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설날, 종일 흐렸다. 그리고 종일 차가운 안개비가 내려앉았다. 입자가 너무 작고 가벼워 미처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진 못하고 그대로 외투를 적시고 몸속으로 스몄다. 이런 날 여간 자학적이지 않으면 긴 산책은 즐겁지 않다. 그래서 엉터리 떡국을 한 그릇 끓여 먹은 뒤 산책을 포기했다. 그 대신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옆에 놓고 책을 펼쳤다.김훈 작가의 이라는 소설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글은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책을 아주 좋아한다. 은 이미 7, 8년 전에
[Landscape Times] 1월은 무채색의 계절이다. 아, 또 눈 얘기? 아니, 숲 얘기다. 얼마 전 오랜만에 독일 절친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그 집에 가면 그 집 큰아들 때문에 밥 먹고 나서 반드시 카드놀이를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나하고 카드놀이 해요.”라고 조르며 따라다니던 아이가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밥만 먹고 나면 카드를 꺼내온다. 이번에는 문득 “그런데 한국엔 카드놀이 없어요?”라고 묻는다. 물론 있지. 그러면서 우리의 화투를 묘사해 주었다. 실물이 없으니 기
엊그제 동지가 지났다. 동지라고 해 봐야 절기의 감흥이 없어진 지 오래다. 팥죽을 못 얻어먹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팥죽을 좋아하지 않았던 관계로 그건 별로 아쉽지 않다. 단지 겨울이 긴 나라에서 살다 보니 동지가 되면 이제 낮이 조금씩 길어지겠구나라는 작은 희망을 품는 것이 전부다.낮의 길이가 가장 짧다는 동지, 베를린에선 아침 8시 15분에 해가 뜨고 오후 3시 53분에 해가 졌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당장 낮이 성큼 길어지는 건 아니고 12월 24일, 성탄절을 맞은 오늘, 낮이 1분가량 길어졌다. 이틀 간격으로 일분 내지
[Landscape Times]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가 쓴 단편 소설 중에 이란 책이 있다. 1970년에 쓴 것으로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고 난해한 작품이어서 평론가나 문학도 외에는 아무도 읽을 수 없다는 평도 있다.필자는 우리나라의 환경평가 제도를 종종 이 소설의 제목에 비유하곤 한다. 환경평가제도 자체가 페널티킥을 앞둔 골키퍼와 같다. 이 불쌍한 골키퍼가 골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
[Landscape Times] 독일 중부에 에르푸르트(Erfurt)라는 도시가 있다. 16개 연방 주 목록을 보면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는 튀링겐 주의 수도다. 알파벳 순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제일 뒤 번호지 실제로 꼴찌는 아니다. 산 좋고 물 좋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곳. 그 고장의 수도가 이십 만 인구의 에르푸르트다. 튀링겐 산맥의 분지에 자리 잡아 언덕이 있고 사방으로 짙은 숲에 둘러싸인 관계로 경치도 수려하지만, ‘독일의 한 가운데’라는 위치가 특이하다. 실제로 독일 중심점에서 약 50km 정도 비껴있다.
