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조경사회 20주년을 맞이하던 제10대 회장을 맡았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나 30주년 행사를 개최 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내 임기 때에는 우리나라가 IMF 관리하에 있었으므로 사회적으로 우리 분야는 물론 모든 산업분야가 경제적으로 그리 녹녹치 않은 시절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단체의 운영에 대한 경험과 재능이 비재한 내가 맡아 선대 회장님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에 손상이나 가지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현상 유지만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임기를 시작한 것이 1999년 3월이었다.
나는 조경분야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도 않고 분야의 영역도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1970년대 말에 국영기업체인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에 입사하여 조경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1978년 입사) 간간히 조경사회 정기총회, 조경기술사 모임 등에 참여만하고 적극적인 활동은 못해 오다가 1988년에 주택공사를 퇴사하고, 김윤제 고문님 회장 재직 때부터 조경기술자들의 골프 모임인 사목회(士木會)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북한 대표단 참석 불발 아쉬워
그 시절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92 IFLA 한국 개최 시의 일이다. 나와 장태현 교수(청주대학교)가 북방(중국, 북한)담당을 맡아 중국과 북한의 조경전문가를 대회에 참가케 하는 일을 맡았으나 결국에는 중국전문가는 참여했지만, 북한전문가를 참여케 하는 성과를 못 올리고 고생만 하였던 생각이 난다.
나는 중국과 한국이 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91년 여름에 한양대 오휘영 교수, 청주대 장태현 교수, 김학범(현 한경대교수), 안계동 소장, 이용훈 고문과 함께 중국 연길에서 개최가 되는 세계한민족과학자대회에 참여하였다. 그 대회에 북한 조경가들이 참여한 계기로 ’92년 한국IFLA대회 북한 조경가 참가를 요청하였고, 참여한 북한측 인사들의 긍정적 반응이 있어 구두로 약속을 하고 초청장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에 초청장을 보내려고 했으나 북한에 초청장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중국 연길시를 통하여 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아 서로 중국을 방문하여 초청장을 건네고 초청에 응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중국측 관계자의 연락으로 그해 여름 연길시에 임무를 가지고 방문을 하였다.
북한 조경가들을 대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절차와 방법에 대하여 미팅하기 위함 이었는데, 만남이 쉽지 않고 어려움이 많았었다. 연길시의 허창률 원림국장이 연락과 주선을 하였으나 북한의 체제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접촉과 참여 요청이 순탄치 않아 몇 번의 약속 일자를 바꿔가며 북경으로 다시 돌아와 몇 번의 비자를 연장하여 북한 조경가를 1달 만에 만나기는 하였으나 결국 성사를 못시켰다. 결국 27시간 동안 기차로 북경까지 오가며 장교수는 한쪽 어깨의 마비로 인한 불편함과 가져간 여비의 부족, 예정을 잡을 수 없는 교통편으로 움직이면서 군 생활보다도 더 혹독한 고생을 하였다.

1999년 3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내 임기인 제10대 회장 시절을 회고한다.
취임을 하면서 전임 회장님들이 하셨던 조경사회 심포지엄, 체육대회, 회원증가, 회비확보 등은 지속하면서 조경사회 사단법인화, 정기조경기술지 발간, 20주년을 맞이하여 현상설계작품집 발간, 사무국 직원고용 등의 공약을 하였다.

