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며칠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오랜만에 노숙자 신문을 한 장 샀다. 중년의 여인이 무슨 사연으로 노숙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죽지 않고 씩씩한 음성으로 신문의 토픽을 낱낱이 읊어 내리는데 그중 „베를린 시 주거환경보전구역 추가 지정“이라는 대목이 흥미로워 산 것이다. 베를린의 노숙자 신문은 모츠Motz라고 하는데 격주로 발행되며 A4 크기의 반절지 24장 분량이다. 가격은 1유로 20 센트, 그중 80센트는 노숙자에게 돌아간다. 노숙자들이 직접 만드는 신문은 아니고 뜻있는 저널리스트 그룹이 만드는 것인데 노숙자들이 받아서 거리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노숙자 신문 또는 스트리트 뉴스페이퍼라고 한다. 물론 가난과 무주택 문제 등을 집중 조명한다.

주거환경보전구역이란 자연환경이 아니라 특정한 주민계층이나 사회구조를 보호하는 구역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임대료가 뛰는 것을 방지하는 도시계획 도구 중 하나다. 이런 구역에서는 <도시재생> 내지는 <재건설>이라는 명목 하에 저렴한 국민주택을 고급주택으로 둔갑시켜 비싸게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독일의 건설법전 172조 이하에 근거하여 평등한 주거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규정이다. 베를린에서는 20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거환경보전구역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주택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통일 이후 인구가 증가할 것을 대비하여 멋진 신도시를 여기저기 지어 주택을 잔뜩 마련해 놓았는데 예상한 것처럼 새로운 인구가 유입하지 않아 주택이 남아돌았던 적이 있다. 그러자 나이브하기 짝이 없는 베를린 정부에서 낙후한 국민임대주택을 민간 개발업자들에게 아주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베를린은 문화와 예술과 행정 중심의 도시기 때문에 벌이가 시원치 않다. 산업구조가 취약하므로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많아 늘 재정난에 허덕인다. 그 참에 주택보수비용도 아끼고 땅을 팔아 재정도 충당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다. 정부의 변에 의하면 개발업자들이 저렴한 국민주택을 고급주택으로 변신시켜 비싼 값으로 판매할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베를린이 하루아침에 유럽의 인기도시가 되었다. 인구가 폭증했고 주택문제가 불거졌다. 게다가 난민도 몰려들었다. 이에 시정부에서 다시금 많은 예산을 들여 임대주택을 짓는 한편 주거환경보전지역을 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으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베를린 시정부는 야유와 조소 속에서 잔뜩 움츠러져 있다. 비전을 가지고 도시를 꾸려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국민임대주택이 시작된 것도, 노숙자 신문 또는 스트리트 뉴스페이퍼가 처음 등장한 것도 모두 약 백 년 전의 일이다. 1927년 구스타프 브뤼겔이라는 방랑 시인이 <데어 쿤데>라는 매거진을 만든 것이 지금 스트리트 뉴스페이퍼의 기원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베를린 동남부에 소위 말굽단지라고 불리는 대형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었다. 지금 이 단지는 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유산 중 도시설계 문화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널리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말굽단지라는 별명은 단지 중앙 구역의 아파트가 U자형으로 굽었기에 비롯된 것이다. 감싸 안은 듯 한 말굽 형태에 커뮤니티의 이상을 담아 본 것이다.

1920년대의 건축가, 조경가, 도시설계가들은 개혁의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사회주의 움직임,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제 1 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상의 건설에 대한 희망의 시대였다. 이때 대형 주거단지 건설이라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수준높은 건강주택을 될수록 저렴하게, 될수록 많이 지어 노동자들에게도 내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1924년 최초의 주택개발공사를 설립했다. 당시 베를린 도시개발부 장관이었던 마틴 바그너, 주택개발공사 사장이 의기투합하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모더니즘 건축가 부르노 타우트와 조경가 레베레히트 미게Leberecht Migge(1881-1935)를 초대하여 설계를 의뢰했다.

전원주택의 이상, 대형 주거단지 축조 기술과 건축미학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 낸 성공적 사례, 주택건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모범 프로젝트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레베레히트 미게의 조경설계에는 내집 정원에서는 텃밭을, 커뮤니티 정원에서는 이웃 간의 우애를 기르며 살자는 새로운 철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29 헥타르의 면적에 근 2천 세대 규모로서 1920년대 주거단지로는 가장 큰 곳이다. 대형 단지이므로 천편일률적으로 지루해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두 7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성격과 디자인을 각각 달리했다. 현재 말굽단지는 대형 아파트 단지를 혐오하는 이들에게도 살기 나쁘지 않은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 아직 모던한 주택 건설 에 대한 노하우와 기술을 실험하는 단계여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공사 도중 경제공황이 터져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와중에 공사비가 예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노동자층이 아니라 고수입의 공무원이나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입주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높이 칭송되고 있으나 실은 빛좋은 개살구였고 그림의 떡이었다.

비전을 펼치고 구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말굽단지의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까닭은 이를 기점으로 해서 주택개발공사나 국민임대주택이라는 제도가 널리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를 팔아넘기기까지는.

말굽단지 1. (흑백사진) [사진제공: ETH-Library]
말굽단지 1. (흑백사진) [사진제공: ETH-Library]
말굽단지 2. [사진제공: 고정희]
말굽단지 2. [사진제공: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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