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오래 전부터 하고 싶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해외 연수 가시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 여태 참았었다. 그러다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이제는 허심탄회하게 독자들과 토론할 때가 된 것 같다.

지난주에 한국으로부터 아주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국에서 국외연수원을 운영하는 분이었다. 모 시의원들이 도시 재생과 도시녹지시스템의 모범 사례를 벤치마킹하러 베를린을 방문할 예정인데 기관 섭외가 영 안 된다고 했다. 필자가 운영하는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를 아주 잠깐, 15분 정도만 방문해도 될지 물어왔다. 흐음. 써드스페이스 환경아카데미는 기관이 아니다. 환경과 조경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위해 워크숍을 실시하는 민간회사라고 설명해 드렸는데 그래도 상관없으니 잠시 방문할 수 없는가 하고 물으신다.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노라 했다. 그냥 방문하는 건 별 의미가 없으니 오신 김에 <베를린의 도시녹지시스템과 도시 숲, 도시 재생 사례>에 대해 강연을 해 드리겠노라 제안했다. 먼 길을 오는데 뭔가는 얻어가야 하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오셨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기념품부터 꺼내 건네면서 기념촬영을 하자고 했다.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순순히 하자는 대로 했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준비했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동안 아니나 다를까 방문자들 사이에 변화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사진만 찍고 갈 생각이었는데 강연은 무슨, 하는 표정으로 시큰둥했던 분들도 서서히 강연에 빠져들며 열심히 필기하고 종국에는 많은 질문도 던졌다. 열띤 토론까지 벌어졌다. 이와 유사한 경험을 자주 한다. 본래 사진만 찍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여겼던 연수자들도 알차게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공하면 나중에 <보람 있는 연수>였다면서 뿌듯해한다. 누가 보람 있는 해외 연수를 마다할까.

연수기획사에서 근무하다가 베를린으로 유학 온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이 어떤 경위로 기관방문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공무원이나 여러 단체에서 해외 연수라는 미명 하에 외유를 다닌다고 오해 받아 비판적 여론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러자 기획사에서 해결책을 찾아 제시한 <아이템>이 기관방문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기가 찼다. 해외 기관이 관광명소인가. 방문을 위한 방문, 해외 연수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한 방문이라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게다가 이미 해외 연수 기획이 하나의 사업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눈치다.

해외 연수 자체를 금하자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개선 내지는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알리바이 형 방문은 피했으면 좋겠다. 해외 기관의 업무에도 방해가 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우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기관방문이 필요한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외교적 차원 또는 유사한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적 차원에서 정중하게 공문을 보내 서로 만남을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해외 기관의 구조 등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베를린시 관청에서는 이미 2010년경부터 외부 방문객을 사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근 20년 전부터 수많은 단체가 다녀갔는데 다녀간 뒤 관계가 지속하지 않고, - 독일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다음에 다른 팀이 와서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자료를 받아가는 일이 반복되니 보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후하게 나눠주는 자료라는 것이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여 만든 것인데 개발도상국이면 모를까 세계적으로 선도하는 산업국가 한국에서 자료 챙겨가는 것을 너무 당연한 일로 여겨 이해하기 어렵다고 수군거린다. 베를린시에서 근무하는 절친한 동료가 허심탄회하게 들려준 얘기다.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순간이었다. 뮌헨도 방문 거절이 시작되었고 그동안 매우 호의적이었던 뒤셀도르프도 슬슬 문을 닫는 느낌이다.

이번 기회에 독일의 기관원들과 전화통화 또는 이메일을 통해 소탈하게 대화를 나눠보았다. 그들의 의견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에서 (너무) 많은 방문 문의가 들어온다. 방문 오는 것은 좋은데 우리도 본래 하는 일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니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두고 문의했으면 좋겠다. 최소한 석 달 정도는 시간을 달라. 그리고 대개 연말에 몰리는데 연간 고루 분산해서 올 수는 없는가. 우리도 인력이 부족해서 모든 방문 요청에 일일이 부응하지 못하니 이해해 달라. 사실 오지 말라는 얘기를 매우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당 기관에 어떤 형태로든 도네이션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공공기관에서는 물론 금품 수수가 용납되지 않지만, 예를 들어 해당 지역의 공익단체나 환경재단 등에 대신 기부 할 수 있다. 기관원들의 서랍 속에 쌓이는 기념품보다는 그 편이 당당하고 합리적이다. 이제 해외 기관으로부터 무료봉사를 요구하는 것에 한계가 왔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일회성의 방문으로 그치지 않고 <장기적인 공조의 길>을 찾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기관방문을 해야 해외 연수가 용납되는 국내 시스템도 문제다. 중요한 것은 연수의 취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적정 장소를 답사하고 전문가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기관방문이 오히려 불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도 기관방문을 의무처럼 여겨 해외에서조차 수군대는 분위기라면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는 신뢰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 기관이라도 방문하여 반드시 증빙 사진을 찍어 첨부해야 하는 관례가 지속한다면 우리 국민은 국제사회에서 영원히 미성년자로 남을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위의 사례처럼 대부분 보람 있는 연수를 원한다. 기관방문이 반드시 그 조건이 아니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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