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신잡] 겨울에 봄이 있다
[고정희 신잡] 겨울에 봄이 있다
  • 고정희 박사
  • 승인 2020.02.17
  • 호수 57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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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설날, 종일 흐렸다. 그리고 종일 차가운 안개비가 내려앉았다. 입자가 너무 작고 가벼워 미처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진 못하고 그대로 외투를 적시고 몸속으로 스몄다. 이런 날 여간 자학적이지 않으면 긴 산책은 즐겁지 않다. 그래서 엉터리 떡국을 한 그릇 끓여 먹은 뒤 산책을 포기했다. 그 대신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옆에 놓고 책을 펼쳤다.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이라는 소설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글은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책을 아주 좋아한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이미 7, 8년 전에 읽었다. 이제 주변을 가볍게 할 때가 된 것 같아 책 정리를 시작했고 전공 서적을 제외한 한국 책을 모두 한국학 연구소에 기증하기로 했다. 김훈 작가의 소설도 기증할 예정이었다. 막상 책을 추려서 쌓아 놓고 보니 헤어짐이 어려웠다. 그래서 모두 한 번씩 더 읽고 떠나보내기로 했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젊은 여류 화가 조연주가 들려주는 얘기다. 눈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이야기다. 어느 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쳐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날, 조연주는 민통선 내에 있는 국립수목원에 도착한다. 세밀화가로 취직되어 간 것이다. 거기서 다음 해 겨울까지 사계절을 보내며 풍경과 수목과 꽃을 각별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눈이 아프도록 종일 바라본다. 세밀화를 그리려면 물론 자세히 관찰해야 하지만 그는 나무껍질 내면의 아주 깊은 생명의 뿌리에 닿기라도 하려는 듯 바라본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사람 사이 인연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김훈 작가의 글이 늘 그렇듯 우리의 역사에 대한 아픔이 베이스 음이 되어 둥둥둥 울리는데 그 리듬에 맞추어 역사와 사람과 풍경과 나무와 꽃이 “포개진다”.

조경인의 필독 도서로 추천하고 싶었던 책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젊은이들 희망직업 1순위가 숲 관리사에서 유튜버로 변한(독일의 경우) 요즘, 자그마한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스크롤해 가며 글을 읽는 요즘, 김훈 작가의 느릿느릿하고 정밀한 글을 추천해서 씨알이 먹힐까 주저했었다. 이제 다시 읽고 보니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펼쳐 남다른 감성의 세계로 깊이 빠져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조연주의 등 뒤에 서서 그의 시선을 따라 숲속의 자작나무와 복수초와 목련과 수련과 도라지와 서어나무를 눈이 시리도록 바라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이들이 모두 같은 시기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4계절은 할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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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타인과 인연 맺기를 몹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살아간다. 그들 중에는 타인 대신 꽃과 나무, 새와 곤충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수목원에서 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무들은 숲을 이루지만 나무와 나무는 서로 만나지 않고 인연을 맺지 않는다. 김훈 작가는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메말랐다. 그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라 음량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는 뭐랄까, 대상을 단지 사물로써 호명함으로써 대상을 밀쳐내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불러서, 내가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다 나를 주저앉히는 듯했다”. 여기서 그와 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나무를 연상시켜 사람과 나무가 “포개지는” 느낌이다. 글쎄, 눈이 시리도록 숲을 응시하다 보면 사람도 나무가 될 수 있을지. 나무처럼 느낄 수 있을지. 물론 나무는 느낌도 감정도 없이 초연하다. 나무가 무엇을 느낄까? 라는 물음은 너무나 인간적인 물음이다.

이러한 나무들은 지금과 같은 겨울에도 추위와 더불어 자족해서 봄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은데 이는 그 속에 이미 봄이 있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대목과도 만난다. 이는 독일의 칼 푀르스터 선생이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기도 하다. 큰 감수성은 동서 문화권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것을 보는 것 같다.

칼 푀르스터 선생도 겨울부터 정원 이야기를 시작했고 겨울로 이야기를 마쳤다. 겨울 속에 봄이 이미 있는데 왜 겨울을 꺼리느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겨울 속의 봄은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다거나 상록 식물이 있다거나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김훈 작가가 절묘하게 묘사한 것처럼 “나무가 뿜어내는 신생의 시간”을 말한다. 봄은 해마다 시작되는 신생의 시간이며 이때 땅이 부풀어 숨쉬기 시작한다. 나무는 이런 땅의 숨결을 받아 입김으로 뿜어낸다.

우리는 나무를 심어 풍경을 만들고 꽃을 심어 정원을 짓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약 겨울에도 나무의 두런거림과 봄의 입김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짓고자 한다면 우리가 먼저 겨울 속의 봄을 온몸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김훈 작가보다 더 절묘하게 묘사할 방법을 몰라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한다. “부푸는 땅의 들숨과 날숨이 나무의 입김에 실려서 온 산에 자욱하고, 봄으로 뻗어가는 나무는 새로운 시간의 냄새와 빛깔까지도 뿜어낸다.”

몇 번씩 곱씹어보게 하는 문장이다. 이런 풍경을 지어보고 싶은 충동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지?

[한국조경신문]

고정희 박사
고정희 박사 jeonghi.go@thirdspace-berlin.com 고정희 박사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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