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현 한국정원문화협회 회장  ⓒ한국조경신문DB
정주현 한국정원문화협회 회장 ⓒ한국조경신문DB

먼저 “정원은 조경이 아니다”(본지 지령658호 참조)라는 다소 극단적이고 도전적 제목으로 기고하신 평소 존경하고 면식 있는 송 박사님께 송구하고 겸연쩍은 입장을 혜량하여 주십사 하는 서두를 조심스레 전합니다.

「조경업체가 주로 하여 만드는(설계 시공하는) “정원이 아닌 그저 일정 시점의 경관을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 안타깝다는 내용과 그러면서 조경은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돈이 되는 시설이나 구조물 중심의 설계를 하기 때문에 정원선진국들의 식물중심 정원과 괴리가 크다고 한다.」

이는 전혀 동감이나 작은 동의도 하기 힘들다. 식물중심이 정원의 요체란 생각도 많이 편협하다.

조경이라는 분야는 근대화시기에 도입되었으며 영어인 ‘Landscape Architecture’를 같은 한자문화권인 극동아시아의 4개 국가(한국, 중국, 일본, 대만) 중 우리나라는 다르게 표기하였다. 각기 한국은 ‘조경’, 중국은 ‘풍경원림’, 일본은 ‘조원’, 대만은 ‘경관건축’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경”은 ‘경관을 만드는 일(造景)’이라는 뜻을 가지며 우리 나름의 해석을 통하여 만들어진 독특한 신조어이다. 이는 훌륭한 개념으로 건축과 토목과 같은 오래 천착되어온 개발과 반환경적 용어와 대비되는 친환경적이고 생태경관적인 분야이다. 조경은 소위 한국적으로 잘 만들어진 단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경관(景觀)은 ‘볕(景)을 보는 일(觀)’로 ‘볕’은 다시 Sunshine 혹은 Sunlight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원은 ‘뜰(ground)’, ‘뜨락(garden)’, ‘볕이 있는 마당(yard)’으로서의 장소(venue)이고 공간(space)인 것이다. 이는 외부공간을 뜻하는 ‘Exterior’로서 “건축의 바깥”을 주로 지칭한다. 정원은 통상적으로 Garden으로 번역되나 Yard, Ground 등도 포함된 개념이다. 또한 어원적으로도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말한다. 한자어인 원(園)도 둘러싸인 공간을 의미한다. 인류 최초의 정주공간 역시 성서(인류 최고, 최대의 발행책자)의 기록에 의하면 에덴동산(Eden Paradise, The Garden of Eden)으로서 건물(indoor)이 아닌 정원(garden)이었고 이는 일정하게 닫힌 공간이었다. 조경은 어떤 형태로든지 정원을 만드는 일이다. 다만 그 규모와 용도, 기능과 시설, 대상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구현될 뿐이다. 그러한 정원의 범위는 수목원과 식물원을 넘어서는 가장 포괄적 대상이고 영역이다.

조경은 “Tame(d) Nature / 길들여진 자연”이라고도 하며<진양교>, 정원은 ‘Third Nature / 제3의 자연’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정원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스스로 소외시키는데서 시작된 문화’<오경아>로서 무엇보다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지속성을 위한 행위로서 식물을 기르는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식물은 곡물이기도 하고 과실이기도 했으며 나아가서는 관상의 여유까지 생겨난 것이다.

조경은 식물소재를 주된 요소로 다루기에 외부공간의 중점 경관대상으로서의 식물소재의 가치는 다른 어떤 개발 위주의 분야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조경분야는 식물만을 중시하지는 않으며 보다 큰 시야를 갖고 있다.

 

용안사의 선정원
용안사의 선정원

 

일본의 ‘고산수 정원의 백미’로 꼽는 우주와 해안을 표현했다는 ‘용안사의 선정원’은 식물로는 약간의 이끼류가 있을 뿐 자갈의 무늬와 자연석 몇 점이 전부이다. 작년 LH가 제2회 가든쇼를 하며 만든 평택 고덕 국제화지구 내 동말근린공원에서 독일 초청정원작가 마르틴 라인-카노의 아스팔트 포장을 주제로 한 정원은 또 어떠한가? 라인조명과 포그 노즐 분수를 더한 격자형 아스팔트가 정원의 전부였다.

중정에 포장(돌, 데크, 자갈 등) 혹은 수면 주위에 덩그러니 나무 1주만 서 있는 모습은 어떤가? 아마 식물위주의 정원만 정원으로 보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체험은 좀 더 큰 영역과 시야를 가진 조경가들을 이해하기 다소 어려울 수 있겠다.

정말 조경시설물과 구조물 중심의 설계 시공이 비용이 많이 드는 조경일까?

식물 위주로 조성하는 정원은 비용이 적게만 들까?

 

독일 마르틴라인-카노의 아스팔트 포장을 주제로 한 정원
독일 마르틴라인-카노의 아스팔트 포장을 주제로 한 정원

 

중정에 자리한 나무 한 주
중정에 자리한 나무 한 주

우리나라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2013년은 첼시플라워쇼가 100주년이 되던 해였는데, 그때 송 박사님이 방문하셨던 모양이다. 필자는 2010년 경기정원문화박람회 개최 직전에 경기도 관련 공무원들과 첼시플라워쇼를 방문했었고, 황지해 작가는 이듬해와 2012년 연거푸 첼시플라워쇼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식물 외에 통상 100가지가 넘는 정원의 다양한 가구들(Garden Furniture)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조경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첼시플라워쇼는 세계 최대의 꽃 경연장이기도 하지만 정원용품이 손장갑에서부터 트랙터까지 무려 1만5천여 종이 넘는 가든관련 시설용품 전시장이기도 하다.)

