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으로 바라보는 풍광인 ‘어와’의 발견
신명으로 바라보는 풍광인 ‘어와’의 발견
  • 온형근 월백조경문화/문화유산조경박사
  • 승인 2022.01.26
  • 호수 6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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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의 원림은 <산중신곡>이나 <금쇄동기>의 해남과 어부사시사의 보길도, 그리고 양주 고산 원림으로 나눌 수 있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미의식을 <어부사시사>와 결부시켜 해석하면 유난히 ‘신명’의 미의식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계절이 겨울이니 어부사시사의 「동사」를 하나 떠올려 신명으로 바라보는 풍광을 향유한다.

 

 

붉게 물든 벼랑 푸른 절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려나 못 낚으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쪽배에서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채 흥에 겨워 앉았노라

<어부사시사, 「동사7」>

 

<어부사시사> 「동사7」의 전문이다. 초장에서 단풍으로 붉게 물든 벼랑인 단애(丹厓)와 푸른 절벽인 취벽(翠壁)이 만나 붉고 푸른 절벽인 단애취벽(丹崖翠壁)의 풍경을 공유한다. 「동사7」은 배를 정박시키는 장면이다. 배를 세우면서 멀리 바라보이는 풍광을 발견한다. 다시 흥이 오른다. 그러니 ‘입 크고 비늘 자잘한 좋은 물고기’인 거구세린(巨口細鱗)을 ‘낚으려나 낚지 못하나’ 아무 상관이 없다. 이쯤에서 신명은 구체적인 풍광으로 갈아타면서 심오하고 완숙한 경관 인식이 된다. 풍광을 읊는 경지가 된다. 시정이 넘쳐흐르는 풍치인 시경(詩境)이 된다. 같은 단애취벽을 두고, 목은 이색은 ‘붉고 푸른 절벽에 이끼 꽃이 아롱졌다.’며 세밀한 풍경화로 읊었고,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정두경은 <동명집>에서 ‘붉고 푸른 절벽이 둘쭉날쭉 솟았다.‘며 거시적 풍경을 표상하였다.

원림조영의 설계언어는 원림 요소가 되는 재료를 지시하는 일차적 언어가 아닌 좀더 고차적인 언어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거구세린을 낚고자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음 의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의식의 흐름을 살펴야 한다. 신명의 미의식은 일단 흥취가 일어나고 신명으로 변화를 수반하는 경계에 이르면 처음 설정한 의도대로 이끌어지지 않는다. 종장에서 혼자 탄 배에 도롱이와 삿갓을 걸친 고주사립(孤舟蓑笠)으로 앉아 여전히 흥이 가라앉지 않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경을 표출하고 있다. 이 정도 되어야 풍광이라 할 수 있다.

신명의 미의식은 처음 의도한 설계원리로 작동되지 않는다. 원림에서의 행위로 드러나는 결과는 의도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명은 원림조영의 본질적 바탕이다. 마음을 움직여 다양한 원림에서의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어와 져므러 간다 宴息이 맏당토다

ᄇᆡ 븟텨라 ᄇᆡ 븟텨라

ᄀᆞᄂᆞᆫ 눈 쁘린 길 블근 곳 흣더딘 ᄃᆡ 흥치며 거러가셔

至지匊국悤총 至지匊국悤총 於어思ᄉᆞ臥와

雪셜月월이 西셔峯봉의 넘도록 松窓을 비겨 잇쟈.

<어부사시사, 「동사 10」>

 

「동사 10」은 <어부사시사>의 마지막 작품이다. 흥겹고 또 흥겨운데, 흰 눈에 동백꽃이라니. 집에 와서도 소나무 그림자가 비치는 창에 기대 달빛 기우도록 함께 한다. 달이 신명을 감싸고 아우른다.

초장에서 숨가쁜 흥취의 신명을 잠시 내려 놓기 위하여 긴 숨을 몰아쉬며 다스린다. 그것이 ‘어와’이다. 어쩌면 <어부사시사> 전체의 곡조를 ‘어와’에 실어 마무리하려는 시도이다. 단발마 같이 깊은 흥을 표출하는 감탄사이다. 저물어 간다는 것은 하루이기도 하지만, 윤선도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러니 편안하게 쉬는 안식이 마땅하다고 위안하면서 되돌아본다.

중장에서는 눈 내리고 붉은 꽃 흩어진 길에서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의 흥겨움이 표상된다. 하얀 눈 내린 곳에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은 시대를 관통하는 미의식이다. 아직도 신명은 그치지 않았다.

종장에서 눈 내리는 풍광에 달이 떠오르는 설월(雪月)의 시경을 마주한다. 설원이 서쪽 봉우리로 걸쳐 넘어간다. 이를 소나무 그림자가 비치는 송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지새우며 느릿느릿 바라본다. <어부사시사> 전체의 긴박한 신명을 ‘어와’의 감탄사가 통째로 감당하고 있다. ‘어와’의 풍광을 발견하는 지점이다.

 

 

 

 

 

 

 

 

 

 

 

'열린 원림 문화'의 향유는 산중에서의 오르락내리락 걷기의 일상을 통하여 발견하는 깨달음의 문화이다. 유난히 새소리로 가득찬 빛나는 5월 어느 날 신명의 아름다움을 얻는다. 출발 지점과 기착 지점을 번갈아 바꾸면서 산행을 하니 시작과 종료가 아닌 순환의 경지에 놓인다. 원림을 크게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하였다. 구분은 원림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장소성을 구체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산사의 목탁 소리와 새 울음이 다르지 않다. 햇살 반짝이던 곳으로 갑자기 안개가 스미기도 하는 변덕 심한 날조차 흥취는 가라앉지 않는다. 원림을 살찌우는 것은 드리워진 나뭇가지이다. 비를 맞으면 툭 털면서 자란다. 그러면서 원림은 늘 평온한 듯 소박한 지점에 놓인다. 원림을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데에는 신명만한 게 없다. 신명의 독보적인 기운은 평범한 풍광을 인생 최고의 장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마땅한 동력을 지녔다.

[한국조경신문]

 

온형근 월백조경문화/문화유산조경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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