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의 식물노마드] 갈대, 목신의 팬파이프
[최문형의 식물노마드] 갈대, 목신의 팬파이프
  •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 승인 2020.10.07
  • 호수 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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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Landscape Times] 영원한 처녀성을 상징하는 여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던 님프 시링크스는 목신 판(Pan)의 구애를 받게 된다. 아버지는 제우스며 어머니는 님프인 판은 머리에 작은 뿔을 가진 인간과 염소를 합친 모습이었다. 판은 시링크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했지만 순결을 중시한 그녀는 판을 피해 도망 다니며 살았다. 어느 날 쫓아오는 판에게서 벗어나고자 온 힘을 다해 달아나던 시링크스는 더 이상 도망할 수 없게 되었다.

판을 피해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 그녀의 눈앞에는 커다란 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강을 헤엄쳐 건널 자신이 없었던 그녀는 강의 신에게 화급히 도움을 청했다. 도와달라는 절규가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순식간에 갈대숲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님프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여리여리한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만이 남았다. 뒤쫓던 목신 판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시링크스를 향한 사랑을 놓을 수 없었던 판은 갈대로 변한 시링크스로 자신의 영원한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목신의 피리(Panpipe) ‘시링크스’다. '시링크스'라는 이름의 팬파이프를 가지고 다니는 이 반인반수의 목신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예술가들이 많았다.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는 ‘목신의 오후’라는 시를 지었으며, 이에 영감을 받은 드뷔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지어 파리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다소 몽환적인 이 작품은 모던 발레로도 공연되어 주목받았다.

이처럼 많은 예술가의 영감의 근원이 된 것은 바로 ‘갈대’였다. 뒤쫓는 목신을 피해 강을 건널 수 없었던 님프의 선택은 갈대라는 식물로 강가에 남겨졌다.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싫고 그렇다고 죽음을 택할 수도 없었던 순결한 님프는 연약한 갈대가 되었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던 목신은 갈대를 악기로 만들어 늘 함께 했다. 강가나 습지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갈대를 보며 고대인들은 이런 상상을 폈을 것이다. 물과 뭍 사이에서 생을 영위해야 하는 갈대의 처지를 동정했을지 모른다.

신화 속 갈대는 이렇게 순결한 처녀, 아름다운 여성을 상징한다. 갈대는 냇가, 강기슭, 늪, 바닷가 근처에서 잘 자란다. 가을이 되면 꽃이 피고 기다란 이삭이 무리지어 휘날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갈대는 바람 부는 대로 눕는 습성으로 인해 세상 물결 따라 휘둘리는 사람의 대명사인양 알려져 왔다. 물가에서 사는 갈대 입장에서 보면 불어오는 바람에 꼿꼿이 맞서게 되면 꺾이게 되어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줄기 속을 채우는 건 생활의 사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줄기 속을 텅 비워 현명하게 처신한다. 바람 부는 대로 누우면서 꺾이지 않고 말이다.

갈대가 눕는 것은 단순히 지조 없음일까?<br>
갈대가 눕는 것은 단순히 지조 없음일까?

갈대는 휘청거리며 바람의 방향대로 눕지만 바람이 그칠 때면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갈대가 한 쪽으로 쏠린다고 비웃지만 갈대는 자발적이고 자주적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눕고 일어서고 다시 누우면서. 속을 비운 갈대이기에 어느 방향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 연약하고 현명한 갈대에다 인간을 비유한 사람이 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하여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사고력은 온 우주를 품고 뛰어넘을 수도 있을 만큼 위대하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 실상은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파스칼의 언명에는 양면성을 지닌 인간 실존에 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혹자는 이 말이 성서의 ‘상한 갈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라는 구약의 구절이다.

‘상한 갈대’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양을 치는 목자들이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불던 갈대 피리를 뜻한다. 당시 목자들은 어디에나 흔한 갈대로 피리를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피리가 망가졌다고 바로 버리지 않았다. 정든 피리라서 꺾어버리지 않고 고쳐 쓰곤 했다. 목신 판의 갈대(시링크스) 사랑이 목자들에게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목신의 사랑은 에로스였지만 성서에서 그것은 아가페로 변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연약한 인간을 향한 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해석한다.

갈대는 여러 가지로 똑똑한 식물이다. 지하줄기에 전분을 저장하여 봄에 새싹을 틔울 때 활용하고 잎에서 만든 화학물질로 다른 종이 자기 동네에 침입하지 못하게 방어하기도 한다. 그렇게 커다란 군락을 이루고 산다. 해열과 해독효과가 좋은 갈대는 습지에 사는 갑각류와 물에 사는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가을이다. 가을은 갈대의 계절이다. 갈대는 강한 생명력을 지녔다. 연약한 듯 잘 휘어지면서 거센 바람을 견딘다. 우리 인생도 거친 환경에서 휘둘리지만 갈대처럼 생각하고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을 강가에서 바람 부는 대로 눕고 일어서며 살아가는 갈대의 순결한 지혜와 그 갈대를 사랑한 목신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한국조경신문]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 askmun@naver.com 최문형 성균관대 유학대학 겸임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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