물론 정원의 주된 구성요소인 식물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정원에서 식물소재의 중요성과 가치를 폄훼하고 하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식물중심의 정원만이 선진 정원이고 식물소재만을 정원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편향되고 편협한 사고 역시 수용키 어려울 것이다. 송 박사님의 식물중심의 생태적 공간배치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선진국 정원답사에 의한 감상은 그러한 정원 위주로 보아온 자기 취향에 따른 시각에 근거한 논리에 다름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가=정원디자이너는 등치하여도 무방하나 현재 모든 조경가가 정원디자이너라고 강변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조경가만이 “정원”을 독점해야 한다고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분야의 주류가 될 자격은 충분하기 때문에 조경가가 ‘정원’을 하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원(Park)은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근대화의 산물이다. 영국 리버풀에 있는 버켄헤드공원은 조경설계가 조셉 펙스턴의 작품으로 1847년 개장하였다. 그리고 이미 198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오픈스페이스 시스템은 공공정원(public garden) 개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 공공정원협회(APGA)가 만들어지면서 수목원, 식물원뿐만 아니라 동물원, 수족관 등 공공문화 예술 건축 공간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 요즘은 ‘힐링(Healing/치유)’을 전가의 보도처럼 쓰고 있다. 힐링 랜드스케이프까지... 힐링 역시 어느 특정분야에서 독점할 수 없는 추상적 표현이고 단어이다.

영국의 정원문화가 과연 식물 중심이었을까? 장원(莊園)이란 영주의 거대한 Manor(저택)를 중심으로 주변에 화단정원과 농경지가 분포되고 종사자들의 텃밭이 따라오는 마을이 자리 잡았으며 하나의 마을공동체 성격으로 자연풍경적 정원 양식이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는 건축의 크기와 수량이 무척 많고 정원의 형태 역시 다양했으나 그 땅의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그러한 마스터플랜이 쉽게 읽히지 않아 그냥 식물위주의 정원으로만 보인 것뿐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평면기하학적인 정원도 이탈리아의 노단식 정원도 식물소재에만 관심 있는 사람의 시선에는 정원식물만 보일 뿐 골조와 구조를 이루는 정원의 전체 모습은 크게 관심가지지 않으면 한 눈에 이해하기 어렵다.

다소 실용주의적인 독일의 경우도 대부분 키친가든 같은 텃밭이 별도의 Klein Garten(분구원)이란 독립된 영역으로 조성되어있는데, 여기서도 가든하우스와 가든쉐드 같은 시설물은 존재하지만 소박(?)하기에 놓치기 쉽다. 그래서 선진정원국가들은 식물위주의 정원이라고 손쉽게 단정 짓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리라고 본다.

제대로 된 정원전문가, 조경전문가는 “정원의 틀”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고 공간에 대한 기능과 미적 구성을 고민한다. 물론 작은 규모의 정원을 마스터플랜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우스운 작자이지만 소소한 정원이라도 전문가가 접근하는 정원의 모양과 형태는 취미로 시작하여 어깨너머 곁눈질해서 만드는 정원조성과는 결이 다르며 골격이 다르다.

물론 식물중심, 수목중심의 정원이 결코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멋진 정원 공간을 꾸민 곳 역시 많다. 하지만 디자인 된 정원의 틀 안에서 식물소재의 가치와 역할을 극대화 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정원디자이너이며 제대로 된 조경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식물을 알고 수많은 초화류 들을 구분하여 희귀종까지 이름을 줄줄 외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가든디자이너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사실 필요시에 정원디자이너가 찾아보는, 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전원주택과 정원주택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가든디자이너와 가드너 역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진정한 조경가는 가든디자이너에 가깝고, 취미로 시작하던 공부해서 시작하던 실제 정원을 가꾸는 사람은 전문성의 경중에 관계없이 가드너인 것이다. 다만 아마추어이냐 프로이냐는 열정과 경험의 차이로 구분되어진다고 본다. 요즘 너무 쉽게 정원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차제에 서구에서 이미 일자리(직업)로 자리 잡은 ‘경관윤리’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정원과 동양의 정원은 이원적이면서도 동질적인 것이 많다. 식물중심이냐 시설중심이냐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구성의 분포나 밀도에 따라 구분되어 보이겠지만 사실 어디까지가 정원시설이고 어느 선까지 정원 식물인가도 애매하다.

결론적으로 정원은 식물중심이 정답이므로 조경가의 정원은 정원이 아니다 라는 시각은 매우 편파적인 표현이고 자기중심적, 체험적 사고라고 보므로 앞선 기고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연이어 제기해본다.

P.S: “한국형 실용정원의 정체성 확보 시급”이란 부제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 본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독자의 개인 또는 단체의 목소리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이번 주에 게재된 '기고'는 지난 제659호에 게재된 기고문에 대한 반론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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