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형근 박사
온형근 박사

 

국내에 정원박람회를 비롯한 많은 가드닝 열풍에서 ‘2012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시민정원 중 「공간창조」라는 정원은 닭장(Chichen Coop)과 닭장의 벽면에 녹지를 조성한 생산녹지 작품이다. 이때는 정원에 ‘닭장’이 어떤 의미일까를 놓쳤으나, 오래도록 각인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자연과 어우러져 문화를 만들어 내는 시공간에 인류의 오래된 사육 가축인 ‘닭’의 상징성과 실용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성찰하게 되었다.

 

경기농림진흥재단, 공원, 도시농업을 품다, 2012, 도서출판 숲길, pp.214-215.
경기농림진흥재단, 공원, 도시농업을 품다, 2012, 도서출판 숲길, pp.214-215.

 

어둠을 물리치며 새벽을 깨우는 상서로운 ‘닭울음소리’는 계명성(鷄鳴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이 기억나서 울었던 ‘베드로’의 회개 뿐 아니라, '삼국유사'의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그렇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이십일의 「경상도」 편에 김알지의 탄생 콘텐츠가 그러하다. 「시림(始林)」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탈해왕(脫解王) 9년에 임금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풀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그가 금궤(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인하여 그 숲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 알지의 7대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미추가 대신 즉위하였으니,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한 시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시림(始林)」은 ‘비로소 원림의 시작’이며, 숲과 인간의 공존과 연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후에 「계림(鷄林)」으로 아예 ‘닭’이 지칭된 원림정원문화의 복합 명칭으로 바뀐다. 원림은 숲에 인간이 문화를 이루는 과정에 탄생한다. 설날이나 대보름날 새벽에 우는 첫 닭의 울음소리로 한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는 습속이 있을 정도이다. 거기다 닭은 시간을 알려주며 세시풍속의 초례상에도 닭을 올릴 정도로 닭은 우리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맞닿아있다.

'열린원림문화' 향유 중, 새벽에 원림을 걸으면서 닭울음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 오래된 시원의 아득한 울림을 따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닭울음소리 나는 길을 ‘계명성 길’이라고 명명하였다. 정신이 명료해지고 아득한 원시적 에너지가 세포 곳곳에서 스르륵 되살아나는 그런 느낌을 원림의 숲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른 봄부터 줄곧 그렇게 「열린원림문화」를 살찌우더니 어느 순간 소리가 그쳤다. 그 연유를 살피기에 마땅치 않지만, 계명성 울리는 동안의 정서적 충만함은 얼마나 소중하였는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이 시심으로 쌓이더니, 지난해 가을 깊어가는 어느날 원림에서 탄생한 시는 다음과 같다. 올해도 입춘이 지났으니, 다시 계명성을 들을 수 있는 시기도 가깝게 다가와 있다.

 

계명성 길 – 임천한흥.130 / 온형근

 

이른 봄부터 닭 울음소리로 황홀하였다.

 

황야의 너른 들판 지평선에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태양의 뜨거운 순혈로 꿈틀댄다. 영혼이 차고 시원

한 샘물에 풍덩 명징해진다. 이내 전신을 싸고 맴돈

다. 아득한 시원의 들판 저 너머에서 닭 울음소리

건너왔으니 그 또한 태양족의 일원이리라.

 

네 울던 오솔길을 계명성 길이라 기념한다.

멧비둘기와 뭇 산새와 달리

내 안의 숨어 있던 원시의 생기가 힘줄 돋듯

정수리로 뒷덜미까지 꿈틀대며 허둥댄다.

잠시 아찔해지며 현묘의 지경에 놓인다.

 

원림에 닭 치는 이 또한 누구인가.

누가 태양족의 전령인 계명성을 거두었는가.

(2021. 10. 29.)

정원이나 원림에 닭 치는 공간을 만들어 계명성을 듣는 일을 시경으로 표상하였다. 시경(詩境)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경(意境)에 담아 뜻과 정서를 형식을 빌려 운율로 표현하는 것이다. ‘계명성’에는 시간과 공간의 속성이 담겨 있다. 원림에서 ‘닭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지막이 읊조리며 천천히 걷는 미음완보의 ‘계명성 길’이 탄생하게 된 이유이다.

