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화(한국관광공사 부장·관광학박사)
역사를 바로 알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궁궐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왕이 생활했던 곳 궁은 드라마 배경이나 소재로 많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이야기의 소재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해석을 가미하여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번호에서는 조선시대 궁궐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축조한 서울성곽 안에는 4대문과 5대궁이 있다. 태조는 1396년 서울도성을 축조하면서 정남쪽에 숭례문을 정북쪽에는 숙청문, 정동쪽에 흥인지문을 만들었다. 또한 정서쪽에는 돈의문을 세웠다. 숭례문은 태조 때 창건하여 세종 때와 성종 때 개축한 것을 1962년 대보수하였으나 5년 전 방화로 불타 다시 복원하여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조선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다. 궁궐은 기능에 따라 크게 정궁(正宮), 별궁(別宮), 행궁(行宮)으로 구분된다. 정궁은 임금님이 거처하면서 정사를 돌보는 곳으로 법궁 이라고도 한다. 별궁은 왕이 사신을 맞이하거나 왕이나 왕세자가 비를 맞이하기 위하여 특별이 지은 궁전을 말한다. 또한 행궁은 왕이 각종행사에 참석할 때 임시로 머문 궁궐이며 그 밖에도 임금이 화재나 재난이 발생되었을 때와 왕이 일시적으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 할 때를 대비하여 만든 이궁이 있었다. 조선의 궁궐은 정궁과 이궁의 양궐체제로 대별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과 일종의 별궁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 그 동쪽에는 창경궁, 그리고 임진왜란 때 임시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광해군 때 정식 궁궐이 된 덕수궁과 광해군 때 별궁으로 지어져서 서궁으로 불리운 경희궁을 조선시대의 5대궁이라 한다.

이번호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궁궐 이야기는 경복궁이다. 경복궁은 중국 자금성을 모델로 건립되었으나 검소함을 미덕으로 하는 유교정신에 의거 자금성보다는 작게 설계되었다 한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 궁궐 중 가장 권위 있고 제일 먼저 지어진 법궁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1394년부터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경복궁은 ‘큰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시경(詩經)의 한귀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을 따서 경복궁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또한 경복궁은 동궐인 창덕궁이나 서궐인 경희궁보다 북쪽에 있다하여 북궐이라고 불려 지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조선 5대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와 전통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경복궁에는 국가행사를 거행했던 근정전과 연회를 베풀었던 경회루를 비롯하여 자경전,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 곳곳에 즐비하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건물이 상당수 불타 훼손되어 쓰라린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 주도로 77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중건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조선왕조는 몰락가게 되고 경복궁도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소개할 궁궐은 덕수궁이다. 덕수궁은 궁궐로서는 유일하게 근대식 전각과 서양식 정원 풍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덕수궁은 처음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임지왜란 때 왕궁이 불탔기 때문에 1593년부터 행궁으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광해군은 덕수궁에서 즉위한 후 정릉동행궁으로 불리던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이름을 바꾸고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 창덕궁으로 왕궁을 옮겼다. 또한 1618년에는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한 뒤 덕수궁을 폐쇄하고 서궁으로 이름을 낮춰 부르게 하기도 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덕수궁에서 즉위하였으나 곧바로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덕수궁은 270년간이나 별궁으로만 사용되어 오다가 1897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환궁하고 고종이 즉위식을 한 뒤 덕수궁은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뒤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고종은 계속해서 덕수궁에서 거처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고종황제의 만수무강하기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최근 덕수궁을 본래의 명칭인 경운궁으로 불러야 한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양위를 강요당하고 1919년 1월 22일 덕수궁내 함녕전에서 승하하고 일제가 고종황제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3.1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우리의 근대사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은 경복궁보다는 웅장하지 않지만 인왕산 줄기 아래 단아하고 정감 있는 건축물과 정원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덕수궁에는 예전에 ‘정동길’이라고도 불리는 덕수궁 돌담길이 유명하다. 이곳은 사대문 안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양반들 주거공간이던 곳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의 개항과 맞물려 서양문화와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19세기 말부터 서양의 외국 공관과 학교, 교회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까지 이곳 정동 길 주변에 자리했던 근대역사와 문화가 서려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 덕수궁에서는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어 더욱 더 내외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홍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문과 경복궁 등 국왕이 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수문장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광화문을 여닫고 근무교대를 통하여 국가의 중심인 국왕과 왕실을 호위함으로써 나라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수문장 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조선예종 1년(1469년)으로 그 이전 까지는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 궁궐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수문장 의식은 광화문과 덕수궁에서 개최된다. 수문장 교대 의식은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의 수문군 교대 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수문군은 기마대 2명이 먼저 앞장서고 그 다음으로 수문장의 인솔 하에 총 78명의 수문군이 취타연주대의 북소리에 맞춰 수문군 교대 의식이 시작되며, 덕수궁의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은 연중 매일 3회 진행된다.

세 번째로 소개할 궁궐은 창덕궁에 관한 이야기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쳐했던 궁궐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주변 자연조건과 건물의 배치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창덕은 임금님이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왕조의 이궁이었다. 경복궁에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경궁이 함께 불타자 창덕궁을 복구하여 궁궐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정궁역할을 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수원화성과 함께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고종 때 복원된 건물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창덕궁에는 후원이 있다. 후원은 임금님의 정원으로서 왕과 왕족이 휴식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창덕궁은 일명 비원이라고도 불렀다. 비원에은 정조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으로 연꽃연못이 있는 부용정과 부용지, 어수문과 규장각, 주합류, 영화당, 불로문, 애련정, 연경당 등 많은 정자와 연못이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 정원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네 번째로 소개할 이야기는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후들이 주로 기거하던 곳으로 국사를 돌보는 궁궐이라기보다는 내전 생활공간이다.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수강궁터에 지은 궁궐이다. 이후 성종은 세조비의 정희왕후와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위해 명전전과 문정전, 동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또한 창경궁은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이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한다. 또한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도 없애버렸다. 창경궁은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유적이다. 창경궁은 최근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1987년부터 문화재 복원사업을 벌려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궁은 경희궁에 관한 이야기다. 경희궁은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 지시로 지은 궁궐로서 원래 궁 이름이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희궁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살았던 곳으로 궁궐이 서쪽에 있다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일제 강점 뒤에 경희궁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 고등학교)가 세워졌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산책길 등이 있고, 신라호텔로 옮겼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시 제자리에 옮겨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도심 속에 서울성곽과 4대문·5대궁궐 등 귀중한 문화관광자원을 간직하고 있다. 궁궐의 수문장 교대식,  경복궁 야간 개장과 창경궁 달빛기행 등 문화관광 상품이 국내외 관광객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공존하는 4대문과 5대궁궐은 세계적 관광명소로 가꾸고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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