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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박사

[Landscape Times] 지난 5월 31일 환경 예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가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포장 예술가 혹은 대지 예술가로도 알려졌으나 본인 스스로 환경 예술가(Evironmental works of art)라 했으니 그리 칭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는 부러울 만큼 일관되고 꽉 찬 삶을 살다 갔다.

1995년 베를린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베를린 연방 의사당을 포장했기 때문이다. 6월 말에 작업이 완료되어 공개되었고 7월 7일에 다시 걷어냈는데 매일 저녁 보러 갔었다. 낮에도 간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의사당을 보자기로 씌운다기에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꼴이 뭐가 될까? 그런데 막상 특수 제작한 은빛 천으로 포장이 끝났을 때,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말을 잊었다. 이런 것이 가능할까? 눈앞에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이런 걸 비전이라 하는가 보다 싶었다. 실은 그와 그의 아내 잔클로드의 공동 작품이다. 둘이 늘 함께 연단에 오르거나 인터뷰도 함께 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저 빨간 머리 여편네는 왜 저렇게 따라다녀.” 라고 투덜댄 이도 적지 않았다.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2005년 2월 뉴욕에 센트럴파크에 설치한 ‘The Gates’ 앞에서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2005년 2월 뉴욕에 센트럴파크에 설치한 ‘The Gates’ 앞에서

크리스토와 잔클로드 부부는 소위 말하는 점성학적 쌍둥이다. 1935년 6월 13일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1957년 20대의 청춘으로 파리에서 처음 만난 뒤 2009년 잔클로드가 먼저 갈 때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한 일심동체였다. 그들은 파리에서 예술에 대한 비전을 나눴고 이를 남김없이 구현하고 갔다. 크리스토가 미술 천재였다면 잔클로드는 아이디어가 많고 일 추진력이 뛰어났다.

크리스토는 불가리아의 부유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움 없이 살았으나 불가리아가 공산국이 되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다행히 프라하에 미술 공부를 하러 갈 수 있었는데 거기서 가까운 빈으로 스며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빈에서 공부한 뒤 파리로 갔으며 거기서 잔클로드를 만났다. 이미 미술학도 시절부터 포장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빈 캔 등을 천으로 싸고 끈으로 묶어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이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공산주의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크리스토는 어마어마하게 분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품으로 그에 대한 저항의도를 표현하고자 했다. 잔클로드와 함께 고안한 것이 빈 기름통 240개를 장벽처럼 쌓아 길을 막는 것이었다. 물론 경찰에서 이를 허가할 리 없었다. 그들은 불법으로 통을 쌓았고 그 뒤에 경찰에 불려갔다. 그들의 긴 여정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불법체류를 해가며 작품을 구상하고 구현해 나갔다.

그들은 단 1센트도 국가보조금이나 스폰서링을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예술가적 독립성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던 것 같다. 다른 한 편 “진정한 예술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 크리스토의 설명이고 보면, 작품 비용도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프로젝트가 워낙 대규모였으므로 적게는 수십만 달러에서 많게는 10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했는데 그걸 다 해 냈다. 크리스토의 출중한 그림 실력 덕분이었다. 그는 처음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전개과정을 모두 그려 그 그림을 팔고 또 프로젝트가 완성될 때마다 모든 과정을 포착하여 사진첩을 냈다. 날개 돋친 듯 팔렸으므로 그 수익으로 다음 프로젝트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포장된 베를린 연방 의사당 1995년,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콜로라도 골짜기 커튼 1972년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베를린 의사당 포장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이 1971년이었으니 무려 24년을 끈질기게 기다린 셈이다. 모두 그런 식이었다. 20년 때로는 30년 이상의 준비기간을 거친 프로젝트도 있다. 1998년에 스위스 리헨이라는 도시에서 공원의 나무 178그루를 포장했는데 무려 32년을 기다린 끝이었다. 대부분은 프로젝트 허가를 받기 위한 설득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베를린 의사당의 경우 통일의 들뜬 분위기를 타고 마침내 성사될 수 있었다. 당시 헬무트 콜 총리가 끝까지 반대했으나 - “우리 연방 의사당은 예술가가 업그레이드할 필요 없다.” - 결국 의원들이 통과시켰다. 의사당 앞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어 즉흥 여름축제가 되었다. 그때 아마도 베를린 시민들이 모두 의사당의 팬이 되었을 것이다.

폴리프로필렌에 알루미늄을 입힌 내연성 소재를 별도로 주문 제작하였는데 총 10만 평방미터의 천이 소요되었고 15,600 미터의 밧줄을 썼다. 라이프치히의 공장에서 수백 명의 재단사들이 천을 자르고 꿰맸으며 헬리콥터와 크레인이 동원되고 90명의 전문 등반가가 달라붙어 설치했다. 1300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작품을 길어야 2주일 전시하고 나서 모두 철거하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전달하고 나면 포장지도 선물도 내 손에서는 다 사라지고 마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에 대해 크리스토는 “아무도 작품을 사서는 안 되고, 아무도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고 누구도 입장료를 내서는 안 된다. 우리 작품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소유는 자유의 적이기 때문이다. 소유란 영구성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작품을 남겨둘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그들의 포장 작품은 모두에게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

포장된 베를린 연방 의사당 1995년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포장된 베를린 연방 의사당 1995년 Wolfgang Volz, © Christo and Jeanne-Claude

그들의 작품은 사진으로, 스케치로, 그리고 영화로 남아 있다. 이렇게 기억의 매체 속에만 작품이 남기 때문에 이를 <생태 미학ecological aesthetics>이라 부른 평론가도 있다. 포장 소재로 썼던 천은 모두 재활용하거나 조각조각 잘라서 다음 프로젝트 관람객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작품의 흔적을 물질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의 예술을 어떤 경향에 집어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처음 구상부터 마지막 해체 작업까지의 과정, 수백 명 내지는 수천 명의 도우미들과 함께 작품을 설치하는 퍼포먼스, 수백만 명의 관람객이 줄을 지어 모여드는 현상 등에 비추어 삶의 예술, 혹은 사회예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크리스토는 자신들이 작품을 설치했던 장소나 풍경 그 자체가 어떤 예술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이것을 ‘보이게’ 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작품을 만드는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라는 판박이 질문을 하지만 크리스토와 잔클로드의 대답은 늘 이렇게 심플했다.

누구나 일상에서 선물을 포장하거나 보자기로 물건을 싼다. 그러나 이를 예술로 처음 정의한 이는 미국의 사진작가 멘 레이였다. 1920년에 재봉틀을 포장해 놓고 <이시도르 두카스의 수수께끼>라는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붙인 적이 있다. 조각가 헨리 무어 역시 1942년에 <포장된 오브제를 바라보는 군중>이라는 스케치를 남겼다. 포장한다는 것은 감추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물체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더 잘 보이게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는 1972년에는 콜로라도 산골짜기를 포장했다. 골짜기를 어떻게 포장했는지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설명이 필요 없다. 많은 사람이 포장예술을 시도했지만 크리스토와 잔클로드는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축제처럼 즐길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높이 사고 싶다.

그가 마지막으로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한 작품이 사후에 완성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2021년 가을에 드디어 파리의 개선문이 포장된다. 실은 올해 포장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내년으로 연기되었는데 크리스토는 기다리지 못하고 가버렸다. 1984년 퐁뇌프를 포장한 뒤 파리에서는 두 번째의 대형 프로젝트다. 더 오래 살았다면 언젠간 광화문도 포장하지 않았을까?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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