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박사
고정희 박사

[Landscape Times]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글의 분량이 부쩍 줄어든다. 한자어를 많이 쓰는 우리글의 속성상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긴 독일어 단어라도 대개는 두세 음절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걸맞은 사자성어라도 얻어걸리면 문장 전체를 단 네 글자로 줄일 수 있으므로 글은 더욱 짧아진다. 그런데 거꾸로 간단한 독일 문장을 아주 길게 설명해야 하는 때도 있다. 번역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에둘러 말하거나 설명하듯 번역해야 한다. 양국의 제도 차이, 의식 차이에 기인하는 문장이 그러하다.

‘공원 이용에 관한 수칙’에 예외 없이 포함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이 문장은 다시금 공원 녹지나 산책로 입구에 팻말이 되어 서 있는 경우도 많다. “Betreten (ist) auf eigene Gefahr.” 라는 문장인데 에둘러 표현하자면 “여기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굳이 들어가서 사고가 나거나 다치면 그건 당신 책임이다.” 정도이다. 무척 야멸차게 들린다. 그러나 대개는 겨울에 해당 사항이 많다. 빙판 주의 등의 경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원에는 대개 겨울에 내다 걸지만, 등산로나 숲길에는 반드시 걸려있다. 숲길이 위험할 수 있음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사실 평화로운 공원이나 녹지에서도 은근히 사고가 잦다. 특히 어린이 놀이터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그것이 보험 문제와 겹치면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이용자 책임’ 내지는 ‘부모의 자녀 보호책임’이라는 원칙을 만들어 둔 것이다.

물론 일방적으로 이용자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원 녹지와 놀이터는 원칙적으로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보살펴야 한다. 이를 ‘교통안전 책임’이라고 한다. 산책도 교통에 속하기 때문에 교통안전에 포함하며 독일에서는 민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통안전이라고 하면 우선 자동차가 연상되므로 그냥 안전책임이라고 하자. 안전책임은 원칙적으로 해당 토지나 시설의 소유주에게 있다. 다시 말하면, 도시 숲이나 공원 등, 시유지의 경우 관리 소홀로 사고가 났더라도 담당 직원 개인에게 보상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강풍에 뽑혀 행인이 다치는 경우 또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이때 소유주, 즉 관에서 안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면 이용자들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인지할 책임이 있다. 특이하게도 모든 일에 법규를 세세히 만들어 놓은 독일에서 안전에 대해서는 이런 민법상의 기본 원칙 외에는 세부적인 법규를 만들지 않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며 안전책임과 이용자 책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건별로 시설 소유주가 안전책임을 유기한 것인지, 이용자가 자기보호 책임을 망각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가 아이들 보호책임을 소홀히 한 것인지, 혹은 불가항력이었는지를 가려야 하는데 대개 판례를 참고한다. 1965년 이 분야에서 최초의 판결이 내려진 이후 지금까지 약 2천여 건이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2010년 여름 쾰른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플라타너스의 죽은 가지 두 개가 부러져 떨어지면서 나무 아래 주차했던 승용차를 훼손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오전 도로관리사가 그 나무를 점검했고, 죽은 가지를 발견하여 잘라야 한다는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그런데 미처 자르기 전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사 결과 2년 터울로 점검한다고 했다. 그것이 충분한지 판단하기 위해 FLL이라는 조경시공연구협회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2년 터울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되었다. 담당 기관에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책임을 다했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적정 주기로 점검했고 죽은 가지도 인지했으며 잘라내야 한다고 보고까지 했는데 자르기 전에 부러진 것은 불가항력에 해당한다. 언제 부러질지 시간까지 예측할 책임은 없다. 덧붙이자면 주차하기 전에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은 차주의 책임이다. 그 정도의 자질은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 1965년의 <가로수 판결>이다. 사건은 1960년에 터졌지만, 재판이 1965년에 끝났으니 꽤 오래 걸린 사건이다. 1960년 어느 날 큰바람이 불어 가로수가 쓰러졌다. 50년 된 노르웨이 단풍이었다. 쓰러진 나무가 마침 지나가던 승용차를 덮쳐 차도 훼손되고 차를 타고 가던 부부도 다쳤다. 이 부부는 도로관리과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고 지방법원에서 승소했는데 이에 불복한 도로관리과에서 항소하여 대법원까지 갔으나 결국 패했다. 도로관리과에서 주장하기를 “우리는 관리지침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가로수를 점검했다. 아무 이상 없었다. 수관도 푸르렀고 마른 가지도 없었다. 강풍이 불어 쓰러진 것을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했다. 전문 감정사를 불러 진단케 했는데 알고 보니 나무 밑동에 곰팡이가 번져 속으로 썩어가고 있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겉으로 보아도 썩어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니 도로관리사가 자세히 살펴보았다면 충분히 위험을 예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담당 도로관리사는 점검 당시 나무 밑동에 잡초가 우거진데다 낙엽이 쌓여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이 정황은 인정되지 않았다. 담당 판사는 낙엽을 걷어내고 잡풀을 헤쳐 살펴보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때 판사가 장장 11페이지에 달하는 긴 판결문을 낭독했는데 이것이 상당히 흥미롭다. “물론 가로수마다 일일이 올라가 그 많은 가지를 다 점검하고 줄기마다 두들겨보고 밑동마다 발로 차보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수관이 푸르르고 마른 가지가 없는지 등만 점검하는 것으로는 수목의 안정성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한 뒤, 원칙적으로 담당 도로관리사가 아닌 그의 “상관이 직무를 소홀히 한 것”이라 했다. 도로관리사에게 내린 수목안전관리 지침이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이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아마도 사전에 전문가들에게 충분히 자문을 얻었던 것 같다. 수목 관리 요령에 대해 매우 세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히 점검한다고 해도 사고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백 퍼센트 완전한 점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수가 발생할 수 있고 천재지변이라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가로수를 몽땅 베어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을 수 있음은 누구나 인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만 본 소송 건에 관해서는….”

판결문이 거의 지침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이후 학계에서는 수목 관리와 위험 평가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5년 위의 조경시공연구협회(FLL)라는 기관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2003년에는 클라우스 마테크라는 물리학자 겸 생물 역학자가 ‘겉보기로 수목 위험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법Visual Tree Assessment’을 고안하여 환경상을 받은 이후 새 지평이 열렸다. 이에 바탕을 두어 2004년 드디어 수목 위험 평가지침을 만들었다. 수목 위험 평가사라는 직업도 생겼다. 현재 전국 26개소의 수목원과 조경 업체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갖춰 수목 위험 평가사를 양성하고 있다. 2011년에는 「놀이기구와 놀이터에 대한 유럽 표준DIN-EN」도 개발했으며 놀이터 평가사라는 직업도 생겼다.

처음에 언급한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를 물론 ‘진입 위험’이라고 단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것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바로 그사이 어딘 가에 쌍방 책임의 경계가 존재한다.

케테 콜비츠 공원 나무에 걸어 둔 안내판. 겨울철 공원 관리를 안 하니 위험할 수 있다는 표지가 걸려있다. © Xaver X. Dreißig
케테 콜비츠 공원 나무에 걸어 둔 안내판. 겨울철 공원 관리를 안 하니 위험할 수 있다는 표지가 걸려있다. © Xaver X. Dreiß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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