건교부는 왜 계속 반려했을까?
조경사회 사단법인 등록은 지금까지 친목단체로 존재하던 조경사회를 제도적인 단체로 인정을 받아 한 단계 위상을 높이는 사항으로 역대 회장단에서 염원이었던 숙원 사업이었다.
윤성수 회장 대에 내가 부회장으로 당시 건설교통부에 법인등록을 함께 추진을 하였다. 주택공사 시절에 신도시업무를 수행하면서 함께 일을 수행한 건설환경과가 조경사회 법인등록 주관부서 이어서 추진하여 수차례 접수했으나 담당자의 결재 과정에서 번번이 폐기되어 부진한 상태로 이어져 왔다.
그 후 내 임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등록 신청을 했는데 건설교통부에서는 등록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유인즉 조경학회가 건설교통부에 사단법인 등록이 되어 있으므로 유관 성격의 조경사회를 중복등록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나고 법인 등록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계기가 된 것은 강원도 양양동부지역 IFLA대회였다. 그 해 가을 강원도 양양에서 제9차 IFLA 동부지역회의가 개최될 예정에 있었다. 그 준비를 전임 윤성수 고문과 조경학회장, 그밖의 조경관련 단체장들이 연합해 준비해 왔었고 그 업무를 내가 인수 수행하게 되었다.
우리 조경사회가 재정분야를 담당하기로 합의를 하여 회의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 하는 업무를 수행하여야 했다. 대회 준비는 주로 조경학회(김유일), 전문건설협회(손현식), 조경사회(김기성)가 연합하여 추진하기로 하여 자주 모임을 가지고 진행 했으며, 제일 연장자인 김유일 회장이 위원장을 하고, 나는 부위원장으로 대회 때까지 같은 조직으로 일을 하였다.
특히 준비 과정에서 대회 운영자금 확보를 맡아서 하는 조경사회가 법인등록이 안되었으므로 찬조와 협조를 하는 기업체에 영수증을 발행 할 수가 없어 법인등록 된 조경학회로 영수증을 발행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일로 별도의 계정을 만들어 처리하자고 협의를 하였으나 학회 측의 반대로 이루어 지지 못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 정산을 하고 남은 자금을 학회와 조경사회와 분배하여 서로 관리하자고 했으나 이도 반대하여, 최종 안으로 ’92년 IFLA 때 잉여금과 이번 결산 잉여금을 함께 관리 운영하여 IFLA 관련한 이 자금을 운영 관리하자라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학회 측에서 이마저 반대를 하였다.
한번 학회의 통장으로 입금된 자금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우리회가 사단법인에 등록을 못하였음에 울분만 터뜨리고 말았다. 조경사회가 임의단체로는 기술자의 발전과 회원의 권익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을 이 기간 동안 다시 느꼈다. 이를 계기로 우리회가 공인된 단체로서 회의 발전과 조경영역의 발전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선적으로 법인등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문화재청에 등록 방법, 환경부에 등록방법을 타진 협의하던 중에 경희대학교의 명예교수인 진희성 교수께서 정년퇴임 시에 환경청(그 당시)에 ‘조경계획 연구소’라는 등록된 법인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 조경사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연구소의 인수 의사를 표하고, 협의를 하여 많은 진전을 보기에 이르렀다. 법인등록은 선대 회장님들의 계속된 숙원 사업이었으므로 이를 조경사회 초대 원로 분들께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한양대의 오휘영 교수께서 환경부의 차관을 비롯한 고위직에 조경사회의 역할과 취지를 설명하고, 조경사회에서 직접 신청을 하여 등록하는 방법으로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환경부의 자연정책과를 창구로 하여 1999년 10월부터 협의를 하였으나 ‘한국조경사회’라는 명칭으로는 환경부의 업무 성격상 괴리가 있고, 조경은 건설교통부 업무라서 부처간의 갈등의 소지가 있어 곤란함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많은 조정을 하였으나 명칭에 이견을 보여 진척이 안 되던 끝에 우리회에서 ‘조경(造景)’의 뜻을 풀어서 경관(景觀)을 조성(造成)하는 일로 ‘경관계획·조성회’라는 명칭으로 최종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협의 과정에서 환경부의 입장으로 ‘환경’과 ‘협회’를 첨가하자고 주장했다. 끝까지 ‘협회’가 아닌 ‘회’로 하려 했으나 관철이 되지 않고 최종으로 ‘사단법인 한국환경계획·조성협회’라는 명칭으로 2000년 2월 말일로 승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조경사회가 창립하여 20주년이 되는 해에 법적으로 인정을 받는 단체가 되었음에 회원 모두가 감격하고 기뻐 할 일이었다. 그 당시 등록업무에 많은 도움을 여러 분들이 주셨으나 특히 오휘영 교수, 김귀곤 교수의 도움이 컸고 환경부의 유지영 과장, 이 국장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법리적인 지식이 없는 우리에게 명칭에서부터 정관의 문구, 자구 하나 하나를 일일이 친절하게 수정하고 고쳐준 자연정책과 직원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표한다.
다음으로는 우리 조경사회의 건설교통부 사단법인 등록에 관하여 피력하기로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회원들이 진행 과정을 잘못 인지를 하고 있어 이번 기회에 그 진위를 밝히고자 한다.
그 당시 건설교통부와 환경부의 업무가 서로 중첩됨과 이견이 있어 두 부처의 담당 국장들간의 업무협의가 빈번하였다. 그 일로 두 부처 국장회의 시 자연스레 환경부의 자연환경국장이 우리 조경사회의 사단법인 환경부 승인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건설교통부의 국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부처로 귀청 후 담당 과장을 불러 호되게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조경이 건설교통부 업무인데 어떻게 환경부에 법인등록을 하였느냐는 내용이었고 이에 대한 대책을 보고토록 지시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회가 건교부에 법인등록을 수차례 신청했으나 그때마다 담당과에서 일방적으로 거절하였음을 역력히 알 수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건교부 건설환경과의 강병옥 사무관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건설교통부 중앙설계 심의위원이었으므로 건설환경과 과장을 비롯한 사무관, 직원들과 친분이 있었다. 내용인즉 자기들이 국장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는데 조경사회 사단법인 신청서를 급하게 접수를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조경학회 차기 학회장 경선이 있었는데 청주대 권상준 교수께서 출마를 하였고, 당선이 되었다. 권 교수가 건교부 국장과 지인이라서 우리 조경사회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 재차 건교부 사단법인 등록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탁한 사항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권 교수의 지원이 상당히 도움이 됐고 감사히 생각한다.

