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상일 단장
2005년 8월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공간문화과가 신설되면서 초대 과장으로 우상일 현 국립중앙박물관 국제교류단장(부이사관)이 임명됐다.

우 단장은 2007년 2월 인사발령에 따라 타 부서장으로 전보될 때까지 1년 6개월 남짓 공공디자인 정책을 수립하고 확산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으로는 주저없이 ‘광복로 시범가로 조성사업’을 꼽았다. 하고 싶었던 일에 아낌없이 열정을 쏟았기에 더욱 그렇다고 한다. 중앙부처 과장이 70회 넘게 서울-부산을 왕복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그리고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광복로 사업의 성공 포인트는 무엇이었나?
이 사업은 정부가 밀어붙여서 진행된 방식이 아니다. 주민 스스로 필요에 따라 원하는 방향으로 정하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행정에서 지원하는 것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 86억 원의 국비와 지방비가 투입되다 보니까 초기에는 정치권과 행정기관에서 눈독을 들이고 자꾸 간섭하려고 했다. 그러면 배가 산으로 가게 돼 국가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우리 장관님에게도 “이 사업과 관련해서 지시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순전히 전문가와 주민들의 협의를 통해서만 사용될 겁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수시로 내려가서 상인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간섭과 압력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KTX 40회짜리 비즈니스카드를 3장을 쓰고 4장째 쓰다가 전보됐으니까 왕복 70회 정도는 탄 것 같다. 오후 4~5시에 출발해서 밤 12시나 다음날 새벽에 상행열차를 타는 과정이 반복됐지만, 열정이 있었기에 즐겁게 일하던 시절이었다.

주민들의 반응과 변화 과정은?
광복로 상인들은 처음에 우리를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민 스스로 힘을 모으면 공동화된 상업시설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데 주력했다. 조직을 만들고 전문가와 함께 일본 선진사례지 답사도 다녀오면서 차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복로의 광복’을 주제로 아름답고 활기찬 광복로 가꾸기를 위한 국제현상공모를 했더니 15개국에서 60여개 작품이 접수됐다. 이중 3개 후보작을 선정해서 주민들에게 직접 투표해서 정하라고 했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주민들이 참여해서 운영하고 자문회의를 통해서 진행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공모 후 일체의 잡음이 없었다. 희망을 잃고 경직돼 있던 주민들이 활기를 찾으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 바뀐 것이다. 결국 간판디자인 사업도 주민들의 마음을 디자인 하는 것이었다.

왜 공공디자인 정책을 만들게 됐나?
사람들이 해외만 다녀오면 우리나라 건축은 왜 이 수준이냐고 한탄하던 시절이었다. 유럽에서는 규제하지 않으면 도시가 망가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압축성장 과정에서 원칙과 규제 없이 마구잡이로 신축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 이는 간판이나 가로시설물도 마찬가지였다. 사거리만 나가도 도로시설물들의 소관 부서가 달라서 아주 제각각인 볼품 사나운 모습이 흔하게 연출됐다. 신호등은 경찰청, 소화전은 소방서, 분전함은 한전, 휴지통은 지자체 등등 서로 합의되지 않은 색상을 쓰다보니까 도시가 추해 보였다. 이에 기준을 만들어 바로잡고 정체성 담은 디자인으로 지역의 품격을 높이는 게 필요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생활 공간에 디자인이 들어와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심리적으로 편안해지는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공디자인 정책 추진의 어려움은?
그러나 기존에 업무를 담당해왔던 부처들이 강하게 반발해왔다. 공공디자인을 처음 접한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가 용어에 ‘디자인’을 사용했다고 난리를 쳤다. 간판사업과 관련해서는 ‘옥외광고물관리법을 소관하고 있는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반발했는데 심지어 담당 국장이 직접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나를 위협하기도 했다. 또 건축문화를 바꾸겠다고 했으니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 건축부서에서 반대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개념이 전혀 다른 정책인데도 이처럼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됐다. 지난 30~40년간 업무를 방치해오던 사람들이 문화관광부에서 한다고 하니까 안 뺏기려고 저마다 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리는 분명했고 개선의 효과을 자신할 수 있었기에 밀릴 이유가 없었다. 당시 장관 사이의 논쟁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우리 부의 방향이 맞다고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 뒤로 자극을 받은 각 부처에서 개별 정책들을 만들어서 추진했다. 결과의 효용성은 그렇다치더라도 공간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정책이 개발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과 전하고 싶은 말씀은?
재임기간이 짧아 여러 정책의 매듭을 짓지 못하고 떠난 것이 못내 아쉽다. 당시 발의됐던 건축문화진흥법, 공공디자인 정책 등이 좌초되거나 표류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중앙부처는 정책의 방향성을 잡고 시범사업을 성공시켜서 정책을 확산시키는 게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광복로 사업의 경우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사업을 꾸려나가는 선두사례였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일했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 모처럼 그 시절 이야기를 하니 감회가 새롭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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