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매 화가의 '북아현동', 크기(세로x가로) : 116.7 x 80.3cm, 재료 : watercolor on Arches canvas, 제작년도 : 2013


금화 시영아파트가 만든 아이러니의 풍경
 

금화 시영아파트가 만든 아이러니의 풍경 이 그림은 최초의 시민아파트로 불리는 금화 시영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 본 서대문구와 마포구의 풍경이다. 시원스럽게 도시 구조가 드러나고 오밀조밀한 도시의 풍경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에 표현된 풍경 반대편에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저 멀리 북한산까지, 서울의 산세가 만드는 풍경이 펼쳐져 있고 많은 이들이 이를 사진으로 남겼으니, 이 아파트 옥상은 좋은 전망대인 셈이다.

1970년에 준공한 와우아파트가 붕괴되어 33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은 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이 곳에 아파트를 지어 자기의 업적을 대통령에게 보이려했단다. 금화 시영아파트가 언덕 위에 지어진, 옥상이 전망대가 된 배경이다. 좀 어이없는 일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좋은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사는 여러모로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이 전망대는 현재 폐쇄되어 있다. 금화 시영아파트는 2007년 7월 안전진단 결과가 최하위인 E급 판정이 났고 현재는 철거를 준비하는 중이라 건물은 폐쇄되었고 이와 함께 옥상으로 가는 길도 막혔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몇 가구가 살고 있어 철거를 못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자 서울시는 철거를 결정했다고 한다. 화가의 풍경은 이제 기록이 되었다.

양을 질로 변화시키는 정련의 시간
부감 풍경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세상 위에서 세상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 세상을 내 발 아래에 두는 일, 복잡다단한 세상을 한 눈으로 파악하는 일. 전망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전체 구조와 세밀한 부분을 함께 표현해야하니 말이다. 화가가 그린 이 풍경도 양과 내용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건물 한 채 한 채, 창문 하나하나, 옥상의 화분 하나하나, 개개의 형태가 드러나는 기왓장, 지붕의 얼룩. 들여다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게다가 미세한 생활의 습관 까지 묘사되어 있다. 뚜껑이 날아가지 않도록 빨간대야 위에 올려진 벽돌, 빨랫줄에 걸린 색색의 빨래, 골목 사이사이에 주차된 차량.

묘사의 섬세함에 경외심까지 이는 화가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을 물질로 환산하고 싶어진다. 강력한 유혹. 이 그림은 실제로 보면 크기도 작지 않은데 화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캔버스 앞에서 보냈을까? 물감은 얼마나 들었을까? 물질적 환산은 다시 노동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한다. 허리나 팔이 아프지 않았을까? 화가는 저 그림을 그리면서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지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런 열심을 부리게 한 마음의 동력까지 궁금해진다. 무슨 마음으로 저 그림을 그렸을까? 무엇 때문에 저 그림 안으로 침전했을까? 그 노고의 시간이 궁금해진다.

화가는 저 그림을 3개월 동안 그렸다고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묵묵히 땅을 고르고 씨 뿌릴 밭을 갈 듯 저 그림을 그렸고, 그리고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화가는 자세한 설명 대신 이 그림 이전과 이후의 그림을 짚어주었지만 그 차이의 섬세함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이해한 바를 용기를 갖고 정리하자면 ‘이 그림 이후 집을, 풍경을 좀 더 자유롭게 그리게 되었다’.

이렇게 양(量)적인 변화가 질(質)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진리는 예술가의 작업에도 적용이 된다. 물론 단순히 시간만 쏟는다고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물질의 시간이 정련(精鍊)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확실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는 집중의 과정. 정련의 시간 속에서 화가의 ‘눈, 손, 마음’(Pallasmaa, 2009)은 하나가 되고, 도구도 몸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나서야 독창성도 생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대상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을 때, 의미는 비로소 창출된다. 서툴다면 기예는 빈약할 수밖에 없고, 이 빈약함은 표현의 경직성으로 나타날 것이다. 거꾸로 말해 정통하지 않으면 몸은 유연할 수 없고, 유연성 없이는 정신의 여유가 자랄 수 없다’는 문광훈(2010)의 글이 와 닿는다. 마치 한판의 춤같이 보이는 무사의 몸짓도 그러한 경지 위에서 가능한 일일테니.

공산품 풍경에서 벗어나기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화가는 이 풍경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수련의 과정으로서 그렸지만 풍경은 대부분 정련의 시간 없이 쉽게 만들어진 산업제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가구 주택도, 다세대 주택도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는 과정 없이 확실한 것들의 조합으로 지어졌다. 땅에 발 디디고 바라다보는 풍경의 요소들, 미세한 풍경은 더욱더 그러하다. 다용도로 쓰이는 국민 생활 용품 빨간대야, 플라스틱 화분, 알루미늄 창틀과 난간 등등. 재료를 고르는 신중함, 어떤 기예에 대한 노력도 없이 기계로 찍어 된 완성품으로 구성되는 풍경, ‘공산품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이 주는 물질의 감동이 풍경 자체에는 없다.

우리네 풍경에 대한 어떠한 멋진 기획과 디자인이 있더라도 이 공산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경외심이 이는 부감 풍경을 갖기 쉽지 않다. 기성품의 냄새를 없애는 방식도 물리적 시간, 사람들의 손길밖에 없다. 시간 속에서 이미 정해진 규격을 어긋 내어 자신에 맞는 규격을 만들어내기, 일률적 색에서 벗어나기. 화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녹색 방수액이 칠해진 무수한 옥상이 조금이나마 개성을 갖는 것은 그 위에 놓인 화분들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공산품이 구성하는 우리네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손 맛 느껴지는 생활을 위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보자는 흐름이 몇 년 전부터 일고 있다. 목공을 하는 사람, 도시농업을 하는 사람. 우리네 도시 풍경도 그렇게 만들어나갈 때가 언젠가 오겠지. 불확실성의 토대 위에서 확실성을 꿈꾸며 풍경을 만들어나가는 정련의 시간이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때가.

인용문헌
Pallasmaa, Juhani(2009) The Thinking Hand, Hoboken NJ: John Wiley &Sons.
문광훈(2010) 숨은 조화, 서울: 아트북스.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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