이다.

이즈음 원림은 꽃이 드물다. 싸리꽃을 만난다. 싸리꽃은 봄과 여름을 연결한다. 교목과 관목의 빈자리를 메운다. 망종 즈음에 만난 싸리꽃은 원림과 나를 ‘초연결’의 정체성으로 이끈다. 호모커넥투스(Homo Connectus)는 사람-사람, 사람-만물, 만물-만물이 상호 연결된 초연결자이다. 연결은 융합과 다르다. 한동안 학문의 융합을 화두로 인문학을 연금술로 삼은 적이 있으나 융합은 멜팅포트(Melting pot)로 연결은 샐러드볼(Salad bowl)로 축약된다. 융합은 용광로처럼 녹여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면, 연결은 각각의 고유 속성을 지니면서 동반 상승효과인 시너지(Synergy)를 내어 가치를 종합한다. 원림의 다양하고 고유한 속성은 융합보다 연결로 더 잘 설명된다. 내가 만난 싸리꽃만 해도 얼마나 주의 깊은 관찰에 깃든 고유한 정서이겠는가. 싸리꽃에서 얻은 ‘알아차림’의 시경(詩境)을 본다.

 

싸리꽃 – 임천한흥.192 / 온형근

 

묘둥지 어버이날 꽃바구니 놓인 임천으로

 

뻐꾸기 거니는 걸음 맞춘 탁란의 운율

그제서야 깊어진 숲 메마른 산길 한 켠

붉은 마음 주렁주렁 수줍어 울었나

 

긴 밤 동트며 머금은 눈물 열브스름하게 씻겨

보라에다 빨강마저 볼에 들어 고개 돌린

슬픔마저 스밀 수 없이 반지랍게 드리운

 

까끄라기 벼와 보리 심으라는

망종 근처 지상으로 매달린 싸리꽃

 

-2022.6.3

 

망종(6월6일) 사흘 전이다. 뻐꾸기가 끊기지 않고 울어댄다. 마치 탁란이라는 외도를 후회하듯 운율을 맞춘다. 숲은 울울창창 진해지지만 필 꽃은 마땅찮다. 그저 그렇게 잔잔하다. 두런댐도 사라졌다. 순간 산길 가장자리에 보라를 넘어선 짙은 자주색 싸리꽃이 드리웠다. 섭섭함이 주렁주렁 늘어져 붉은 마음 연하게 씻겼을까. 슬픔이 스밀 수 없도록 왁스를 발랐는지 반질반질 반짝인다. 싸리꽃을 만나 그와 내가 연결된 원림에서의 ‘알아차림’을 증험한다.

첨광대(瞻光臺) 근처 기슭을 빼곡하게 뒤덮은 애기나리 군락도 이 계절의 햇빛에 한결 반짝이며 빛난다. 하지 지나 달궈지는 계절의 원림은 싸리나무같은 연결 식물들로 식는다. 교목과 관목을 통과한 햇빛을 즐긴다. 한결 꺾인 차분함으로 격정을 다스린다. 날이 뜨거워 헉헉 찔 때일수록 원림은 더욱 시원하다.

 

싸리꽃(2022.6.2)과 문암골 계류(2022.6.12)
싸리꽃(2022.6.2)과 문암골 계류(2022.6.12)

 

 

계산과 임천의 승경을 엿보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한 장유(1587~1638)는 윤선도와 동갑이다. 서화와 문장에 뛰어난 그의 <계곡집> ‘삼매당기’에는 원림의 개념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광주(光州)는 호남 지방의 이름난 고을로써 서석산(瑞石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계산(溪山)과 임천(林泉)의 승경(勝景)이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의 생활이 넉넉한 가운데 대사(臺榭)와 원유(園囿)가 또한 많아 서로들 그 높고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삼매당기(三梅堂記)’, <계곡집> 계곡선생집 제8권, 한국고전종합DB

 

원림은 ‘계산과 임천의 승경’으로 이루어진다. ‘계산’의 조건은 계곡의 흐르는 물이다. 임천 역시 샘물이 석간수로 발현되어 뭇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숲 공간을 말한다. 그런 곳에 사방을 널리 바라볼 수 있는 누정이 지어지고 많은 개성 있는 원림이 모여들어 빼어난 풍광을 이룬다. 계산과 임천은 원림 공간을 의미하는 은사의 정원으로 표상된다. 그 안에 누정으로 합쳐 부르는 많은 ‘누’, ‘정’, ‘대’, ‘각’, ‘헌’, ‘사’가 들어앉아 비로소 시경(詩境)이 탄생한다.

‘조원동 원림’은 샘은 있지만 건천이라 계류는 없다. 공간을 문암골로 확장하면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문암골은 최치원이 전국을 유랑할 때 잠시 기거한 곳이다. 문암골 계류는 천년수, 백년수 약수터에서 물길이 발원하여 만나 계류를 이룬다. 제법 물소리가 원림의 깊이를 누리게 한다. 계류는 광교 저수지로 스며들어 임천의 신선한 기운을 보탠다. 추야대(秋野臺)에서 멀리 내려다보면 문암골 합수 지점의 전망 데크와 만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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