‘한국조경사회’ 명칭 꿋꿋이 지켜
이 때도 승인과정에서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명칭에서 건축사법처럼 조경사법이 없으므로 ‘한국조경사회’로 명칭을 붙일 수 없고, ‘조경기술자회’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건설환경과 담당자한테 한국조경사회 글자 한자라도 바꿔서는 신청을 못 하겠다고 통보를 하였다. 국장한테 조경을 환경부에 넘겼다고 질책은 받고 있었고, 우리회 역시 양보를 하지 않아 담당자의 어려움이 많았으나 그래도 강사무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우리의 요구대로 건설교통부에 ‘사단법인 한국조경사회’로 2000년 4월 24일 등록 승인을 받아 명칭을 바꾸지 않고 계승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환경부에 법인등록을 안했으면 한국조경사회가 언제 법인등록이 되었을까? 물론 참여정부 시절에 사단법인 등록이 많이 완화가 되었지만 상당기간 등록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우리회는 2개의 등록법인을 함께 운영하다가 2003년 3월에 분리하여 각각의 법인단체로 별도 운영하고 있다.

정기 조경기술지 발간

 

조경분야는 각 학회를 중심으로 학술지는 정기적으로 발행이 되고 있으나 조경사회 기술자들의 모임에도 타 분야처럼 기술지의 정기발행이 없어 새로운 기술을 정리 보급하는 일이 필요한 사항이었다. 우선 1년에 2번 봄과 가을에 정기기술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는 일이 글을 쓰는 일이라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우선 편집위원장 김경윤, 편집위원 김도경, 김두하, 신익순, 안계동, 이대성, 이상석, 조세환으로 실무를 잘 아는 대학교수 4인, 업계에 있는 4인 총 8명으로 구성하여 시행하였다. 특히 기술지를 편집하고 취재를 맡았던 사무국장 장종수, 위옥윤, 홍수연의 보이지 않는 노고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창간호는 2000년 3월에 발간되었고 그 내용은 발간사를 회장이 기고했고, 시사·기획으로 시사칼럼을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조경 전문기술인’을 한양대 오휘영 교수, 창간특집 ‘한국조경사회 20년 어제와 오늘’을 사회자 김윤, 참석자 김윤제 고문, 권오준 고문, 유의열 고문, 윤성수 고문, 김기성 회장, 정리는 장종수 사무국장이 맡아 진행했다. 무려 11쪽에 걸쳐서 창립총회부터 20년간의 회고와 고문들의 재임 시 수행한 내용과 자료 등을 회고하고, 장래의 조경의 비전 등을 대담하였다. 이 때 역사적인 자료를 많이 모아서 차기 사무국에 인계를 하였는데 그 자료가 현재 분실되었다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상설계 작품집 발간

 

