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애(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서울에 조성된 첫 도시공원은 탑골공원이다. 조성 완료 시기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899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몇 년 앞선 1895년 미국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덕수궁 주변을 그린 도면에서는 ‘Public Park’라고 적힌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정동 교회 건너편 부근이다. 1899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 공간은 테니스장이며 공공에게 열린 공간이라기보다 일부 소수 계층이 활용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덕수궁 주변, 즉 정동은 어떤 장소였기에 공원이라는 신문물이 생기기 전부터 서구 운동시설의 흔적이 있는 것일까.

정동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시작해야 한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통해 암기식으로 공부한 세대로서 아관파천을 기억하자면,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후 고종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과연 고종은 일국의 왕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도망친 것이었을까. 단일한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면 단일한 역사의 측면만 알게 된다. 고종이 정동에 온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선시대의 정동은 상업 활동 중심지였다. 아관파천 당시 정동에는 1883년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고, 1901년까지 벨기에와 이탈리아 공사관이 개설되었다. 미국 공사관은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하였고, 이 밖에 공사관들은 각각 본국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양식을 취했다. 정동은 외국 공사관 외에도 의료, 교육의 중심지로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는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외국인들 통행이 빈번해지면서 손탁호텔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정동제일교회, 성공회성당 등 외국인이 세운 종교 시설도 들어섰다. 정동은 서양 문화가 유입된 첨단의 장소이자 한 나라의 임금이 사는 궁궐과 한옥이 공존하는 독특한 곳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이듬해인 1897년 덕수궁으로 이어했다. 고종 실록에 따르면 고종이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수리를 명령한 기록이 있는데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이를 두고 아관파천이 즉흥적인 사건이 아니라 고종이 조선의 앞날을 사전에 기획하고 개혁을 위한 행보인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고종이 우선으로 삼은 가치는 ‘구본신참’이다. 동양 전통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동도서기’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옛 규범을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참고 한다는 의미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던 정동에서 고종이 시행한 개혁은 근대 국가 초석이 되었다. 고종은 1897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었다. 뒤이어 황제국의 격에 맞는 도시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덕수궁 북쪽으로 황토현을 깎고 개천에 다리를 놓아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잇고, 환구단을 연결하는 소공로를 개설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과는 달리 도시 한가운데 위치하기에 도시 변화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고종이 덕수궁을 수리하기 시작할 때에는 각국 공사관이 이미 정동의 주요 공간을 차지한 후여서 궁궐은 그 사이 공간들로 확장해나가야 했다. 중화전 서측의 석조전은 1900년 설계를 시작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전면에는 정형식 정원과 분수대가 조성되었다. 덕수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신축되었고, 영역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고 태평로가 개설되면서 다시 잘려나가는 등 현재까지 수차례 변화했다.

물리적인 변화 뿐 아니라 덕수궁 근처에서는 역사를 바꾸는 사건도 이어졌다. 고종 승하 후 수많은 시민들은 대한문광장에 모였으며 이는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최근까지 국세청 별관으로 사용하던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체신국과 경성부민관 앞에서는 4.19혁명이 촉발되었다. 이 곳에는 표석이 남아있지만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곳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전쟁 후 경성부민관이 국회의사당으로 활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 앞에서 반독재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점도 상기해볼 일이다. 같은 장소에서 2002년에는 월드컵 응원의 열기로 붉게 물들었고, 촛불 집회가 열려 시민의 뜻을 표출하는 장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국세청 별관 건물을 헐고 시민의 공간을 조성하는 설계 공모가 열렸다. 국세청 별관은 1937년 체신국 청사로 지어진 건물로 덕수궁과 세종로에 면해있었다. 이 건물을 헐어내면서 잊혔던 새로운 역사의 단층이 드러나게 되었다. 공모를 통해 서울의 문화 경관적 가치를 계승하며 시민을 위한 공공성이 반영된 공간으로 탈바꿈하고자 최근 수상작을 선정했다. 시청 지하공간까지 연계해 광역적인 도심 공공공간의 결절점으로 조성하려는 의도다. 이와 더불어 영국 대사관으로 막혀있던 덕수궁 돌담길도 열리게 되면서 정동은 또 다른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정동의 역사는 서로 다른 낯섦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왔다.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특권층이 누리던 ‘Public’이 아닌 21세기가 원하는 진정한 ‘Public’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해볼 일이다. 역사적인 배경과 기억을 존중하되 동시대성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해야 한다. 현재의 가치가 투영된 공공의 개념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서울의 역사를 바꿀 것이다. 고종이 꿈꾸던 서울의 중심이 21세기 공공공간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다시 공공이다.

참고문헌
이태진(2000)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안창모(2009) ‘덕수궁’, 도서출판 동녘.
서울역사박물관(2012) ‘정동 1900’ 전시도록.

서영애 (객원 논설위원·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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