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규(푸르네 객원 정원사·영국 에식스대 위틀칼리지 박사과정)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정원을 가리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즐거움’이라 표현했다. 돌이켜보면 정원은 사람들의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것들로 채워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채워질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원은 건물에 비해서 보다 유연하고 빠르게 변화해 왔다. 아마도 시대의 기호에 맞게 정원을 변화시키는 것이 건물을 바꾸는 것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 초대 수상이었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1676-1745)은 Norfolk주에 무려 280만 파운드(한화 약 50억원)의 대저택 호튼홀(Houghton hall)을 지었는데, 2만 평방미터나 되는 정원을 만드는데 약 11만 파운드(한화 약 2억원) 정도를 사용했다. 당시 가장 고가의 저택이었던 그의 집은 많은 귀족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당연히 많은 부유한 귀족들이 자신들의 저택을 리모델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저택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사비의 부담 때문에 건물을 직접 재건축하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 드는 정원의 리모델링을 통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정원의 리모델링은 정원 전체를 갈아엎어 완전히 새로운 정원으로 만들지 않고,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이전 시대에 잊혀져있던 공간이나 식물들을 변화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 결과 리모델링된 정원은 기존 건물과의 새로운 조화를 이루며 영국의 역사정원은 각 시대의 특징을 엮어놓은 조각보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영국인들의 가치에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영국 정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사건이다.

이후 18세기 초 영국정원에는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조각보가 엮이게 된다. 그 변화의 물결은 프랑스나 독일의 영향을 받은 정형식 정원이 너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는 당시 유행하였던 자수화단이 대표하는 정형식 정원이 너무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저급한 아름다움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단정하고 깔끔한 기하학적 정원이 즐거움 대신 오히려 피로감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인위적으로 만든 정형적인 아름다움 대신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고, 우리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정형적인 영국정원에 변화의 물꼬를 텄고, 지금 영국정원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산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포프가 정원의 철학을 바꾸기 시작했다면 이탈리아의 경관을 그린 풍경화는 영국정원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의 귀족들은 여러 나라를 장기간 여행하면서 보고 배우는 과정을 중요한 통과의례의 하나로 여겼다. 당시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과 같은 프랑스 화가들이 이탈리아의 자연을 그리며 많은 풍경화를 남겼는데, 극장의 무대와 같이 사각의 프레임 안에 잘 정리된 선과 비율로 완전한 자연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많은 귀족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러한 풍경화에 감동을 받게 되었고, 돌아올 때 많은 풍경화를 영국으로 가져 왔다. 그리고 그들은 실내를 장식하는 풍경화에 만족하지 않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자신들의 정원을 풍경화와 같은 완전한 자연의 모습으로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바램을 담은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16세기 독일에서 풍경화를 의미하는 미술용어 Landskip에서 유래된 조경 또는 경관이라는 뜻의 Landscape는 이때 18세기 영국정원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담고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가 만들어낸 조각보가 바로 영국의 풍경식 정원이다. 풍경식 정원은 너무 직선을 사용하여 위압적인 정형식 정원을 벗어나 자연을 닮은 편안한 곡선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형태뿐 아니라 이전의 높은 생울타리나 담을 통해 완벽하게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되면서 정원의 공간적 개념도 변화되었다. 이 때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차경(借景)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하하(the ha-ha)수법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하하는 보이지 않는 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직적인 담장대신 깊은 배수로를 만들어 가축이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도 막고, 멀리 있는 경관도 내 정원의 일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변화들은 정원을 자연적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자연을 나의 정원으로 끌어들여 내 정원의 일부로 만들어 내는 차경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정원의 모습을 가져오게 했고, 실제로 정원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의 폭도 넓어졌다.

▲ Blenheim Palace의 봄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정원에 그리기 위한 풍경식 정원은 Landscape gardener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셴스톤(William Shenstone, 1714-1763)은 아름다운 정원은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에 의해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Landscape Gardener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풍경식 정원의 선구자인 윌리엄 켄트(William Kent,1785-1748)는 지극히 평범한 화가였으나, 정원을 그리기 시작함으로서 풍경식 정원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랜실롯 브라운(Lancelot Brown1715-1783)은 약 200여개의 정원을 풍경식 정원으로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풍경식 정원을 하나의 유행 및 산업으로 만들었다. 그는 평소 지주들을 설득하면서 자주 ‘그들의 정원은 개선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Capability)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후 ‘케퍼빌러티’ 브라운(‘Capability’ Brown)이라는 별명을 얻은 뛰어난 수완의 정원 비지니스 맨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한해 평균 200만 파운드(한화 약 35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부호로 성장한다.

이에 반해 브라운의 후계자인 험프리 랩턴(Humphry Repton, 1752-1818)은 케퍼빌러티 브라운과 몇 가지 큰 차이점을 보이며 대중들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케퍼빌러티 브라운이 했던 것과 같이 디자인 컨설턴트를 통해 많은 돈을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시공 전과 후를 비교할 수 있는 디자인북인 Red Book을 만들어 단돈 100파운드(한화 약 18만원)에 고객에게 제공했고 케퍼빌러티 브라운처럼 일부러 프로젝트를 10년 이상의 장기로 늘여 진행하지 않고, 빠른 시간에 고객에게 디자인을 제공했다. 정원을 디자인할 때 케퍼빌러티 브라운은 이용하기에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보여 지는 것에 치중한 반면, 험프리 랩턴은 그보다 좀 더 사용하기 편안한 형태로 만들고, 눈으로 보는 즐거움 이외의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조그만 공간을 Pleasure garden으로 디자인하여 지금의 영국정원의 모습을 이끌어내었다.

영국의 풍경식 정원은 정원의 형태뿐 아니라, 정원의 철학, 정원에서의 경험의 가치를 변화시켰다. 또한 영국 내에 전문적인 정원 또는 조경 디자이너의 영역도 만들어낸 것 등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풍경식 정원의 한계가 될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통제된 자연’이라는 이중성은 정원 디자이너들이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디자인에 임해야 하는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Stourhead Garden의 겨울 풍경
▲ Wimpole estate garden의 봄












▲ Chatsworth house garden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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