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대표
온형근 박사

‘살고자 함’은 「생의(生意)」로 집결된다.

‘어떤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음, 또는 그 마음’을 ‘생의’라고 한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말과 대등하다. 가깝게 위치한 뒷동산과 이어지는 산림을 원림으로 삼아 곳곳에 의미를 각인하는 행위 또한 ‘생의’로 이어진다. 조경에서 물리적 장소성과 내용적 콘텐츠를 경유하는 것은 설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접근 방법이다. 이는 ‘열린원림문화’ 향유의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하는 원림 행위를 통하여 한국정원문화콘텐츠를 되살리는 일이다. 문화유산으로 전해지는 지극한 원림 문화를 오래된 미래로 받아들여 주체적 시민의 생태 감수성으로 만끽하자는 일이다.

원림 향유에서 가장 빠르게 깨달음을 얻는 것이 생의이다. 그야말로 함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온갖 생명있는 것들의 집합체인 ‘동생(同生)’의 발견이다. 저수지를 포함하여 미음완보(微吟緩步)로 임천한흥(林泉閑興)하는 이곳 조원동 원림은 30여만 평에 이른다. 기존 산길과 수변 데크를 통과하면서 산자락을 넘나든다. 내원(內苑)이라 이름 붙인 산자락을 통과하여 외원(外苑)은 두 개의 큰 줄기로 이어졌고 흘러내린 묵직한 몇 개의 산줄기가 힘찬 기운을 담아내면서 저수지로 숨는다. 그런 곳에 단애취벽이 자리한다. 지난해 5월 중순 초입에 온갖 생명 있는 것들을 맞이한 「산중 동생」이라는 시가 ‘생의’를 드러내는 생태 감수성을 지녔기에 함께 시흥(詩興)을 나눈다.

 

산중 동생同生 - 임천한흥.052 / 온형근

 

아침 해

가끔 등졌다가 마주 서기도 해

흙살

맨발로 지기와 섞고 싶은 오르막 내리막으로

때죽나무 임천 오르는 길목으로

거꾸로 매단 종꽃이 순결하여 어둔 새벽 환하다.

 

국수나무 여전히 피고 지는

소박하여 평온한 덤불에는

생강나무와 덜꿩나무 먼 곳으로 시선 모으고

호수 한 켠 정자를 드리운 채 쪽동백나무

흰 꽃 속 노랗게 벙그는 몽울을 어쩌라고

영원히 터지지 않을 탱탱함을 두고 벙그는 민망을

 

때죽나무와 쪽동백나무 질 때쯤

호숫가로 왕벚나무 버찌가 지상으로 구르면

밟히는 소리를 어찌 낮추나 벚꽃이 선해서

임천으로 파고든 아침 햇살 한 무더기가

청미래덩굴을 티없는 광택으로 둘러싼다.

(2021.5.14.)

-다시올문학, 48호, 2021여름호, 61쪽.

 

여기서 ‘동생(同生)’은 형과 아우의 동생이 아니라 ‘함께 사는’의 의미인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한다는 외경(畏敬)스러움을 표상하고자 하였다. 곡우와 청명 사이의 이곳 원림은 흙살이 적당한 수분으로 두툼하다. 절로 지기(地氣)를 느낀다. 원림으로 오르는 초입에 순결하기 이를 데 없는 때죽나무 꽃이 종처럼 매달렸다. 새벽 이른 시간인데 어둑한 언덕길이 향기로운 바람으로 길을 이끈다. 오솔길 양옆으로 국수나무 여전히 피고 지는 순환으로 생강나무와 덜꿩나무의 신록으로 눈길이 머문다. 그러다 팔각정 근처에서 우람한 쪽동백나무의 활짝 핀 꽃향기에 발길이 멈춘다. 같은 장소를 매일 다녀도 향유의 토포필리아(topophilia)가 수시로 변화무쌍하고 새롭다.

 

쪽동백나무 '생의' 2021.5.14. 팔각정 근처(왼쪽), 생각나무의 '생의' 2022.3.18. 이고정 근처
쪽동백나무 '생의' 2021.5.14. 팔각정 근처(왼쪽), 생강나무의 '생의' 2022.3.18. 이고정 근처

 

배반하지 않는 정서적 교감인 토포필리아

공간과 장소를 새김하는 데 토포필리아(topophilia)의 개념을 빌린다. ‘토포필리아’는 ‘사물의 고유한 장소’라는 의미의 topos와 ‘사랑’을 뜻하는 philia의 합성어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적(물리·지리), 인공적(건축·사회) 환경을 익숙한 장소(place)로 만들려는 인류가 지닌 자연스러운 성향을 말한다.

김기영(2003)은 “고산 윤선도의 「남귀기행(南歸記行)」 고찰”에서 「남귀기행」이라는 기행시를 토포필리아로 파악하여 ‘정치 지향의 장소성’으로 경기도의 어떤 한 고개와 금구읍, ‘정치와 문학의 장소성’으로 장성을, ‘문학 지향의 장소성’으로 해남 본가로 파악하고 「남귀기행」에서의 토포필리아가 고산의 정치와 문학을 향한 삶의 지향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남귀기행」은 고산의 나이 25세, 성묘를 위해 서울에서 해남 연동으로 11일을 소요하는 동안의 기행시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광릉을 통과하며 해남 본가에 이르기까지 작품 전체에서 23개소의 여행 노정이 등장한다.

‘열린원림문화’ 향유가 즐거운 것은 멈추지 않고 산출되는 생산성 있는 재미에 있다. 매번 느낌이 생생하게 다르고 기분이 좋으니 그 독특한 기운이나 감정이 토포필리아로 이어져 즐거운 착상을 허락한다. 일상의 활력을 원림 공간에서 받아들여 시경(詩境)으로 치환한다. 멀리 호수 건너 중첩의 산이 보이는 곳에 대와 정자를 마련하고 줄기마다 오르내림의 고개에 재의 이름을 지어 장소성과 의미를 더한다. 미음완보에 좋은 빼어난 산길에 숨을 불어 넣는 이름을 편액하여 토포필리아로 삼는다.

그리하여 시시각각 시흥이 돋는 원림에서의 시 창작은 ‘열린원림문화’의 즐거움이고 골격을 이룬다. 토포필리아는 원림을 배경으로 어우러지는 정서적 교감이며 생명 지닌 것들이 뿜고 읽어 내는 다양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원림이라는 둘러싼 환경과 관계 맺는 정서적 교감인 토포필리아는 생태적 감수성의 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환경에 불과한 ‘공간’에 어떤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생명에 대한 사랑의 본능인 ‘바이오필리아(biophilia)’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이기에 원림에서 문화와 예술이 간헐적으로 공존하는 순간이 열리고 지속된다.

원림은 거의 매일 일정 쉬는 날 없이 이곳을 찾는 시민에게 생의를 선물한다. 아낌없이 환대하는 정서적 교감이 이십 사 절기마다 독특한 경관으로 지각되어 생기로 가득 넘친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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