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호영(서울시 중부공원녹지사업소 소장)
아름다운 봄, 아름다운 꽃이 피고 죽은 듯하던 대지와 목피를 뚫고 새싹이 나오기 때문이다. 수선화, 튜립이 예쁘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화려하다.
한적한 공원길을 걸으며 그 아름다움에 한껏 취해본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공사부서에서 공사 진행에 분주했던 때는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었다. 왜일까.
그 아름다운 가치를 이윤가치로 바라보았고, 목표달성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꽃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윤가치를 버릴 때 그 아름다움이 있다.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은 이윤가치가 없는 것 들이다.
이른 봄 눈 속을 뚫고 나오는, 하얀 백설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복수초의 노란 빛깔은 이윤가치는 없지만 큰 기쁨을 준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는 이윤가치가 없다.
사랑은 설레는 일이고 기쁨이지만 그 자체로는 이윤가치가 없다.
사랑을 이윤가치로 환산한다면 그게 사랑은 아니겠지.

그런데 조경인은 독특한 직업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윤가치가 없는 아름다움을 이윤가치로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일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힘든 일이다.
거기에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가치를 이윤가치로 만들었는가하는 자기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어떻게하면 이렇게 심오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가슴에 더 많이 투자하고 가슴에 귀 기울여야하고 조경인 스스로 따뜻한 가슴을 가질 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이성에 매몰되 있다. 우리는 이성적 학습과정을 통하여 이성적 사고를 강요받았고 이성적 행동이 사회적 윤리에 부합한다고 통제되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조경인의 이윤가치 창출은 정반대의 감성에 의존하여야 한다.
황금분할을 외우고 꽃의 배열을 이야기하고, 수목의 식재를 도식으로 얘기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노력의 한 부분일 뿐 절대적 가치로 군림할 수 없고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한 배움과 이론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힐 때 조경인은 더 많은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다. 삶이 결코 우리가 꿈꾸듯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뜻대로 아름다움이 이윤적 가치로 변환되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무를 식재하고 시설물을 설치하면서 많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진정 아름다움을 발현되는 때는 세월이 지나면서 사물 스스로가 자리 잡을 때 이다. 초본류는 스스로 자식을 퍼뜨려 크고 작음이 생기고 때로는 이웃 다른 종과 경쟁하면 자리 잡을 때이고, 목본류는 자신의 가지를 햇볕을 따라 마음 것 펼칠 때이고 시설물도 탈색되고 스스로의 때가 묻으며 때로는 이웃 식물과 어우러질 때이다.
우리는 이를 무질서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질서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반성이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공사를 하면서 겉치레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질없는 짓을 한 게 너무 많다. 그것은 인간이 마치 자연의 무질서를 나무라듯 질서를 창조할 수 있듯이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다. 때로는 화려한 겉치레 색깔과 말 장난으로 속이기도 했다.
인간이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식물과 시설물이 잘 성장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토대를 마련하여 주는 일이었다.
식물에게는 배수시설을 잘 해주고 토양의 물리적, 화학적 구조를 잘 갖추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생물학적 요소는 물리, 화학적 조건만 맞으면 항상 찾아오는 착한 손님이다.
시설물에게는 내구성이 유지되도록 구조를 하고, 자연에 동화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며 스스로의 가치가 발현될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 전부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여 얼마나 많은 식물이 고사하였으며 살아있어도 제대로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길을 걸으면서 쉽게 볼 수 있다.
공기달성이라는 실적주의와 아름다움을 고려치 않는 이윤추구가 만든 결과이다.

장자는 말한다.
혼란스럽지 않다면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혼란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 더 이상 혼란으로 보이지 않는다.
배열과 도식에 고민하지 말고 그들의 토대를 잘 마련해 주는데 진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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