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몸담았던 한국도로공사를 퇴사하고 조경업계에 접해보니 모두가 새롭고 낯설기만 했다.
만나는 사람이 그랬고, 생활의 패턴과 추구하는 방향 또한 그랬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변화를 가져온 것은 상하 관계가 아닌 평등관계에서 만나는 기술자들의 모임이었다. 그 중 한 단체가 한국조경사회의 ‘사목회’였다.

내가 한국조경사회와 인연을 맺은 시기는 90년대 중반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외부인인 내가 보기에 조경사회는 몇몇 분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던 느낌을 받았다.
 조경사회는 90년대 후반 시대의 변화와 단체장을 맡으신 분들의 지대한 관심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거듭 발전하게 됐다. 조경사회에 이렇다 할 공헌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 나는 95년 부회장직을 거쳐 97년에는 제9대 회장이란 중책을 맡게 됐다.

나는 회장 취임 당시 ▲조경인의 단합을 위한 춘계체육대회, 추계심포지엄, 총회 등을 개최키로 했으며 ▲조경기술자의 권익보호를 위해 사단법인화, 건설기술인협회 협력(분회), 조경관련법 시행령(타 단체와 협력) 변경 등을 추진키로 했으며 ▲기술인의 능력 배양을 위해 각종 국제심포지엄 및 IFLA 참석, 선진지 견학, 산업기술인 위탁교육, 조경실무책자 발간 완성 등을 추진키로 다짐했다.

아울러 이 모든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회원 확충 및 운영 예산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회원들에게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은 곧 실행으로 옮겨졌다.

조경사회 회장 취임과 동시에 나는 사목회 50회 행사를 맞이했다. 사목회는 조경사회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본회 차원에서 진행됐다. 세계 100대 골프장의 하나인 타우포 리조트 와이라케이에서 진행된 사목회 50회 행사는 유의열 전임 회장이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나는 발목만 접질리는 부상을 입었으나 큰 문제없이 행사를 성대하게 마쳤다.
또 97년 2월에는 지구 반대쪽 뉴질랜드 남섬의 크라이스처치, 퀸스타운, 밀포드사운드 등을 방문하고 견문을 넓혔다.
마침 크라이스처치에는 박진보 회원(진보조경 대표)이 학위 준비를 하고 있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했다. 박 회원은 우리가 남섬에 체류하는 동안 가이드 역할을 하며 해박한 지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퀸스타운의 호수와 조화된 도시경관, 빌포트의 피오로드, 와이토모 종유굴의 반딧불 관광지등은 조경인으로서 한번쯤 견학을 권장하고 싶은 곳이었다.

나는 취임 당시 내세웠던 사업 가운데 하나인 ‘조경설계상세자료집 발간’ 사업을 추진했다.
이 자료집은 전 집행부에서 이월된 사업으로 거의 완성 단계에서 인계받았다. 당시 안계동(동심원 대표) 설계 감리 분과위원장을 중심으로 각 분야별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실무분야에서 처음으로 발간된 기술지였다.

이 기술지는 상세도면을 중심으로 기준 설정 및 사례를 제시해 현업에 종사하는 조경인에게 큰 도움이 됐을 뿐 아니라 판매수입으로 기금 조성에 일조했다. 또한 이 기술지는 여러 번의 기술사 입문의 자료로 활용됐으며, 발간 시 기대했던 보완출간계획이 현재 추진 중이었다.
나는 조경인의 단합을 위해 임기 중 두 차례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만큼 조경인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는 스포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절의 여왕 5월에 시행하는 조경인 춘계체육대회는 제7대 권오준 회장 시절 처음으로 한국종합기술과 도화엔지니어링 직원간의 구기시합이 시발점이 되어 본회 행사로 발전됐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지금은 참가 회사와 인원도 상당히 확장됐다. 대회 소요예산도 종전 몇 개사의 도움으로 충당하기에 빠듯했으나 새롭게 강구된 방안으로 인해 해결됐다. 체육대회는 대부분 엔지니어링직원이 참여했기에 참가설계사에서 일정 금액을 참가비로 받아 운영하도록 했다.

또 심포지엄 비용을 시공사에서 후원하면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회사가 늘어날 것 같아 실제로 추진한 결과 무려 30여개 회사가 참여, 대회 운영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두 번의 춘계체육대회 가운데 한번은 한강둔치에서 또 한 번은 서울시립대학교 운동장에서 시행했다. 한강둔치는 마라톤 경기를 할 수 있었지만 산만했고, 서울시립대는 스탠드가 있어 운동장을 둘러싸 집중되지만 여유 공간이 없어 단합보다는 체육행사 성격이 강했다.

스포츠는 항상 이변이 많지만 특히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는 의외의 선수였다. 정운익 회원은 특이하게도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본부석과 필드, 상사와 직원, 남녀가 따로 없이 하나되는 체육행사는 단합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었다.

