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올해는 정확하게 2월 18일에 시작되었다. 미용실에 갔는데 의자에 앉자 마자 폭풍같은 재채기가 터졌다.

“엣취!”

“건강! (미용사의 말. 누가 재채기하면 옆 사람이 자동적으로 건강! 이라 외치는 관습에 의거.)”

“감사합니다. 엣취!”

“애고 감기 걸리셨네~”

“엣취! 아~ 감기가 아니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엣취!”

“꽃가루 알레르기요? 지금 2월 중순인데 무슨 꽃가루가 하하하하 감기겠죠. 하하하하!”

대개 이쯤에서 입을 다무는 것이 좋다. 입아프게 설명해 봐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꽃가루 알레르기를 처음 얻은 것이 1994년이니 25년 째 달고 사는 중이다. 그 해 봄 아프리카로 여행하기 위해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다. 접종 다음 날부터 심한 ‘감기 증세’ 비슷한 것이 시작되었는데 딱히 감기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눈물 콧물은 둘째치고 눈 주위가 빨갛게 부어오르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가려운 것이 이상스러웠다. 그래서 약국에 들렀더니 약사가 내 몰골을 보자 마자 “저런, 꽃가루 알레르기네~” 이래서 감기가 아닌 알레르기인 걸 알게 되었다. 마침 꽃 가루가 날리던 계절이어서 아마도 내 면역체계가 예방약 속에 함유된 병원균과 꽃가루를 혼동한 듯하다. 이후부터 봄이 되어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면 사이비 말라리아를 앓곤 한다. 직업 상 봄에 할 일이 가장 많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적지 않다. 꽃가루 알레르기라고 해서 모든 꽃가루에 다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아무도 짐작치 않는 이른 절기부터 날리는 꽃가루에 반응하고 흙먼지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흙속에 함유되어 있는 미생물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고. 처음엔 별 생각없이 약을 먹었지만 약 속에 진정제가 섞여 있는 것이 문제였다. 십 여년 전, 정원 공사 중에 증세가 하도 심해서 약을 먹었다가 운전 중에 걷잡을 수 없이 잠이 쏟아져 사고를 낼 뻔한 뒤로부터는 약을 먹지 않는다.

그 대신 생각을 달리 먹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질 수 밖에 없는 자연과의 싸움이니 순응하기로 한 것이다. 내 자신을 스스로 꽃가루 측정기로 보고 내 알레르기야말로 자연과 소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5년 전에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3월 초에 슈프레발트로 탐험을 갔다가 거의 병원에 실려갈 뻔한 적도 있다. 오리나무, 포퓰러, 버드나무, 자작나무로 이루어진 개척종 밀림 속에 용감하게 탐험을 떠났던 것이다.

꽃가루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부터 날리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알레르기 덕이다. 개암나무, 오리나무, 포퓰러, 버드나무,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가 가장 빠르다. 이런 나무들을 ‘개척종’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자랄 것 같지 않은 황폐지에 가장 먼저 깃들어 뿌리를 내리지만 습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들이다. 이들이 뿌리로 척박한 땅을 갈아 놓으면 그 다음에 보기 좋은 꽃나무들이 비로소 자리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나무들을 개척종이라 부르는 것이다. 개척종들은 관리가 쉽기 때문에 독일의 경우 공원에 많이 심는다. 생태운동이 시작된 뒤로 부터는 더욱 많이 심는다.

나무들 중에는 과실나무 등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많다. 개척종들의 경우 이런 나무들도 꽃을 피우나? 할 정도로 별 볼일 없다. 분명 꽃이 피지만 언제 피는지 언제 지는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꽃가루의 성질이 몹시 강하고 공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야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한 매연을 뚫고 어김없이 재채기를 유발시키는 것을 보면 매연 속의 독한 중금속도 자연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증거이므로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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