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대왕의 약초밭이라니 어딘지 걸맞지 않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대왕이 쪼잔하게 약초밭에 신경을 썼나? 그런 건 부하들에게 맡기고 원정가서 적국을 굴복시켜 영토를 확장했다거나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영토확장도 했다. 대왕의 호칭을 그냥 얻어가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전쟁만 하고 있다가는 민생을 어떻게 살필까.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와 건강도 같이 챙겨야 진정한 대왕이 아닐까. 소위 <최초의 유럽인>이라 일컬어지는 카롤루스 대왕(Carolus Magnus) 의 얘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 대왕이라고 한다. 카롤루스는 라틴어 호칭이고 독일에서는 또 칼 대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호칭이 다양한 이유는 라틴어를 쓰던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였는데다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모두 초대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유럽 남서부에서 출발한 작은 프랑크 국의 왕이었던 카롤루스가 서기 800년경 유럽 대륙의 ‚중원을 평정‘하여 거대한 제국으로 확장했다. 대왕 사후 그의 후대에 제국이 분열되며 여러 나라로 갈라졌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들이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이다.

현재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삼각지대에 아헨이라는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멀지 않다. 카롤루스 대왕은 후기에 바로 아헨을 본거지로 삼았었다. 당시에는 아직 수도라는 개념이 없었고 제국 전체에 걸쳐 행궁의 네트워크를 마련하여 통치했던 시대였는데 대왕은 아헨을 특별히 선호했었다. 아헨에 거대한 궁전과 성당을 짓고 그 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는데 그 전통을 이어받아 이후 대대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아헨 성당에서 치렀다. 지금 궁전은 사라지고 없으나 성당은 남아있다. 아헨은 카롤루스 대왕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건축의 거장 미스 판 데어 로에의 출생지라는 자부심이 있는 도시다. 아마도 그 덕에 라인란드 베스트팔렌 주의 대학연합 RWTH이 아헨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이 대학 식물학과에서 <식물원 지킴이들의 모임>의 후원을 받아 대왕의 약초밭을 만들었다. 왜 하필이면 약초밭이었을까.

제국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된 서기 812년 경, 대왕은 칙령 하나를 내렸다. <전국의 황제령 토지 관리에 대한 칙령>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겠는데 삼포식 농경법, 포도밭 관리, 양봉, 축산업 등을 망라한 방대한 지침이다. 그 중 제 70조에 „제국 어디에서나 심어 길러야 하는 식물 목록“이 들어 있다. 73종의 약초 및 채소와 16종의 나무 목록을 양피지 한 장에 필사한 것이 남아 있다. 대왕 자신은 문맹에 가까웠다고 하니 대왕의 친필은 아니었을 것이고 사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수도원 사제에게 명하여 목록을 작성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 유일한 식자층이었던 수도원 사제들이 황제궁에 파견나가 교육과 행정을 거의 도맡았었다.

식물 목록을 보면 붓꽃, 로즈마리, 양귀비 등의 약용식물을 비롯 사과, 배, 모과, 복숭아, 밤, 호두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외없이 모두 유용식물이다. 대왕의 목록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갔다. 약 1200 년 쯤 지난 뒤 유럽에 중세 리바이벌 붐이 일었다. 그 일환으로 카롤루스 황제의 도시 아헨에 위의 식물 목록을 바탕으로 삼은 약초원이 조성되었다. <칼의 정원Karl’s Garten>이라는 무엄한 이름이다. 아헨 시청사 옆에 작은 규모로 먼저 하나 만들고 대학 병원 인근에 제법 큰 규모로 또 하나 조성했다. RWTH 대학에서 2000년도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기 위한 유럽교육포럼 „유토피온“을 발족시킨 바 있다. 이 포럼의 첫 번째 작업으로 유럽의 첫 번째 황제였던 카롤루스 대왕의 약초밭 만들기가 결정된 것이다. 배후에서 식물원 지킴이 모임의 활약이 컸다고 한다. 조경가에게 설계를 의뢰하였으며 위의 목록에 나오는 식물을 빠짐없이 심었다. 지침서의 순서대로 식물을 배치하였는데 중세 풍으로 밭고랑을 정연하게 만들어 약초와 채소를 심고 전정한 주목으로 울타리를 둘렀으며 외곽으로는 유실수를 심었다. 이 정원을 거닐다 보면 마치 도감 속을 거니는 느낌이 든다. 삼차원의 향기로운 도감정원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시대에 비싼 중국 약재를 수입해 쓰는 것이 유행하자 주머니 사정이 시원치 않은 서민들이 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려 고종이 국내산 약재, 즉 향약 180여 종을 선발하여 책으로 엮어내게 했다. 1236년의 일이었다. 이 책을 향약구급방이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의 고유 의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 세종대왕께서 향약집성방이라는 방대한 의약책을 다시 발간했다. 세종 대왕의 거대한 업적에 가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겐 그 의미가 크다. 아쉬운 점은 그림이 하나도 삽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후일 성종 대에 똑똑한 승지 이경동이 그림을 그려 넣자고 상소하였고 임금이 „그러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림도감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527년 만의 일이다. 2006년 사진이 포함된 도감형 향약집성방이 출판되었다(신전휘 · 신용욱, 향약집성방의 향약본초. 사진으로 보는 현대 한의약서. 계명대학교 출판부 2006).

사진으로 보는 향약집성방은 나왔으니 이제 삼차원의 <향약집성 정원>을 만들 차례가 아닐까 싶다.

아헨 시 외곽 멜라텐이라는 곳에 조성된 카롤루스 대왕의 약초 정원 [사진제공 고정희]
아헨 시 외곽 멜라텐이라는 곳에 조성된 카롤루스 대왕의 약초 정원 [사진제공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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