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주 (주)우리엔디자인펌 대표
강연주 (주)우리엔디자인펌 대표

[Landscape Times] 사무실 정원 한 구석에 분홍색 장미를 사다 심었다. 꽃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 어머니는 장미를 제일 좋아하신다고 한다. 우리 사무실에 핀 꽃을 보고 말씀하신 이후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면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테이블위에 꽂아 두었다. 어머니는 양평 시골집에 장미원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하신다.

장미의 꽃말이 무엇인지 나는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미원을 설계한다면 처음에 하는 일이 아마도 꽃말을 찾아보는 일이 아닐까? 꽃이 가지는 의미와 이야기를 공간에 어떻게든 엮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설계하는 사람의 강박증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장미꽃으로 인해 ‘사랑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의 공간’이라는 테마를 위한 하나의 아이템으로 장미꽃이 사용되는 것일까?

아파트 조경 공간의 특화와 차별화는, 1990년대 ‘전통’과 ‘생태’의 테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아파트 조경 공간에 녹아 있었으나, 테마에 대한 대중적 인지를 넓힌 것은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라 할 수 있다. 아파트 브랜드가 확립되고 적극적으로 광고되면서 조경 공간 역시 이슈가 된 것이다.

아파트 안에 전통 정자와 돌담 등이 도입되었고, 생태연못과 계류가 아파트 녹지를 넘나들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단일 아이템의 개별적인 나열보다 석가산과 인공폭포, 연못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대규모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선호한다. 여기에 대형목 군식이나 포인트 식재를 하고 조형물 등을 곳곳에 두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임을 강조하는 설계를 주로 한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에는 20-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통적이며 생태적인 테마를 추구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단지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 들어가는 아이템이나 구성 방식들이 변화한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느 누구도 전통이니 생태니 하는 테마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국적이고 세련된 테마를 부여하면서, 다른 아파트와 다르다는 차별화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잘된 아파트 단지 어디에 가도, 대부분 석가산과 생태연못과 대형목 등은 가장 중심 공간에 있다. 주민들은 그 곳에서 도심의 건조함과는 전혀 다른,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자연을 느끼며 전통적인 정자목 그늘에서 쾌적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태와 전통의 의미를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필자는 주민들이 이전만큼 테마와 아이템에 집중하기보다, 그러한 공간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관심이 늘어나고 있음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름은 공간과 시간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이름이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강연주라는 이름 석 자가 나의 50년 이야기를 대변해 줄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설계가들은 특히 테마에 매몰되는 경향이 강하다. 발주처를 설득하기에 테마만큼 강력한 무기도 없다. 또한 아이템에 경도된다. 멋진 테마와 그에 맞는 새로운 아이템은 고스란히 설계가의 능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테마와 아이템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지고 낡게 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공간에 켜켜이 쌓이게 되는 추억과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설계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기도 하고, 기본적 설계 의도에 덧입혀진 다양한 색채들로 인해 진한 깊이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이야기를 위해 테마와 아이템은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야기를 통해 테마와 아이템이 기억되기도 한다.

아파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도입되고 있다. ‘나무의 이야기’, ‘정원의 이야기’, ‘놀이의 이야기’ 등등. 이제는 아파트 조경도 테마와 아이템의 시대를 지나 점점 이야기의 시대로 가는 것 같다. 이야기는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오랜 시간동안 축적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이야기를 만드는 설계가들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 혹은 낯선 이야기를 풀어놓기보다 현재 이 자리에 새겨진 많은 이야기들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라는 형식의 공간은 기존의 흔적은 거의 무시하고 새롭게 만들지는 곳이긴 하다. 그러나 이 땅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고, 여기에는 자연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아파트에 생태와 전통의 채취가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여전히 살고 있는 까닭이다.

많은 이야기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이다. 누구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야기에도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무슨 이야기를 가져다가 아파트 공간에 담을까를 고민하기보다, 그 장소가 가지는 본질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테마와 아이템, 개념과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일상적 삶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살아있는 아파트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공간에 무슨 이야기를 써내려가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 곳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몫이 아닐까? 거기에 화사하고 밝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도 하나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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