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신잡] 위노그론드는 다시 숲으로 갔다
[고정희 신잡] 위노그론드는 다시 숲으로 갔다
  • 고정희 박사
  • 승인 2020.06.29
  • 호수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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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박사
고정희 박사

[Landscape Times] “숲에서는 인간의 두 가지 무기 – 언어와 카메라 - 가 한계에 부딪힌다. 숲은 카메라 렌즈에도 스케치북에도 화폭에도 담기려 하지 않는다. 숲은 붙잡지 못한다. 숲은 언어로도 묘사할 수 없다.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구구절절 장황해지거나 구태의연함에 머물고 말 것이다.” - 존 파울즈(John Fowles ‘The Tree’)

그렇게 말해 놓고도 존 파울즈는 결국 나무에 대해 에세이 한 권을 썼다. 김훈 작가도 장편 소설을 하나 써야 숲을 묘사할 수 있었다. 왜 굳이 숲을 언어로 묘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소설 작가들은 그래야 하는가 보다. 숲은 온몸으로 느끼면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숲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마법이 전해지지 않는지. 말만 들어도 도시의 먼지가 사라지고 깊은 향이 느껴진다.

숲 이야기로 올해 신잡을 열었다. 하다 보니 자주 숲이나 나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이번에는 <숲의 마법을 읽는 여인>을 한 명 소개할까 한다. 숲의 마법을 읽게 해 준 여인이라 해도 좋겠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스튜디오 불칸>을 운영하는 조경가 로빈 위노그론드(Robin Winogrond) 여사에 대한 얘기다. <환경과 조경> 잡지에서 이미 스튜디오 불칸의 작품을 하나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다(성 갈렌시의 자연사 박물관). 스튜디오 불칸은 화산 스튜디오라는 뜻이다. 용암이 분출되는 그 화산 맞다. 내가 보기엔 활화산인 것 같다. 네 명의 공동 사장이 이끄는 구조인데 – 유럽에서 매우 보편화 된 운영 형태 -, 그중에서도 실질적 대장은 로빈 위노그론드 여사인 듯 보인다. 본인들은 모두 같다고 말하지만 그럴 리가 있는가. 세 명 이상이 모이면 한 사람이 대장 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잡지에 문제성 있는 글을 기고하는 것도 위노그론드 여사이고 중요한 심포지엄 등에 초대받아 가는 것도 위노그론드 여사이며 기자들도 위노그론드 여사하고 주로 인터뷰를 한다. 그런데 곧 해체된다는 소식이다.

숲을 읽는 여인 위노그론드
숲을 읽는 여인 위노그론드

 

조용하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스위스의 한 가운데에서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여인. 최근 가장 주목받는 조경가라 해도 좋겠다.

스위스 우스터 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다. 취리히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 정도 떨어진 그라이펜제라는 호숫가에 그림처럼 자리 잡았다. 남서쪽에 호수를 안고 북동쪽에 깊은 산을 등진 배산임수의 도시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숲을 파고 들어가며 도시를 짓다가 깜박 잊었는지 도시 속에 숲이 한 자락 남아 있다. 본래 숲이 도시를 감싸줘야 하는데 이 경우 반대로 도시에 갇혀버린 숲이다. 그래도 면적이 10,000㎡이니 숲 속에 들어가면 도시가 까마득해진다. 우스터 시에서는 문득 이 숲을 근린 휴양 공간으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 진한 자연체험에 대한 도시인들의 요구가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일드 우드 플라자(Wildwood Plaza)라 이름을 정하고 2013년 위노그론드 여사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두 번째 둥근 ‘플라자’. 어린나무들이 빈자리를 빽빽하게 채워가는 중이다. © Studio Vulkan
두 번째 둥근 ‘플라자’. 어린나무들이 빈자리를 빽빽하게 채워가는 중이다. © Studio Vulkan

위노그론드 여사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오래 숲속을 헤매다 나온 그의 헝클어진 머릿속에 그림 한 점이 떠올랐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라는 추상 화가의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은 위도 아래도 없고 왼쪽 오른쪽도 없어서 거꾸로 걸어 놓은 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위노그론드는 숲이 마치 그의 그림과 같다고 생각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왼쪽도 없고 오른쪽도 없었다. 물과 같다고도 느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지만 물속에 들어가 잠기면 세상이 그저 물일뿐이다. 숲도 이와 같아서 숲속에 들어가면 세상이 그저 숲일 뿐이다.

\그런 곳에 어떻게 플라자를 만들 것인가. 스튜디오에 책상 앞에 앉아 있노라니 마법이 안개처럼 사라지면서 숲에서 보았던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폭풍이 뿌리째 쓰러뜨린 개암나무들이 커다란 빗자루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무너진 뿌리가 하늘로 솟구치며 새로운 삶의 조건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는 마치 ‘살아남기’라는 연극 무대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늘 바람에 내몰린 동쪽 사면엔 지나간 폭풍으로 나무들이 아예 뽑혀 나간 자리에서 새로운 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린 너도밤나무가 가늘고 길게 서둘러 자라는 사이사이에 체리 나무와 피나무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아마도 인근 주택 정원에서 날아온 것이 분명했다. 한편 늠름한 청년 너도밤나무들이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던 모습도 떠올랐다. 바람의 피해를 덜 받아 보호된 서쪽 사면이었다. 보들레르가 말한 살아 있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신전이 연상되었다.

숲에 적어도 세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이 존재한다는 데 착안했다. 숲은 서서히 자라고 변한다. 그리고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젊은 숲, 성숙한 숲과 소멸해 가는 늙은 숲이 나란히 존재하는 대가족이고 세상이다. 이 변화의 과정을 사람들이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노그론드는 다시 숲으로 갔다. 숲속에는 빈터가 있기 마련이다. 헤매던 끝에 그런 빈터를 세 개 찾아냈다. 이미 존재하는 오솔길로 연결될 수 있도록 위치를 잡고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100미터에서 2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불과 100미터, 200미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상이 전개되는 것이 신기했다. 하긴 몇 십 보만 떨어져도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 숲이다. 빈터를 원형으로 정리하여 ‘플라자’를 만들었다. 방향성을 일체 배제하기 위해 원형으로 잡은 것이다. 숲에 둥근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들어가면 물에 잠기듯 숲에 잠길 수 있기를 바랐다.

너도밤나무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는 곳에 첫째 원을 그렸다. 두 번째 원을 그린 곳에선 어린나무들이 빈자리를 빽빽하게 채워가는 중이었다. 휜 나무, 늙어 쓰러진 나무, 갈라진 나무들이 와일드하게 서로 얽혀 마지막 생명을 이어가는 곳에 세 번째 원을 그려 넣었다. 바람과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숲의 단면이다. 원 내부를 약간 정리하고 너도밤나무 기둥을 잘라 바닥에 박아 넣었다. 와일드우드 플라자가 완성되었다.

위노그론드 여사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위스콘신 대학에서 어번 디자인을 공부하고 여러 해 시카고에서 일하다가 다시 조경학을 공부하여 마스터를 땄다. 그리고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갔다. 거기 예술 대학에서 조금 더 공부한 뒤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스위스 취리히에 자리 잡았다. 불칸 거리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그래서 스튜디오 이름을 그리 붙였다.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다. 기능적, 합리적 분석을 거부하고 직관적으로 접근하여 직관적으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하여 주목받게 되었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고정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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