닭울음소리는 ‘꼬끼오’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지평선에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태양의 순혈로 꿈틀’대는 역동성을 지녔고, ‘차고 시원한 샘물에 풍덩’ 빠져 명징해지는 소리이다. 뭔가 ‘아득한 시원의 들판’ 한가운데 내가 서 있는 듯한 지경에 놓인다. 정몽주의 '포은집' 「제2권」에 장수역(경북 영천 신녕면의 역참)에 묵으며 익양 태수 이용에게 부친 시에 ‘계명성악악(鷄鳴聲喔喔)’이 나온다. 역에서 일어나 ‘닭이 울어 꼬끼오’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향 떠난 길을 제촉하는 서글픈 회포를 담은 시이다. 악(喔)은 닭 우는 소리를 말한다. 한문에서는 같은 자를 연달아 써서 의성어와 의태어로 표현하는데, 악악(喔喔)은 의성어인 셈이다. 오늘날 ‘꼬끼오’를 ‘악악(喔喔)’으로 사용한 것이다.

고산 윤선도의 '고산유고' 「제1권」에 닭을 노래한다는 ‘영계(詠鷄)’라는 시의 4행과 5행을 보면 닭이 시간을 알려주는 것을 치하한다.


(......)
4 시야야 어떻게 너에게 미치리오 / 時夜誰及汝
5 새벽 기운이 이르면 절로 꼬끼오 울며 / 氣至自咿喔
(......)
<고산유고 제1권, 「영계(詠鷄)」>

 

사람이 최고로 신령하지만 어둠을 헤치고 일어나는 시각을 알리는 데에는 닭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 저 닭이란 것은 새벽 기운 조금만 도달하여도 저절로 꼬끼오하고 계명성을 내는데(기지자이악氣至自咿喔), 이는 음율이며 해뜨는 동쪽 신성한 나무에 산다는 전설상의 새인 천계(天鷄)에 응답하는 것이라 읊는다. 부산 기장은 고산이 6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이곳 죽성의 황학대에 고산의 「영계(詠鷄)」를 시비로 세워 두었다.

 

부산 기장 죽성 황학대, 고산 윤선도의 동상과 「영계(詠鷄)」 시비
부산 기장 죽성 황학대, 고산 윤선도의 동상과 「영계(詠鷄)」 시비

 

‘계명성’은 정체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문득 생동의 시원을 되살린다. ‘내 안의 숨어 있던 원시의 생기가 힘줄 돋듯, 정수리로 뒷덜미까지 꿈틀대며 허둥댄다.’ 천지개벽이나 왕의 탄생을 알리듯 삶의 예지를 일깨운다. 그러니 ‘원림정원문화’에 닭장을 시설물로 도입한다면 시경(詩境)을 호출하는 시간과 공간의 의경(意境)을 획득할 수 있다. 성장과 움직임을 보고 즐기며 먹거리를 얻는 생상적 환경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계명성’은 청각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자극한다. 이러한 자연과의 동기상응(同氣相應) 수행을 통하여 시적 상상력과 생태적 감수성을 고양하는 경험이 가능하다. 풍요로운 주체적 삶으로 「열린원림문화」의 색다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보면 문무왕 14년(674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새 종류를 기르는 것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월, 궁내천지조산, 종화초, 양진금기수.(二月, 宫内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竒獸.)

 

그해 음력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것이다. 못을 파고 마운딩하는 ‘천지조산’의 토목 시공을 통하여 화초를 식재하고 귀한 새와 짐승인 ‘진금기수’를 길렀다는 것이니, 이게 한국정원문화의 원형에 해당하는 간략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문무왕 14년의 ‘진금기수’를 길렀던 경주의 동궁과 월지는 오늘날 어떠한가. 원림과 정원에 ‘계명성’을 울릴만한 충분한 문화적 가치를 담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조경신문]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