[Landscape Times] 오래 전부터 하고 싶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해외 연수 가시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 여태 참았었다. 그러다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독자들과 토론할 때가 된 것 같다.지난주에 한국으로부터 아주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에서 국외연수원을 운영하는 분이었다. 모 시의원들이 도시 재생과 도시녹지시스템의 모범 사례를 벤치마킹하러 베를린을 방문할 예정인데 기관 섭외가 영 안 된다고 했다. 필자가 운영하는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를 아주 잠깐, 15분 정도만 방문해도
[Landscape Times] 지난 10월 6일, 독일 하일브론에서 173일간의 장정을 마치고 부가(BUGA)가 막을 내렸다.베를린에서 하일브론은 아주 먼 길이기 때문에 폐막식엔 가보지 못했다. 저녁 6시에서 9시 반까지 오케스트라, 합창단, 관악단, 무용단이 총동원된 다채로운 무대 프로그램이 준비되었다는 소식만 들었다. 화려한 폐막식을 예고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작은 물방울’이라는 제목으로 근사한 분수 쇼를 펼치며 막을 내리련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여러모로 하일브론
[Landscape Times] 이란 말이 있다. 새로 개봉된 무협 영화 제목이 아니고 태양에너지(일), 바람에너지(풍), 즉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관련한 신생어다. 세계화 시대에 맞춘 퓨전어로서 풀이가 다양하다. 일테면, “재생에너지가 돈이 된다는데, 아닌가?” 또는 “재생에너지 시설로 인한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요, 안해요?” 등이다.전자의 경우 재생에너지 시설을 직접 설치 내지는 운영하는 전문업체가 아니라도 일반인 누구나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는 기대와
지난주, 뜻하지 않게 파리에 갈 일이 생겼기에 간 김에 라 빌레트 공원을 다시 찾았다.십여 년 만인 것 같다.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가 출판된 이후 기회 되는 대로 책 속의 장면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일종의 현장 검증인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본격적 100장면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여의치 않기에 기회를 보아 두서없이 다닐 수밖에 없다.파리의 라 빌레트 공원은 99번째 장면이었다. 1984년 이곳에서 ‘공원 도시’라는 혁신적 개념이 탄생했다. 20세기 말 21세
[Landscape Times] 기온이 30℃가 넘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토요일. 과연 누가 강연을 들으러 올까 싶었는데 의외로 강연장이 가득 차서 의자를 더 놓아야 했다. 예정 시간 십 분 전만 해도 연사 노베르트 퀸 교수, 우정섬 공원 책임자와 나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서로 마주 보며 이거 파리 날리는 케이스인가 보다 싶었는데 6시가 되자 갑자기 청중들이 몰려들어 왔다. 알고 보니 더워서 모두 공원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시원한 그늘을 떠나 한증막 수준의 유리 강연장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
[Landscape Times 고정희 박사] 마치 전장에서 꼿꼿한 자세를 지킨 채 그대로 죽어 간 젊은 장수 같았다. 나무를 많이 보아 왔다고 여겼는데 그런 모습으로 죽어간 나무는 처음이었다. 그냥 너도밤나무가 아니다. 보기 드문 인데 근 이십 년 가까이 곁에서 보아 왔고 나름 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준 나무였기에 그 죽음에 면해 받은 충격이 여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무가 아니다. 베를린시에서 지정한
대왕의 약초밭이라니 어딘지 걸맞지 않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대왕이 쪼잔하게 약초밭에 신경을 썼나? 그런 건 부하들에게 맡기고 원정가서 적국을 굴복시켜 영토를 확장했다거나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영토확장도 했다. 대왕의 호칭을 그냥 얻어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전쟁만 하고 있다가는 민생을 어떻게 살필까.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와 건강도 같이 챙겨야 진정한 대왕이 아닐까. 소위 이라 일컬어지는 카롤루스 대왕(Carolus Magnus) 의 얘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대왕이라고 한다. 카롤