추계심포지엄은 기술인의 능력 배양의 장소도 되지만 교류의 장이다. 과거 본회 심포지엄의 참여자 분포를 보면 대부분 기술사와 설계사의 소속 인원일 뿐 시공사 운영자 및 직원들은 드물었다.
나는 시공사 운영자 및 직원들을 심포지엄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시공과 소재 분야에 중심을 두고 5회 추계심포지엄에서는 ‘조경분야의 발전전략’이라는 제목 하에 국토개발연구원의 김재영 박사에게 의뢰해 ‘21C 건설사업 환경의 변화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실시했다.

전년도에는 국제행사를 치렀기 때문에 부담감도 많았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심포지엄을 1박2일 일정으로 정하고 장소도 용인 한화리조트로 결정했으나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포지엄은 시공사 지원 구상에 따라 평소 인연이 깊은 한수종합조경 한경구 회장을 찾아뵙고 취지와 현실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경비 일체를 약속해 주셨다.
한 회장과 나의 인연은 도로공사 재직 시 시공사 대표로 만났다. 그분을 존경하는 것은 항상 조경소재와 신공법을 연구 개발해 업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심포지엄은 계획한 대로 추진됐고, 마침 우리 딸이 국악전공을 하고 있어 국악무대의 여흥도 마련했다.

그러나 심포지엄 당일 오후 내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참가인원은 예상했던 절반 정도 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공사에 종사하는 분들의 참여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이다. 후원하신 분과 집행진, 국악무대까지 마련한 가족에게 무척 송구스러웠다.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분들은 이날 참석하지 않은 분들의 음식까지 드시는 바람에 과식한 채 씁쓸한 막을 내렸다.

6회 심포지엄은 예측하지도 못했던 IMF사태로 기로에 봉착하게 됐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건설업계의 회오리 속에 조경업계도 예외일 순 없었다. 믿었던 회사의 줄도산,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경시되는 조경위상 등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나마 서울시 ‘생명의 나무 천만그루심기운동’과 생태도시 복원 등 다각적인 노력이 퇴로가 되었다.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는 굳은 마음으로 이번에도 시공분야에 무게를 두고 신공법 신소재라는 주제로 재도전했다. 그때 발표됐던 공법 및 소재가 현재도 상용되는가 하면 후원사도 자재회사로 정착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되신 초대 민경현 회장이 ‘한민족의 수석문화’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해 주셨고, 이기의 조경학회장은 “학회와 조경사회가 한 쌍의 부부관계”라며 축사를 했다.
97년 10월에는 조경계의 가장 큰 행사인 IFLA 대회가 개최됐다. 알젠틴 대회는 수석 부회장인 김기성 차기 회장이 단장이 되어 정주현 사무국장 등 5명이 참석했다.

워낙 먼 곳에서 개최되는 관계로 많은 인원이 참석치 못했지만 마야문명의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얻었다고 본다. 단장이었던 본인을 비롯해 심경구 교수 등 총 17명이 참석했던 98년 인도네시아 대회는 참석인원도 많았고 또 소기의 성과를 올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총회장 입구에 99년 10월 강원도 양양에서 개최될 IFLA 동부지역대회 홍보부스를 설치하고 준비해 간 서울시 홍보 팸플릿과 환경과 조경사에서 제공한 책자 등을 나눠주면서 홍보를 했다. 그 효과인지 강원도 양양에서 열린 동부지역 IFLA대회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청정도시 발리는 자연환경과 힌두사원들의 조화가 눈에 띄었으며 절벽사원에서는 극치를 이뤘다. 특히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물이 맑았으며, 이 때문에 김광두 분과위원장은 다이빙 때 머리를 다치는 사고까지 발생했던 웃지 못 할 추억도 기억이 난다.

또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공약 중 하나였던 사단법인화 추진에 대한 것이다. 여러 단체와 전조련으로 조직된 특별위원회를 통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사단법인화는 답보상태였다.
98년 초겨울 관련 담당자가 바뀌면서 우연찮게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부정적이었으나 그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급하게 동명기술공단 조경부 전 직원이 철야작업을 해 법인신청서류를 준비한 후 관련 서류를 정식접수하지 않고 담당관에게 바로 검토해 줄 것을 의뢰하고 통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담당자가 행방불명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자연히 신청서류도 행방불명되어 사단법인화는 어이없이 무산돼 버렸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현재의 규모나 역할에 비하면 그 시절의 활동은 매우 빈약했지만 회장과 타사에 근무하면서도 어떤 일이 주어지면 일심단결 해 빠르게 움직여 주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특히 정주현 사무국장과 동명기술공단 조경부 직원들, 갑자기 몰아친 IMF 시절에도 적극 참여하고 후원하였던 회원과 회원사들, 주위 지인과 동료들 모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모든 행사들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이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며 본회 30주년을 맞아 회장을 비롯해 모든 회원께 건강과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윤성수(제9대 (사)한국조경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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