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유적 건물터 <사진제공 문화재청>

백석동천은 백악산의 북서 사면의 계곡을 낀 일원으로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거슬러 가는 구간을 지나 남서방향으로 완만하게 오르막이 된 일대의 계류와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곡 초입에 넓게 형성된 자연암반과 계류 양쪽으로 기슭을 이루는 일대의 자연 식생이 분포된 곳으로 별다른 조경적 수식이 없고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말 그대로 자연풍경식 별서다.

백석동천의 주동선은 북서쪽 계곡 초입과 남동쪽의 오르막인 자하문 일대 동네와 붙어 있는 다른 입구 간의 긴 대각선을 이루는 산길로 볼 수 있다. 백석동천 일원의 경관은 경관요소들이 구곡과 같이 연속성을 지니며 배치되어 있다. 진입부의 불암바위를 시작으로 백사실폭포, 계곡, 별서유적, 월암 각자바위, 백석동천 각자바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경관은 연속성과 대비성을 함께 지니며 점진적이고 극적인 경관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백사실폭포 인근에 배수관과 무허가주택 등이 아직도 남아있어 아쉬움이 크다.

백석동천은 조선시대의 별서가 있던 곳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터와 연못 등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등의 각자(刻字) 바위가 있다. ‘백석동천’은 ‘백악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별서유적인 건물지와 연지, 정자터 등이 남아 있다. 이들 별서유적은 2010년도에 발굴·조사된 적이 있는데, 당시의 보고서에 따르면 초석이 남아 있는 사랑채 외에도, 사랑채 후면으로 안채와 중문채 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백사실별서가 1830년대 지어진 600여 평의 별장으로 안채는 4량의 집이며 1917년경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1967년께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사랑채는 ㄱ자 5량의 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를 놓았으나 1970년께 허물어졌다고 하며, 연못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가 1970년께에 허물어졌다고 전한다.

백석동천은 마을과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 격조 높은 별서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별서유적 부지에는 육각정과 연못이 있고, 연못 북쪽의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는 건물 초석 등의 유구가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져 남아있다. 담장은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확인되며 동쪽 담장은 약 15m 정도가 담의 중앙부에 남아있다. 이 별서를 경영했던 주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백석동천 구역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산벚나무가 많고, 아까시나무와 잣나무, 밤나무, 팥배나무 등의 순 이다. 특히 계곡 부위에는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별서유적 주변 수목의 분포를 살펴보면 소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졸참나무, 잣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백석동천은 별서를 경영했던 주인에 대한 사실확인과 복원에 대한 과제가 쌓여있다. 또한 월암과 백석동천 각자들의 글쓴이도 분명치 않은 상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서울 장안에 이곳 만큼 주변 자연환경이 잘 남아있는 별서는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관계에 관심을 갖기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조상들의 별서에서 흔적이 담긴 소중한 명승을 후대에 온전히 보전하는 일일 것이다.

<자료 제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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