[Landscape Times] 드디어 청소년들이 나섰다. 경제성장이니 뭐니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기후변화대응에 늑장을 부리는 어른들을 보다 못해 나선 것이다. 지금 유럽 전역에서 매주 금요일이면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하고 있다. 이를 기후 ‘스트라이크’라 하다가 온라인 상에 #FridaysForFuture라는 해시태그가 생긴 뒤부터 공식 명칭이 되었다. 줄여서 FFF 라고도 한다.지금으로부터 약 11개월 전, 2018년 8월 20일, 스웨덴에서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
요즘 뮌헨 바이헨슈테판 대학 조경학과, 식물적용학 전공생의 학사 논문 한 편을 심사하고 있는 중이다. 칼 푀르스터 재단에서 격년제로 대학생 논문상을 주고 있는데 그 논문 심사위원회에 내가 속한 관계로 2년 마다 학생들 졸업논문을 읽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각 대학에 공문을 보내면 교수들이 우수 논문을 한 편 선정하여 재단에 보낸다. 3인으로 구성된 재단 내부 심사위원회에서 논문을 돌려가며 읽고 심사평을 쓴 뒤 토론회를 거쳐 최종 선발한다. 상금이 2천 유로, 원화로 환산하면 2백 5십만원이 넘는 금액이니 학생들에겐 큰 상이
[Landscape Times]소피아 여왕이 물러가고 나서 베를린 기온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6월 2일 일요일에 드디어 최고 기온 30도를 찍었다. 뙤약볕 아래서 그날 하루 베를린은 자전거가 차지한 도시였다. 승전 탑으로 향하는 방사선 형 대로는 물론 베를린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까지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날 하루만은 브란덴부르크 주 동서남북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베를린으로 몰려드는 자전거 행렬에 양보한 것이다.베를린 자전거 데모는 역사가 길다. 1977년에 처음 시작했다가 통일 이후 브란덴부르크 주로 확산했다. 브란덴부르크 주에
올해 소피아 여왕의 횡포가 유난히 심하다. 소피아 여왕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중북부 유럽에서 꽃샘추위를 그리 의인화하여 부르는 것이다. 차가운 소피아, 얼음장 같은 소피아…….수년 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바로 꽃샘추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덴마크 동화작가 엔더슨이 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디즈니 버전에선 엘사라는 이름을 부여했지만, 본명은 소피아로 알려졌다.한국 꽃샘추위가 3월, 4월에 온다면 유럽의 꽃샘추위는 느지막
오랜만에 프라이부르크에 다녀왔다.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볼프스부르크(Wolfsburg)라는 도시를 지나치게 되었다. 카날 변의 날렵한 초현대적 건축과 조경이 자른 듯 선명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볼프스부르크는 중부독일 운하에 위치한 일종의 기업도시다. 1938년 히틀러가 폴크스바겐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건설했다. 폴크스바겐 공장을 대규모로 짓고 직원들을 위한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출발했는데 지금은 인구 12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초현대적 감각의 산업-공원 복합시설을 신축하여 2000년 하노버 엑스포에
지난 4월 17일 독일연방정원박람회 2019의 막이 올랐다. 이번엔 남부의 하일브론Heilbronn 이라는 도시에서 열린다. 10월 6일 전통적인 옥토버 축제와 함께 막이 내릴 때까지 총 173일간 쉼 없이 „꽃이 필“것이다. 하일브론 시는 이번 BUGA의 모토를 „꽃피는 삶Blühendes Leben“이라고 잡았다. 얼핏 듣기에 상상력 부재의 케케묵은 구호 같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이번 정원박람회의 의도가 매우 정직하게 표현되어있다.이번에는 로 개최된다
올해는 정확하게 2월 18일에 시작되었다. 미용실에 갔는데 의자에 앉자 마자 폭풍같은 재채기가 터졌다.“엣취!”“건강! (미용사의 말. 누가 재채기하면 옆 사람이 자동적으로 건강! 이라 외치는 관습에 의거.)”“감사합니다. 엣취!”“애고 감기 걸리셨네~”“엣취! 아~ 감기가 아니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엣취!”“꽃가루 알레르기요? 지금 2월 중순인데 무슨 꽃가루가 하하하하 감기겠죠. 하하하하!&rd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오랜만에 노숙자 신문을 한 장 샀다. 중년의 여인이 무슨 사연으로 노숙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죽지 않고 씩씩한 음성으로 신문의 토픽을 낱낱이 읊어 내리는데 그중 „베를린 시 주거환경보전구역 추가 지정“이라는 대목이 흥미로워 산 것이다. 베를린의 노숙자 신문은 모츠Motz라고 하는데 격주로 발행되며 A4 크기의 반절지 24장 분량이다. 가격은 1유로 20 센트, 그중 80센트는 노숙자에게 돌아간다. 노숙자들이 직접 만드는 신문은 아니고 뜻있는 저널리스트 그룹이 만드는 것인데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