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전시서, 거연정에 앉아 푸르고 깊은 물결을 바라본다순순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나는 스스로 그러함의 일상에서 머문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흐르는 물살처럼 투덜거리며 바위에 부딪친다. 물의 속살도 멍든 물감 풀어낸 듯 깊다. 그러니 교란의 심사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 지난 겨울 내린 눈은 잠시라도 강가를 하얗게 덮어 바위는 잘 다스린 종부의 장독대 정원처럼 소담소담 풍요로웠다.겨울 강가의 찬 물기로 느끼는 싸한 가격감에 휘청한다. 먼길을 한마음으로 달려왔다.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들이 강가로 주거니받거니 풍경의 고단함을 말갛게
고산 윤선도의 ‘산수지벽’고산 윤선도(1587~1671)의 ‘산수지벽’은 시경, 성과 경, 출처관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산수지벽(山水之癖)이 있어 재물을 속바치며 원림을 조성하고 경영한 고산이다. 무엇이 고산을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굳어진 버릇이며, 지나치게 즐기는 병을 의미하는 ‘벽(癖)’에 빠지게 하였을까. 우선 원림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천천히 완만하게 걷는 미음완보(微吟緩步)로 거닐면서 시경(詩境)의 세계에 드는 행위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고산에게 시
사대부의 출처관에 기록된 원림 문화사대부는 글을 읽는 선비인 ‘사(士)’와 벼슬하여 관료가 되는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사’는 은거하며 심신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의 생활을 한다. 이를 ‘처(處)’라고 한다. 반면에 ‘대부’로서 조정에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는 ‘치인(治人)’을 ‘출(出)’이라 한다. 처는 수기에 들고 출은 치인에 나선다. 여기서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