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청 공원에서 최근 제4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가 열렸다. 7일부터 9일까지 사흘 동안 개최된 이번 박람회에서 눈에 띄는 행렬이 보였다. 시각디자이너이자 캘리그라퍼로 활동하는 김정기 대표의 글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이 서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면서도 그 누구도 지갑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무료로 사람들이 원하는 글을 그림으로 표현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줄을 서면서도 거듭 물어보는 말이 있다.

 

“무료로 해 주나요?”

“네. 무료로 해 드려요”

 

김정기 대표를 보조하고 있는 아내 김미정씨가 미소를 보이며 답한다. 김정기 대표가 3일 동안 그려준 그림은 무려 400여 장.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많이 그리면 팔이 아프지 않냐는 물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펜을 최대한 부드럽게 힘들이지 않아야 피로도가 덜하고 아프지 않다”며 무심하게 받는다.

김정기 대표는 시각디자이너다. 1990년대 초 흐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초기로 시대의 변환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는 보해양조에 디자이너로 입사해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때문에 지금도 컴퓨터를 활용하는 것 보다 손으로 표현하는 것을 더 즐긴다. 그래서 더 정교하고 손맛이 느껴진다.

보해양조에 입사 후 그는 상업적으로 볼 때 가장 성공적인 히스토리를 남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로 90년대 초에 출시해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매취순의 순(純)자를 타이포그라피로 직접 도안해 광고계는 물론 주류 업계에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에는 캘리그라피라는 용어가 없었다. 하지만 7~8년 전부터 손으로 그리는 글자가 주목을 받으면서 내가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로 정리가 되더라.”

 

그는 2005년 초 17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길과는 다른 자영업의 길을 선택한다. 독한 마음을 갖기 위해 술과 담배도 동시에 끊었다. 마음가짐을 동여매고 싶었다. 1~2개월 동안은 사업이 잘 됐다. 큰돈도 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3개월이 될 즈음 사업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었다.

 

“나는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술을 더 권하는 직업을 가졌었고,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사행성을 조장하는 성인오락실을 운영했다.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3개월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내게 회계의 시간을 더 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다.”

 

사업을 접은 후 그는 실업자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 참회의 시간을 갖게 되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정이 생겼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감사하고 더 행복해 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결과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고, 또 캘리그라피를 그려 전해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그려준 그림을 받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힐링이 된다. 내 마음이 행복하다는 말을 되뇌일 정도로 좋아진다.”

 

김정기 대표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크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직장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에 놓이는 상황이 많았고, 나는 받는 것에 익숙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사인 하나에 따라 어떤 기업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할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너무나 고통스런 기억이 아닐 수 없다. 내 사인 하나에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시간을 매일 반성하며 산다.”

 

그가 보내는 시간은 참회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흘러간 시간 속에서 누구나 삶의 오류는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남을 속이거나 살인을 하거나, 또는 빼앗은 것이 아니라면 고통을 받으며 남은 삶을 살아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샘물교회에 다니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캘리그라피를 강의하고 있다.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는 이상 재능을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올 4월부터 용산구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해 왔다. 그런데 8월 말께 지원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9월부터 더 이상 교육을 진행할 수 없었다. 자비로 하기에는 부담이 컸기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60대 이상으로 구성된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갹출하면서 교육을 이어가 달라고 연락을 받은 것이다.

 

“더 배우고 싶고, 작품전시회도 하고 싶다며 교육을 이어가 달라고 연락이 이어졌다.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프면서도 뭉클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현재 교육생들의 교육은 지속되고 있고, 더 나가 교육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작품전시회를 갖기 위한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요청이 들어오면 뜻있는 행사장에 모습을 보일 예정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나눌 계획이다. 오는 11월 24일 종로구청에서 자원봉사의 날 행사가 열린다. 이날 김정기 대표는 무료로 캘리그라피를 선물할 예정이다. 끝으로 그는 기자에게 당부의 말을 기록해 달라 부탁했다.

 

“현재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더 나아가 봉사의 비중을 넓힐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의지가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들면 봉사의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늘려나갈 것이다. 나는 ‘지금’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나중에 봉사하지’라는 말은 없다. 오늘 또는 내일 내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중에’라는 말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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