2000년에 조경사회 창립2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 계획을 내가 회장 임기 시작과 동시에 착수를 하였다. 우리나라가 IMF 관리 하에 있어 조경 산업은 물론 전 산업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20주년 행사는 간소하게 하고, 30주년에 거창하게 시행하자는 결론을 내었고 다만 기념집 성격의 책자 발간과 20년간의 역사적 자료를 정리 모으자는 의견이 결정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 조경설계경기 발주가 그 전에 비해 현저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던 때로 지금까지 이뤄졌던 조경설계경기 작품들의 자료가 소실될 수 있다는 생각에 20주년 기념집 발간을 계획하였고, 1999년까지의 자료를 모아 ‘한국조경설계경기작품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1999년 9월에 발간 준비를 하였으나 자료를 모으기가 어려움이 있고, 자료를 어렵게 찾아도 설계작품이 소실되어 어려움이 많아 그 해 10월에 집필진을 김경윤, 김도경, 김성균, 김영대, 김태경, 변문기, 성종상, 안계동, 이명우, 이민우, 이석손, 진양교, 최신현 등 13명으로 구성 자료를 찾는데 중점을 두어 진행을 하였다. 초창기의 작품들은 진흙 속에서 진주 찾는 심정으로 하였으나 1987년 이전 것은 도저히 실을 수가 없어 ‘한국과학기술원 캠퍼스 기본계획’부터 1999년의 ‘선유도 공원화사업’, ‘관악구 패션문화의 거리’까지 정리 수록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에 집필 회의는 한 달에 2회씩 하여 3-4개월이 지난 뒤에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모임을 가졌는데 멀리 지방에서 바쁜 일정 중에도 참석을 해준 집필진에 감사 할 따름이다. 여러 번 편집회의 끝에 내용은 조형물, 광장, 가로, 공원, 커뮤니티와 도시, 환경과 생태로 구성하고 말미에 기획논단을 수록하였다. 기획논단에서는 초창기에 경험 하신 시립대 이규목 교수의 ‘조경설계경기의 명과 암’ 조경설계 서안 정영선 대표의 ‘설계경기의 한 이면사 되돌아 봄 그리고…’를 기획하였다.
정확하게 정리하고 모아서 발간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였으나 시간적, 경제적 문제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이 많았음을 통감한다. 그러나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최대한 찾아 자료를 정리하고 모아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조경설계경기의 역사적 자료가 되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

 

사무국 상근직원 채용 운영
내 임기가 시작되면서 사무국의 상근직원을 채용 운영하기로 하고 연봉 1200만원에 홍수연을 채용하였는데 조경사회의 재정이 열악하여 회장인 내가 600만원을 지급하고, 나머지 600만원은 조경사회 재정으로 충당하여 지급하였다. 채용한 이유는 법인등록이 된 후에 보고 사항도 많고 회계도 정식적인 회계 절차에 따라 집행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홍수연 직원이 사무국 사무실이 별도로 없어 내 사무실 한쪽 귀퉁이에 앉아 업무를 하고 박봉에도 열심히 해줘 대과없이 임기를 끝낼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기타 재임기간 중 있었던 일 몇 가지를 회고하여 보면 매년 참여하는 세계IFLA대회인데 1999년에는 조경학회와 IFLA주관 업무 갈등과 동부지역IFLA 양양 개최로 참여를 못하고 2000년 유럽 덴마크 코펜하겐 IFLA에 참석하고, 회의 종료 후 북유럽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3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핀란드의 공원에서 ’86아시안게임공원 조각품 모작 시비가 있었던 조각품을 볼 수 있었는데 함께했던 회원들이 모작이 아님을 확인 결론을 냈던 기억이 있다.
핀란드에서 저녁 5시에 호화여객선인 실자라인을 타고 밤새 항해를 할 때 갑판과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섬들과 그 경관들, 새벽 4시에 저편 바다 속에서 떠오르던 일출, 여객선 내부의 시설들에 취해 항해하여 다음날 아침 7시에 스웨덴에 도착하였던 평생 잊지 못 할 기억의 여행이었다. 스웨덴을 거쳐 노르웨이 오슬로에 도착 노르웨이의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온 피오르드를 따라 코치와 배를 번갈아 가면서 베르겐까지 도착한 그 자연의 경치는 말로서는 표현 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회고하면서 감사를 해야 할 회원들이 있다. 먼저 2번의 조경인 체육대회 기간에 솔선하여 진행에 협조를 했던 최종필 사장은 항시 에너지가 충만하고 판단이 명철해 진행을 깔금하게 처리해 줘서 고마움을 표한다.
그 다음은 직원으로서 사무국장 일을 맡아 고생한 장종수 소장에 무한한 감사를 한다. 바쁜 회사의 업무와 사무국 일을 빈틈없이 수행하고, 환경부와 건교부에 2개의 사단법인을 등록할 때 행정적 처리를 무리 없이 했고, 법적인 인정 단체로서 몇 가지의 연구용역도 차질 없이 마쳐준데 대하여도 깊은 감사를 한다.
그밖에 회사의 직원들의 도움에 대하여도 감사를 한다.

 

김기성(제10대 (사)한국조경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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