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정원이 있었다. 아주 큰 정원이었다. 정원이 얼마나 컸는지 세상의 모든 나무가 다 자라고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로 개울이 굽이굽이 흘렀다. 개울 이편에는 동산이 있었다. 동산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랐다. 개울 저편에는 늠름한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 잣나무 들이 빽빽하여 숲을 이루었다. 숲속 빈터에 어린 전나무가 혼자 서 있었다.

과일나무 들은 모두 흰색, 연분홍색, 선홍색의 꽃을 피워 온통 꽃구름 같았고 가지에는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사시사철 열매가 열렸다. 어린 전나무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매화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를 보며 감탄과 부러움에 작게 한숨 쉬었다.

그때 성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성인을 따랐다. 따르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많아 과일나무 사이를 가득 채웠다. 성인은 동산 높은 곳에 앉아 강연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죽은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성인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으나 개울 건너 숲속에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무는 모름지기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쓸모가 없으니 베어서 불에 던질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어린 전나무는 사색이 되었다. 반면에 개울 건너 아름다운 과일나무들은 콧대를 더욱 세웠다. 기분 좋아 가지를 흔들자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떡갈나무, 밤나무, 호두나무도 가슴을 활짝 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나무들이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자기의 열매가 더 달고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우겼다. 도토리나무도 지지 않았다. “내 도토리로 얼마나 많은 숲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줄 알아?”

“야, 조용히 해. 맛도 없는 주제에.” 밤나무가 이렇게 말하며 가지를 휘저으니 까칠한 밤송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호두나무가 껄껄 웃었다. “가소롭게들 그러지 말아라. 맛으로 보나 소중함으로 보나 이 호두와 비할 바가 아니지,” 잣나무와 은행나무가 킬킬거렸다. “너희 정말 웃긴다. 그런 걸 보고 도토리 키재기라고 하는 거야.”

“도토리 키재기는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세. 으흠.” 커다란 잣나무가 점잖게 꾸짖었다. 그리고,

“내 잣으로 말할 것 같으면…. ” 하면서 잣의 뛰어난 효능과 쓸모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크리스마스 트리. 헤르만 헤세 수채화. © Silvia Hesse
크리스마스 트리. 헤르만 헤세 수채화. © Silvia Hesse

 

큰나무들이 이렇게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어린 전나무는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쓸모가 하나도 없나? 그래서 불에 던져져야 하나?” 생각다 못해 개울을 건너 동산으로 갔다. 동산에선 강연을 마친 성인이 사람들과 담소하고 있었다. 어린 전나무는 성인 앞에 가서 섰다. 몸이 덜덜 떨렸다. 성인이 전나무를 보고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어서 오렴.” 했다. 그러자 용기가 조금 났다.

“저, 선생님.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저 정말 아무 쓸모가 없어서 불에 던져지나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성인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 기특하구나. 저기 큰나무들은 서로 잘났다고 뽐내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리고 잠시 나무들의 다툼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저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제부터 봄에만 꽃을 피우고 여름 내내 힘겹게 노력해야 가을에 열매를 맺을 수 있어. 가을이 깊어지면 잎이 모두 떨어져서 추운 겨울 동안 벌거벗은 채 덜덜 떨면서 인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특한 네겐 상을 주어야겠구나. 베여서 불에 던져지는 네 운명은 나도 바꿀 수가 없단다. 그 대신 이렇게 하자. 겨울이 오면 사람들이 너를 베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을 한가운데 또는 집의 거실 제일 좋은 자리에 세울 것이다. 네게 색색의 화려한 장식을 달아주어 그날 너는 가장 아름다워질 거야. 사람들이 네 앞에 모여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네게서 눈길을 떼지 못할 거다. 그리고 아이들은 너를 너무 사랑할 것이다. 그날 하루는 온전하게 너의 날이란다. 그리고서 땔감이 되어 불꽃으로 사라지겠지만 너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모든 나무 중에 가장 축복받은 나무가 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니, 상이 마음에 드니?”

그동안 고정희 신잡에선 환경과 조경에 대해 여러모로 불편한 얘기를 많이 해야 했다. 올해 우리는 모두 코로나로 인해 힘겨운 한 해를 보냈다. 그런 한 해를 마무리하며 뭔가 훈훈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은 작은 희망과 기적이 필요할 때다. 그래서 지난번 굴뚝새 이야기와 이번 전나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백년전 세계 제1차 대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서 헤르만 헤세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으며 이렇게 썼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본질은 성서나, 고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있다.”

2021년엔 우리 모두 굴뚝새나 전나무처럼 가슴에 작은 기적을 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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