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걷기, 등산, 캠핑, 정원, 힐링, 커피…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지금 우리 사회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들이란 점이다. 근래에 불어 닥친 이들 열풍은 한국 전역으로, 그리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의 문화적 현상에 대한 해석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다. 조경가로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지점은 다음 몇 가지이다.

그 첫째는 이들 활동의 공간적 공통분모로서 외부공간이다. 걷기나 등산, 캠핑, 그리고 정원활동이 모두 외부공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 힐링과 커피는? 외부공간이나 경관이 이들 활동에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없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외부공간이 힐링이나 커피를 즐기는 데 대단히 효과적인 촉매제라는 사실에 있다.

두 번째는 그 활동의 방식으로서 몸을 통한 체험이다. 이들 활동은 모두 직접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효용을 맛볼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터넷과 방송 등을 통한 간접적 혹은 가상의 소통이 난무하고 정보와 지식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몸으로 직접 읽히고 몸소 실천하는 방식이 갖는 의미는 너무 중요하다. 때로는 육체적 노동이나 수고까지도 수반하는 일을 굳이 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좋아서 일 것이다. 내가 좋아서 몸으로 읽힌 것이야말로 참된 내 것이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세 번째는 열풍의 까닭으로서 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용이다. 우리 시대에 한참 잘 팔리는 이들 문화코드 이면에는 따스한 햇빛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경치 등 바깥 자연과의 온 몸을 통한 만남과, 그를 통한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효용이 깔려 있다. 이들은 곧 ‘건강생성조건으로서 조경 Landscape as a salutogenic context’의 의의와 가치를 잘 드러내주는 셈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되 여럿이 함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걷기, 등산, 정원 가꾸기, 캠핑, 힐링, 커피 즐기기는 혼자서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서도 여럿이 함께 하며 소통하고 나누기 좋은 활동이다. 인터넷과 핸드폰 등 각종 첨단 기기가 점점 사람간의 대면 소통을 밀어내고 있는 한국 사회에, 현장에서 얼굴을 직접 대하면서 갖는 만남과 소통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가? 필자가 이들을 새로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로서의 효용성과 가능성을 열어 주는 기회인자로 바라보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 전국을 강타한 둘레길은 이웃 일본에 까지 수출되어 규슈 올레길까지 만들어내었을 정도로 여전히 열기가 높다. 사실 걷기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두 발로 걷기, 곧 직립보행은 유인원류와 구별되는 인류의 유력한 재주(?)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생존 수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동수단으로서 걷기는 인류 역사상 사실 그다지 존중받지 못한 편에 속한다. 과거 특권층은 걷기보다는 마차나 가마를 타고 다녔다. 굳이 자신의 발이 아닌 다른 수단을 택하는 데에는 신체적 편리함 외에도 신분이나 부의 과시도 한 몫 했음직 하다. 마차나 가마가 진화된 자동차가 현대인의 발을 대신한 지는 이미 오래이다. 자동차 의존성은 특히 한국인이 꽤 강한 듯한데 걷기열풍이 여전한 지금도 전국의 도로는 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 걷기가 이처럼 빠르게 번지게 된 이유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소비취향 주요소로서 경치의 재인식이다. 아름답거나 독특한 경치, 곧 바깥 경치가 소비의 주요 상품으로 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기계(차)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직접 온 몸으로 느긋하게 걸으면서 즐기는 구도 속에서 맛보는 경치의 효용이 얼마나 근사한 지 그 참된 맛을 알게 된 것이다. 등산이나 캠핑은 그 세부 대상이나 요소에서 조금 다를 뿐 자연 속에 신체를 투입한 채로 경치를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걷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좋은 경관 속에서 혹은 그것을 바라보며 나누는 만남과 대화가 얼마나 근사한지 경험해본 이는 다 안다.

근래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현상으로서 정원취미 혹은 정원 가꾸기는 바깥 환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걷기나 등산, 혹은 캠핑이 바깥 환경은 그대로 둔 채 내 몸을 그 안으로 이동시켜서 주로 눈으로 즐기는 방식인데 반해 정원 가꾸기는 바깥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거나 변화시킨다. 이른바 환경에의 적극적인 참여(Engagement)를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땅을 일구고 씨를 심고 식물을 기르는 신체적 노동과 그 과정에서 지각되는 오감을 통한 감각과 사유세계는 정원 활동의 핵심이다. 단순히 바깥 환경을 그대로 둔 채로 눈으로 즐기는 방식보다는 훨씬 적극적이고 공감각적이다. 자연과의 접촉 강도가 더한 만큼 얻게 되는 감각체험도 훨씬 배가될 것이고 생각도 더 깊어지게 된다. 모네, 고호 등 화가가 그림 이상으로 정원을 즐긴 것이나, 플라톤이나 에피큐로스, 칸트, 헤겔 등의 철학자들이 정원을 중요하게 간주한 까닭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이웃과의 만남과 소통에도 훌륭한 매개가 된다. 심미적 완상과 심신 휴양 및 단련, 그리고 먹거리 생산이라는 기본적 효용을 넘어 공동체적 가치를 함양하고 증진시키는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숲이나 정원이 힐링을 가능케하는 대표적인 환경적 장치 중에 하나라는 점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 사회에도 저명한 의사가 운영하는 힐링 캠프가 강원도 산속에 근거를 두고 있고, 산림청에서도 치유의 숲을 전국 곳곳에 조성하면서 산림치유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치유의 장으로서 정원의 역사는 사실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잃어버린 낙원으로서 에덴은 치유와 회복의 장으로서 정원의 가장 이상적인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에덴정원 자체의 완전무결성, 즉 덥거나 춥지도 않고, 온갖 과일과 먹거리가 풍성하여 굶주림이 없으며, 위험도 싸움도 없는 전형적인 낙원이라는 표상이 내포하고 있는 효용이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류가 배고픔과 고통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하염없이 이상향을 희구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에덴동산은 고통받는 인류에게 영원한 치유와 회복의 귀소처인 셈이다.

그럼 커피는? 커피를 외부환경과 연관시키려는 것은 다소 주관적 견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문화적 상품으로서 커피 기호가 바깥 환경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적인 증거로 내로라하는 커피전문점들이 공원이나 하천 등 공원녹지 주변 곳곳에 파고들거나, 기를 쓰고(?) 데크나 테라스 등 외부로 확장된 공간을 갖추려 하는 현상들을 생각해보라. 멋진 (자연)경관과 함께 즐기게 될 때 커피라는 기호식품의 효용이 배가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 시민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해석이 결코 조경가의 아전인수격 시선 탓이라고만 치부할 수만은 없을 터이다. 사실 경관을 중요한 소비 상품요소로 간주하는 인식은 지난 시기 아파트 분양시장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된 바가 아니던가 말이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대로 우리 시대 주요 문화현상을 조경적 가치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어쩌면 이들은 모두 그 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치로서 생물적 존재 인간이 지닌, 자연과의 유대감이 다시 주목 받고 있는 징표일 지도 모르겠다. 자연과의 건강한 관계 회복 추구야말로 조경이 지닌 본연의 가치이자 의의라는 점에서 이들 문화현상에서 우리 시대 조경의 새로운 가능성을 읽으려는 시도가 결코 무리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그 방향타를 건설 위주의 조경이 아닌, 조경의 확장된 가능세계로서 문화 지형의 일면으로 잡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믿는다. 바야흐로 우리 시대 문화코드에 부응하는 조경의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찾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자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성종상(객원 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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